반사실적 추리물의 힘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탐정은 독신녀에게 딱 좋은 직업 (작가: 김준희, 작품정보)
리뷰어: 오렉시스, 19년 12월, 조회 205

성별 전환 장르, 흔히 우리가 TS물이라 부르는 장르는 성별이라는 방식을 통해 인물들이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을 뒤집어 보여주는 데에서 그 매력을 갖는다. 찬물을 맞으면 여성이 되는 란마가, 등장인물(쿠노)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물을 뒤집어쓰고 성을 바꾸는 모습에서 긴장과 재미를 보여주는 것처럼. 그런데 이런 재미와 긴장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성별에 대해 사회적으로 굉장히 엄격한 성역할 구분이 전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가령 킨다이치 렌쥬로 작가의 <=그녀>(니코이치)에서 주인공()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여성으로 변장하여 살아가게 되는데, 아무도 두 사람이 동일한 한 사람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2중 캐릭터가 가능하다는 것은, 성별 변장을 통해 전혀 다른 인격으로 보일 수 있을 만큼 젠더 역할이 엄격하게 주어진 채 작동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그렇기에 TS
장르는 고정된 젠더 역할이라는 사회구조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그 구조의 견고함과 부조리함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활용될 때, 이 장르는 흥미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울림을 갖는다. 김달 작가의 <여자 제갈량> 만화에서는 각 진영의 주요 참모와 책사들이 여성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엄청난 재능과 지략을 갖고도 여성혐오라는 당시의 근본적인 시대 한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이를 끊임없이 비탄한다. 즉 원작의 <삼국지 연의>에서 보이지 않았던 투명하고 촘촘한 구조적 벽들이 TS 장르에서 가시화된다. 이 반사실적counter-factual인 사고실험은 세계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어쩌면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소수자의 역사들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문을 제기한다.
<
탐정은 독신녀에게 딱 좋은 직업>은 셜록 홈즈 시리즈의 TS물이지만, 동시에 (작가가 밝히듯) 추리소설 작가 P.D. 제임스의 코델리아 그레이 시리즈의 오마주이기도 하다. (주인공 이름부터가 P.D. 제임스이며, 제목은 코델리아 그레이 시리즈 1<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의 변형이다) 다이애나 랭이 왓슨의 역할을, 필리파 던이 셜록의 캐릭터를 가져간다는 이 건조한 사실에만 주목하면 이 작품은 흔한 추리물 장르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19세기 영국이라는 특정 배경 속에 인물들이 놓이고 시대와 적극적으로 불화하는 모습을 보일 때, 이는 추리물이면서 동시에 흥미로운 여성 캐릭터의 발굴 기회가 된다.
필리파가 다이애나 랭을 룸메이트로 고르고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것은, 단지 랭이 쓸모있는 조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필리파는 랭의 가슴 속에 있는 불만을 본다. 그 불만이란, 여성으로서 그녀를 단조로운 반복적 일상에 집어넣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권태와 괴로움이다. 필리파는 랭에게 필요한 지적 자극을 자신이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랭을 룸메이트로 꼬신다(물론 생활비와 주거환경의 메리트도 있다). 필리파는 랭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를 자극할 만한 직관과 성격을 가진 여자는, 이런 말씀은 좀 실례지만, 퍽 드뭅니다. 여자들이 두뇌 용적이 작게 태어났다거나 자궁이 있어서 뇌에 피가 적게 돈다거나 하는 개소리가 진실이라서가 아니라, 여자들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모든 개성과 사고를 거세하는 것을 목표로 양육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숙녀 양성 교육이라는 맹독약을 먹고도 가끔 자아가 부활해 활개치는 강력한 여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여자들은 아주 희귀합니다. … 그래서 나는 미스 랭을 나의 말동무이자, 룸메이트이자, 좋은 친구로 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랭은 이 말에 깜짝 놀란다. 어디서나 단점으로 받아들여졌던 그녀의 개성을 알아보고, 더 이상 모서리를 잘라내며 둥글게 굴러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그 말에. 필리파는 랭을 더욱 부추긴다. 격식차리고 예의바르게 말할 필요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내뱉으라고. “사고와 지성에 자유를 부여하기 위해” “당신의 뇌와 입에 칭칭 감긴 영국제 강철 사슬을 캐러맬 과자처럼 깨부숴야한다고 말이다.(다만 필리파는 그렇게 빨리 랭이 격식없는 과감한 답변을 주리라고는 예상 못했을 것이다. “”한번만 더 미스 L이라고 부르면 따귀를 때려버리겠다고 해도 말입니까?”” “필리파도 이건 예상치 못했는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소리내 웃기 시작했다.”)
필리파 던이 말하는 숙녀 양성 교육이라는 맹독약, 혹은 뇌와 입에 칭칭 감긴 영국제 강철 사슬은 당시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운 좋게도 다이애나 랭이 필리파와의 만남을 통해 해방의 기회를 일부나마 맛볼 수 있었다면, 작품 8화부터 등장하는 <말보로 공작 살인사건>에서는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한 한 여성이 등장한다. 평생토록 가족, 특히 오빠의 원한에 갇혀 살았던 줄리아가 바로 그 인물이다. 줄리아는 신경 쇠약에 시달리는 인물로 묘사된다. 여기서 신경 쇠약이라는 질병은 특별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에게는 이름조차 이 생소한 신경증, 그러나 18-19세기 유럽과 미국의 중산층 여성들에게는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던 질병이다. 당시 의사들은 이 증상을 신경쇠약’, ‘신경 피폐’, ‘신경과민’, ‘히스테리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이 증상에 시달리던 여성들을 진단한 의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창백하고 여위게 되며, 거의 먹지 않거나 먹더라도 충분히 먹지 않는다. 바느질하기, 쓰기, 읽기, 걷기, 이 모든 것이 그녀를 지치게 하고, 점차 소파나 침대가 유일한 위로가 된다. 그녀는 진심을 다해 모든 노력을 다하지만 쑤시고 아프며, 자면서도 아프고, 각성제와 강장제가 끊임없이 필요하다고 말한다심지어 가장 강한 여성도 끊임없는 무력함에 마침내 자기통제력을 잃게 된다.”(바바라 에런라이크, <200년 동안의 거짓말>, 푸른길, 2017, 158) 신경증은 오늘날 관점에서는 자신의 모든 행위능력을 억제당한 여성들이 겪었던 극도의 우울과 불안증으로 추정된다. 가정에 얌전히 틀어박히도록, 자신의 모든 말과 행위에 사슬을 동여매도록 강요당한 여성들은 한없는 무기력과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다. 그들은 때로 <제인 에어>에 등장하는 로체스터 부인이나 <노란 벽지>의 주인공처럼 완전히 광기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의 온전한 장소를 찾지 못한 채 다이애나 랭이 강요당했던 것처럼 아무 남자에게나 시집가야 했으며 평생 타인을 돌보는 일만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런 맥락을 읽어나갈 때, 우리는 작품 속에서 다이애나 랭이 왜 그토록 결혼이라는 족쇄를 두려워했으며, 필리파 던이 남편을 핵으로 하는 중산층 가정중심주의에 대해 치를 떨었는지를 다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미스 L’미즈 J’가 좁은 다락방에 갇히는 대신 사건 현장을 활보하며 마음껏 추리하고 토론하고 웃고 떠드는 모습들을 볼 때 더욱 반가워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것이 반사실적인 서술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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