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천명기』는 무협이 아닌가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천명기 (작가: 늠연, 작품정보)
리뷰어: HaYun, 10월 10일, 조회 230

이 리뷰를 쓰는 이유는 늠연님이 남기신 어떤 트윗 때문입니다.

(https://twitter.com/smadus29/status/1181405069423464448) 짧게 말을 하긴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너무 뜬금없고 무례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좀 길게 늘여서 써보고자 했는데, 다 쓰고서 지금 돌아보니까 굉장히 장황하고 긴 글이 되어버렸습니다ㅠㅠ  『천명기』 계속 재밌게 읽고 있고 기나긴 여정의 끝이 어떤 모습일지 정말 기대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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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과연 『천명기』는 무협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글입니다. 항상 “무협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참조되는 “무협이란 중원에서 펼쳐지는 무와 협에 대한 과장된 이야기”라는 좌백님의 정의를 먼제 제시하고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정의는 무협의 배경(中原), 무협의 소재(武), 무협의 정신(俠),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어떠한 방식의 과장)에 대해 말하는데, 이런 얘기를 할 때, 이것만큼 참조하기 좋고 간단한 정의가 없습니다.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은 천명기가 아주 협의의 무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협소설의 클리쉐를 활용한 소설, 다시 말해 구파일방이라던가 무림맹, 문파, 내공 등등을 사용하는 소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소설이 갑자기 이역만리 땅에서 온 무림인들이 아사달을 침공하는 전혀 뜬금없는 전개로 가지 않는 이상 그런 클리쉐들과는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명기』는 무협인가?”라는 물음에서 무협은 광의의 무협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광의의 무협이란, 앞에서 말한 클리쉐들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좌백 작가님이 말한 “중원에서 펼쳐지는 무와 협에 대한 과장된 이야기”라는 정의에 해당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겠죠. 이런 광의의 무협으로서 제시될 수 있는 것의 예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사기史記』의 자객열전에 수록된 일화들이 아닐까 합니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435298&cid=62144&categoryId=62250) 이것들은 무협이라는 장르가 성립된 이후에 무협이라는 담론이 구성되면서 “무협”의 기원으로써 후대의 사람들이 재발견해 제시한 것입니다. 사마천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 없게도 말이죠. 과연 『천명기』 또한 그와 같이 광의의 무협에 포함될 수 있을까요?

 

제목에서도 짐작하셨다시피 저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작가님이 말씀하셨다시피 여러가지 의미에서 이 글은 무협과 거리가 먼 판타지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려면 무협에 대해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협이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많이들 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많기 때문에 길고 장황하게 말할 수 밖에 없겠네요(순전히 제 능력 부족입니다)

 

“중원”이라는 배경과 “무武”라는 소재와 “협俠”이라는 정신은 서로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원”이라는 세계는 거대한 제국적 질서가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의 원칙은 확고하며, 비인간적인 거대한 체계입니다. 중원의 이념-예컨대 유학儒學-은 정의롭고 인간적 세계를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거대해서 전혀 인간적일 수가 없습니다. 이 거대한 세계의 원칙은 개개인의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세계에서 평범한 공경대부(公卿大夫)가 아닌 사람들이 도도하고 거대한 원칙들에 영향을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의롭거나 그렇지 않거나 마찬가지로 사정을 봐주지 않지요. 잔악하고 무도한 살인자라도 지엄한 법의 이름으로 처벌받는 것이 국법(國法)이며, 정의입니다. 악독하고 간사한 벼슬아치라도 사람을 모아 쫓아내는 것은 반란입니다. 중원은 그러한 거대하고 비인간적인 질서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계에도 사람들은 부당함을 느끼고 스스로가 마땅히 쫓아야 할, 세상의 정의와는 다른 어떤 스스로만의 원칙들을 만들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협(俠)입니다. 협의(俠義)는 정의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너무 거대합니다. 협의는 이 세상 속에서 나 홀로 쫓아야 할 원칙일 뿐입니다. 그 원칙이란 아주 단순하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받은 것은 돌려준다는 원칙입니다.

지나라 출신 백정 섭정은 위나라의 엄중자(嚴仲子)가 원수인 한나라의 협루(俠累)를 죽이고자 할 때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그에겐 엄중자가 자신을 알아준 것으로 충분합니다. 조양자(趙襄子)는 어진 사람이었으나 지백(智伯)은 폭군이었고, 예양(豫讓)은 이미 주군을 두 번 바꾸어 지백은 세번째 주군에 불과하였으나 그를 위해 죽었습니다. 그것이 충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마땅하였기 때문입니다. 형가가 진시황 암살을 실패한 이후, 이미 전국을 진이 통일하고 더이상 충성해야 할 나라도 전혀 남지 않았을 때, 고점리는 자신의 축(筑)으로 진시황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것은 진시황이 악인이어서나, 되찾아 충성해야 할 나라가 있어서가 아니라 진시황이 고작 그의 친구 형가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협이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세상의 원칙을 거스르려는 어떤 사람의 원칙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위해서 세상의 힘에 거스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누군가를 위해 세상을 거스르려 합니다. 가족, 친구, 주군, 스승, 제자, 이웃 기타 등등 그와 관계있는 누군가입니다. 그가 위하는 그 ‘누군가’가 좋은 사람인가 아닌가, 그의 행동이 정의로운가 아닌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협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분도 방법도 매우 맹목적이고 독단적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쉽게 공감받지만, 깊게 이해받지는 못합니다(물론 무협 속에서 서사의 역할이란 이런 이해받을 수 없는 협행을 이해받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이해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비웃음에 개의치 않으며, 사람들의 이해와 공감을 구걸하지도 않습니다. 고독한 배트맨은 무협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만, 관심을 구걸하는 조커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의존할 것은 “무武”뿐입니다. 이 “무武”는 전쟁과 병법에 대한 것은 철저히 배제된, 일신의 무력일 뿐입니다. 앞에서 말한 협을 행하려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깊게 이해받지 못하므로 홀로 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깊이 이해받는 정의를 세우는 것은 반란이나 혁명입니다.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에 나아가 문으로써 정의를 바로잡는 방법은 가진 것 없는 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협의에 어긋나는 인물은 세상의 원칙을 통해 보호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수단은 일신의 무력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무협은 항상 “무武”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라도 꿈틀댈 수 있게끔, 혹은 공평하게, 혹은 적어도 가진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닌 주어진 최후의 최후의 수단입니다. 전혀 단련하지 않은 사람도 비수를 숨기고 뒤에서 기습할 수도 있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최후까지 완전히 뺏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에 낭만을 가지고 동경하고, 그것이 무협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런 성격의 “무”라는 것을 이용하여 협의를 실현하는 것. 지금까지 말한 것이 너무도 간단히 정리될 수 있는 것이라 맥빠지지만, 무협의 성격이란 그 견고함만큼이나 단순한 것입니다. 요새는 장르가 점차 해체되어 클리쉐들만 남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협의 감성과 정서와 이야기는 앞서 이야기한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조가 견고하기 때문에 서사와 감성이 한정적입니다. 대개 비장하고, 과하게 진지하며, 비극적이고, 감정적이며, 일상적인 것들에서 거리를 두고 있고 등등등… 또한 장르의 진입장벽이 오랜 클리쉐들을 제외하더라도 크고 특유의 감성에서 벗어난 글을 쓰기도 힘듭니다.

 

“『천명기』는 무협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보도록 합시다. 『천명기』는 거대한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우 동아시아적입니다. 무협을 꼭 중화풍의 세계관이 아니라 한국풍의 세계에서 펼쳐내는데에도 익숙한 한국의 독자라면 굳이 중화풍일 이유는 없습니다. 동아시아풍이면 충분합니다. 천명기의 세계는 무협의 세계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인간적 이념과 상관 없이 비인간적으로 움직이는 체제도 있고, 가진자들과 못 가진자들의 경계가 굉장히 큽니다(심지어 실제로 지리적 경계도 엄청 뚜렷하게 작동합니다). 세상의 힘을 거스르는, 혹은 거스를 수 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고요. 무협세계의 논리가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명기』 이야기의 구조는 협에 대해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 글이 군상극인 탓도 있겠으나,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시대가 세상의 원리에 너무 가깝습니다. 혁명을 일으킬 수 없는 시대의 혁명을 일으킬 수 없는 사람들만이 협객이 되고 무로써 협을 행합니다. 이 글의 주인공들은 항상 조정과 관계하며, 어떤 식으로든 세상의 원리 자체가 이들을 신경쓰고 있습니다. 이들의 세계는 무협의 세계보다 너무 커서 무 이외에는 해결수단이 없는 세계는 이들을 포섭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사람을 부리고, 일반인이 배울 수 없는 술식을 쓰며, 영원히 외로운 협객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이들이 때에 따라 일신의 무예에만 의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과 목표 하나에만 신경쓰기엔 고려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무협으로써는 고민이 너무 많습니다. 협 하나를 위해서 무에만 신경써도 바쁠 마당에 말이죠. 그러므로 『천명기』 세계관을 바탕으로 무협소설을 쓸 수는 있겠지만, 작가님이 방향성을 확 틀어버리지 않는 이상 『천명기』 자체가 무협소설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굳이 『천명기』를 무협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누군가 그렇게 부른다면 그렇게 부를 수 있는거겠죠 결국) 실로 장르의 구분이 약해지는 시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협”이라는 것 자체가 소재화되어 웹소설의 흐름 아래서 다른 장르소설의 색다른 배경 정도로 쓰이는 듯한 것들도 없다고 못하겠습니다. 이런 것을 무협으로 볼 것인가는 하우스 음악의 영향이 더 두드러지는데다가 트로트 음계를 쓰지도 않지만, 어느 정도 뽕끼와 트로트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음악들을 트로트라고 부를 것인가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 장르의 자연스레 발전하거나 향유자들이 적어지거나 등등으로 장르의 경계가 약해지면서 자연히 발생하는 문제들입니다. 디스코와 트로트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락과 메탈은 실제로 경계가 없어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많은 동양풍 판타지들이 무협소설에서 많은 부분 영감을 받거나 소재를 따오기도 했습니다. 동양풍 판타지와 무협소설의 경계가 예전보다 엄청나게 줄어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 한참 좋아하던 어떤 로맨스 작가님도 동양풍 배경의 소설을 쓰면서 무협에서 쓰던 용어들을 잔뜩 끌어다 쓰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무협이라는 장르는 단순히 동양풍 판타지라는 장르와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협은 특유한 배경과 특유한 정신, 그리고 특유한 소재가 서로 상호작용해서 특유의 감성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폭이 좁고 진입장벽이 높은 장르입니다(다른 말로 하면, 규칙이 확실해서 조금만 익숙해져도 그 규칙이 뭔지는 다 알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쓰기 쉽다는 말도 되겠죠. 잘 쓰는 건 정말 다른 문제지만). 그런 관점에서 『천명기』는 무협에 끼워맞출 수 없는 성격의 이야기를 가진 글입니다.

 

그냥 무협 아니다! 하는 말을 이렇게나 길게 쓰다니 저도 참 할 일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글재주가 좋은 편이 아니라 참 난잡한데, 그래도 무엇이 무협이고 아니다 하는 감을 전혀 잡으실 길 없는 분들이 보고 아주아주 조금이나마 갑이 잡히시면 참 좋을 것 같네요. 모두 좋은 새벽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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