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사혈공의 적수는 없음이로다!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야운하시곡(夜雲下豺哭) (하) (작가: 하지은, 작품정보)
리뷰어: 보네토, 17년 4월, 조회 74

오만한 선언이었으되 그 선언이 본질적으로는 눈 먼 선언이었음을, 아들이 죽은 후의 사혈공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도 그 선언을 지속하는 건 역시 염라의 사자(使者) 외엔 적수가 없을 강자의 오만일까. 아니면 아들을 잃은 자의 자격지심일까? 이제 그에겐 약점도 없음을, 하늘 아래 사혈공의 위협이 될 이는 아무도 없음을 아비는 강건하게 외친다.

 

죽은 피가 흐르는 악당이라 하여 붙여진 명호 사혈공(死血公). 명호의 주인은 그야말로 절대자의 풍모를 가졌다.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무인이다. 그러한 사혈공에게 젖먹이 아들이 생기자 사혈공은 아들을 제거할까 잠시 고민한다. 아들이 자신을 닮은 훌륭한 후계자가 될 것을 자신하는 것은 역시 아이를 직접 낳지 않는 남자의 오만일 것이다. 타인의 태를 빌려 태어난 아이가 자신을 닮지 않을 수도 있음을, 사혈공은 일곱 해를 키우며 깨달았을 터이다. 하지만 절대자이면서도 냉혈한 악인이었던 이는 자신의 아들을 사랑했다. 어딜 봐도 갈무리하고도 넘쳐나 아들도 알아차린 사랑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다만 그 사랑이 오래가지 못했다. 아들 휴는 몸이 약했다.

사혈공의 업보가 책으로 엮여 있다면, 그 업책은 아마 지극한 난선으로 뒤덮여 있을 것이다. 하늘 아래 사혈공의 적수가 존재했다. 업(業). 명의(名醫) 지사자를 만났으나, 지사자는 사혈공이 쌓은 업 때문에 사혈공을 거절한다. 어떤 협박에도 지사자가 뜻을 돌리지 않아 결국 아들은 죽는다. 사혈공은 아들을 땅에도, 가슴에도 함께 묻고 은원을 향해 떠난다.

이후 새끼 늑대를 만나 이름을 휴라 지었다. 부르고 싶은 이름이 하나뿐이어서 그랬으리라. 아들을 부르던 입으로 맹수가 될 짐승을 부르며 사혈공이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아마 오래, 아들 대신에라도 오래 살길, 강해져서 우두머리가 되길 바랐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사혈공은 과거에 누군가의 아비를 죽인 일이 있다. 유검의 자비 – 자비는 한때의 사혈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이 이야기는 딸린 가족이 있는 사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비는 죽었고 자비의 아들은 사혈공이 가은당에 맡겼다. 가은당의 여주인과 호위의 이야기는 애틋하지만, 사혈공의 일은 아니다. 사혈공이 은원으로 운을 죽였을 때, 사혈공의 업은 또 한 획, 더 그어졌다. 아들의 무덤을 돌보며, 아들 없는 아비는 오래도록 살아간다. 살아남는다.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늙은 늑대를 맞이하며 사혈공은 자신의 강함을 떠올렸을 것이다. 서글픈 강함이다. 이미 아들이 없는 세상이거늘, 이토록 강하게, 미래 없이.

마지막에 이르러, 오랜 업을 눈앞에 두고 사혈공은 유언을 떠올린다. 하지만 결국 유언을 말하는 일은 없었다.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늘 아래 사혈공의 적수는 없음이로다!

 

열린 결말이지만 눈을 감아 사혈공의 미래를 예상할 수 있다. 이미 아들의 죽음으로 사혈공이 변하고 있으므로. 언젠가 먼 훗날, 아들을 데려간 염라의 사자가 올 때에도 노인은 강건하게 또는 오만하게 하늘 아래 사혈공의 적수가 없음을 생각할 것이다. 자신의 강함을 생각하며, 먼저 떠난 이들을 생각하며, 먼저 떠난 아들을 생각하며 일생을 피로 손을 물들였을 노인에게 가히 필생의 적수가 아니련가. 오로지 그렇게 강건하게 강호를 떠돌다, 자신의 손으로 업책을 한 장 한 장 찢어 모든 은원을 무마시킨 후, 더 이상 악명 없이 자연스럽게 생을 마감하여 아들을 만날 수 있기를- 역시 아들을 둔 부모의 마음으로 먹먹하게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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