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서울을 제한다면 부산만큼이나 부산스러운 곳은 없을 것입니다. 저야 부산을 나선 적이 거의 없으니 다른 곳이야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부산 사람은 부산에 산다는 것에 기묘한 자긍심을 가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를테면, ‘서울 떡볶이 떡은 떡볶이 떡을 쓰고 가래떡을 안 써서 가늘고 맛이 없더라’라고 떠들거나, ‘부산 사람들은 야구를 좋아하며 롯데를 응원한다’ 혹은 작품에 언급된 대로 ‘부산 사람은 술이 세다’라던가요.
앞서 언급했듯 저는 부산 사람입니다. 때문에 부산에 대해 사유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습니다. 그저 제가 사는 곳이고, 앵간해서는 떠나지 않을 곳이며, 그러면 자발적으로든 마지못해서든 사랑해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어항 안의 물고기야말로 어항 속 물에 대해 알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야 바다를 알지 못하는 물고기니까요. 수질의 품평이란 여러 물 속을 헤엄쳐 본 여행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요컨대, ‘부산성(釜山性)’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비(非)-부산성’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나아가봅시다. ‘부산’이라는 이미지는 ‘부산’의 역사와 ‘부산 사람’의 자의와 타의, 그리고 ‘부산을 다룬 미디어’에 의해 재생산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그 결과, 개인이 규정한 ‘부산성’이라는 것은 자꾸만 실제 ‘부산성’을 이탈합니다.
세상은 열려있으나 개인의 사고방식은 닫혀 있습니다. 우리가 걷는 세상 중 개인의 사유할 수 있는 건 단편의 궤적에 불과하며, 언어는 대화를 위해 잠깐 핀으로 박아 둔 포스트잇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언어는 실재를 쫓아가는 궤적에 불과한 것일까요. 모든 것이 골방 속 사유에 불과한 것일까요.
조금 더 긍정적인 대답을 해도 될 듯 합니다. ‘부산성’이라는 것은 모든 ‘부산성’의 집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한 코르크 보드에 포스트잇이 모이고 모여 단서를 형성하듯, A의 ‘부산성’ B의 ‘부산성’ 그리고 무수히 많은 사람의 ‘부산성’이 한 자리에 모입니다. 그 모든 제각각과 집합을 ‘부산성’으로 규정하는 것도 퍽 아름답지 않을까요. 그만큼 세상이 넓다는 반증이니까요.
첨언하자면, 여기는 피난민의 땅이기도 합니다. 단일한 하나의 ‘부산성’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도 합니다. 부산에 잘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