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처량한 모순에 관한 서정적인 서술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인공지능 (작가: , 작품정보)
리뷰어: 랜돌프23, 19년 8월, 조회 64

인간의 과학의 집대성 혹은 그 로망으로 불리는 인공지능 시스템은 인간이 그토록 추구하던 순수한 이성 그 자체이거나 정교하게 짜여진 논리적 체계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성의 반의어처럼 사용되어온) ‘감정’이라는 소재는 인공지능이라는 소재와 함께 나타나 여러가지 철학적 물음을 던집니다. 이 소재는 정말 많이 쓰였습니다. <에이아이>, <아이로봇>을 비롯해 그 외에도 정말 많은 작품에서 사용되었고, 그만큼 또 많이 변주되어서 이젠 어떻게 또 변주할 수 있을까 의문스러워질 정도로 바리에이션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런 소재의 소설이나 영화가 나오면 항상 애정어린 눈으로 찾아봅니다. 식상할 수도 있고, 예상이 가는 내용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소재는 그 자체만으로 뭔가 건드려주는 게 있습니다.(제 개인적인 감상일 수도 있습니다) 다루는 철학적 물음은 그 작품 수만큼이나 다양하지만, 어쨌거나 공통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을 법한 질문을 아직 오지 않은 최첨단의 미래 ‘인공지능’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재미난 조화 때문일까요? 그러고보니 학교 교양수업에서 영화 <에이아이> 를 보고 인간과 똑같이 사고하고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영화에서 고통을 두려워한다는 건 손상에 대한 예방 차원에서 작동하는 회피 시스템으로 나옵니다) 또한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로봇은 인간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인간은 환원론적 유물론으로 봐야 하는 존재로서 신경다발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에 불과한가 아니면 로봇과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는 존재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다른 점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레포트를 썼던 것도 떠오릅니다. 따지고 보면 <고통>이라는 감각은 신체의 훼손으로 인해 생존이 불리해질 것을 예방하기 위해 그 위협적인 자극을 불쾌한 것으로 인지하여 당장 멈추게 하고 피하게 만들기 위한 진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으니, 그런 식으로 로봇에 이식한다면 원리적으로 인간의 고통과 다를 바가 없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너무 사적인 이야기를 하였군요. 어쨌든 그만큼 저는 이 소재를 좋아합니다. 이 소재를 가지고 꽤나 긴 장편도 써본 적이 있고요.

전 항상 리뷰글을 쓰면 서론이 길어지는 게 문제군요. 본격적으로 이 소설에 관한 리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이 소설은 ‘인공지능과 감정’이라는 소재로 굉장히 새롭거나 참신한 전개를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무리한 클리셰 부수기가 아니라 담백한 클래식에 뿌리를 두고, 본래 이 소재가 가지고 있었던 매력과 사람 마음에서 건드려주었던 부분을 충실하고 또 훌륭하게 연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종종 이런 소재를 두고 참신함을 추구하다가 산으로 가서 원래 가지고 있던 주제가 날아가고 그와 함께 매력도 증발하는 안타까운 사태가 벌어진다는 걸 생각하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처음에 <아이로봇>을 봤을 때 느꼈던 오묘한 감정이 다시 일깨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 뒤로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고 싶으신 분은 작품을 먼저 읽고난 뒤에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논리적 구조는 논리를 통해 구성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논리적이지 않은 구조는 논리를 통해 구성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논리적이지 않은 구조를 논리를 통해 구성하기 위해 논리의 형태에 근사시키는 순간, 비슷할 수 있을지언정 본래의 그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근사’는 ‘근사’니까요. 이렇게 논리적 꼴에 근사시켜 구성한 모델은 그럴싸하고 충분히 비슷해보이지만, 흉내에 불과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수학의 ‘난수'(亂數)를 표현할 때, 정말 100% 랜덤이라는 걸 구현할 수 없으니 최대한 ‘랜덤스럽게 보이도록’ 수학적 기교를 부리는 것에 빗댈 수 있을 겁니다. 랜덤이라는 게 말이 쉽지, 실제로 다음 숫자가 어떠한 규칙에도 의거하지 않고 순수하게 무작위로 뽑히는 시스템을 만든다는 건 매우 까다로운 일이라고 들은 적 있습니다. 시스템은 규칙에 의해 돌아가는 거니까요. 그래서 검색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난수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개발된 의사난수(擬似亂數) 체계가 꽤 많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상당히 랜덤하게 보이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결코 완전한 랜덤이 아니라, 무작위인 것처럼 흉내내서 숫자를 뽑아내 보이는 것입니다. 뭐, 음악 플레이 랜덤 재생 같은데서 쓸 때 나오는 무작위성은 우리가 이용하기에 썩 괜찮습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본질은 진짜 랜덤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게 흉내낸 것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서 난수가 아닙니다. 계산을 통해서 튀어나오는 난수를 난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임의의 한 두 자리 수를 시작 수로 두었을 때, 그 다음 수를 그 수를 세제곱한 뒤에 가운데 두 자리 수로 한다는 규칙을 넣어봅시다.(자리수가 홀수일 경우엔 정가운데 수와 오른쪽 수를 고릅시다) 첫번째 수를 12로 두면 세제곱은 1728이고, 가운데 수는 72이므로 12의 다음 수입니다. 72를 세제곱하면 373248이므로 가운데 수 32가 다음 수입니다. 32의 세제곱은 32768이므로 76이 됩니다. 이런식으로 쭉 가면 수의 나열은

12, 72, 32, 76, 89, 49, 76, 89, 49, 76, 89, 49, 76, 89, 49, …

눈치 채셨겠지만, 이런 의사난수의 맹점은 어느 순간 같은 수가 반복될 우려가 크다는 겁니다. 즉, 초반(12, 72, 32, 76, 89, 49 까지)에는 꽤 그럴싸하게 랜덤인 ‘척’할 수 있지만, 계속 진행하다 보면 수가 뱅뱅 도는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흉내를 낸 대가를 치른다고 해야할까요… 이를 줄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제안되고 개선되어 도입되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서 ‘감정’은 프로그래밍의 ‘난수’처럼 취급됩니다. 감정이라는 걸 로봇이 느끼게 하기 위해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연산장치가 주인공 로봇에게는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적재적소의 감정이 발현됩니다. 그러나, 이 로봇은 스스로의 감정의 발현을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게 가능합니다. 마치 프로그램이 난수 나열에서 다음 수를 뽑아 보여주면서, 이 수가 어떻게 나왔는지 계산법을 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위에서 난수인 척 했지만 사실은 세제곱 해서 가운데 두 수를 뽑는다는 걸 아는 것처럼) 하지만 이런 의사난수가 사실은 난수가 아닌 것처럼, 논리와 이성으로 구성되고 객관화하여 볼 수 있는 감정이 정말 ‘주관’의 바탕이 되는 감정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작중의 ‘에이미’는 이러한 점을 꼬집어서 로봇을 ‘깡통’이라고 부르고 ‘그건 감정이 아니야’라고 말한 게 아닐까 라고도 생각해봤습니다. 참으로 얄궂은 모순입니다. ‘이해’와 ‘구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이성’인데, ‘감정’은 그 맥락에서 벗어난 대상, 그리고 그 맥락에서 벗어나야 발현되는 주체라서, ‘이성’을 통해 이해와 구현을 온전히 할 수 없다니 말입니다. 결국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근사시킨 감정은 더 이상 감정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러한 거대한 물음에 거창한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장되지 않고 담담하게, 그리고 서정적으로 풀어나가며 ‘실수하는 인간’의 모델을 도입한 건 꽤나 재미있고 재치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근대 사회에서 ‘감정’이 ‘이성’에 비해 폄훼되고 저평가된 건, 비논리적이며 효율적이지 않고 그릇된 판단으로 이끌며 실수하게 만든다는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건 ‘실수’입니다. <포탈2>라는 게임에서 (이하 스포 주의) 천재 과학자들이 달려들어 만든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고 실수 많이 하는 코어가 나온 게 떠오르는군요. 고장나서 정해진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것과 실수하는 것은 명백히 다릅니다. 실수라는 행위는 참으로 미묘하고 오묘한 구석이 있어서, 일부러 실수하도록 로봇에 입력하면 의도된 것인 이상 그건 실수일 수가 없고, 그렇다고 예기치 못 하게 일어나는 실수를 정해진 패턴과 논리로 만들어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쩌면 감정과도 퍽 닮은 구석이 있어 보입니다. 아마 감정을 오롯이 느끼더라도 ‘실수하지 않는 로봇’은 인간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재미난 생각이 잠깐 스쳐지나가기도 했습니다. 주인공 로봇은 시간이 지나 부품이 하나 둘 노후화되어서 감정을 객관화하지 못 하게 됩니다. 작업에서도 자꾸만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요. 하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감정을 구현하고 이해하기 위해 모든 기능을 최상의 조건으로 작동시켰을 때는 목표를 이루지 못 했는데, 오히려 인간답지 못 하고 인간과 먼 존재였는데, 노후화되고 고장이 나서 기능이 퇴화하니까 그제야 감정을 오롯이 이해하게 됩니다. 애초에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었으니, 이성과 논리가 물러나니까 그 공백을 감정이 오롯이 채울 수 있게 된 거라 생각됩니다. ‘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작중에 나온 이 대사가 바로 주인공 로봇이 감정이라는 걸 정말 온전하게 이해하게 된 뜻깊은 대사인 것 같습니다. 왜냐면, 인간도 자신이 왜 그런 감정을 느끼고 이게 무슨 감정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그걸로 평생을 고민하는 가련한 존재니까요.

그리고 실수하고 후회하는 게 정말로 <사람 같습니다>. 실수가 없다면 후회도 없었겠지요. 그리고 이러한 기능의 퇴화가 오히려 ‘더 똑똑해진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인상 깊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비극만큼이나 나타난 놀라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보면, 로봇은 완벽한 이성을 버리고 감정과의 삐걱거리는 공존을 선택함으로써, 본래 없던 것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똑똑해진 거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모순들이 본소설은 로봇과 ‘에이미’라는 사람간의 관계로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단순한 구도이면서도, 그 단순함 속에 명료함이 있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사람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사람답게 하는가에 대한 답이 거창한 연구나 실험을 통해서 나타나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서 온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 속에서 이성과 감정 간의 모순은 다시 한 번 변형되어 마무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로봇은 감정을 통해 에이미를 진심으로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에이미에게 실수하고 나쁜 일이 일어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감정을 버리고 이성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되길 바랍니다. 어쩌면 이건 이 로봇에겐 죽음이나 마찬가지인 일입니다. 테세우스의 배가 떠오르는 항목이긴 하지만, 길어지니 생략하겠습니다. 어쨌든 지금의 연산코어를 새로 갈아끼워서 전과 같은 느낌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면, 그건 더 이상 연속적인 의미에서 ‘나 자신’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동기는 ‘에이미에게 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라는 애매하기 짝이 없고 비논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며 그 동기에 충분히 공감하고 동감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건 정말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였으니까요. 다른 사람의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반응에 논리적이고 이성에 근거한 해결책과 지적을 내놓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일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이해해주는 것, 이건 이성에 의해 폄하되고 저평가되었던 감정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린 이러한 로봇의 판단에 토를 달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저 오롯이 이해해줄 뿐이죠. 에이미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충분한 납득의 근거가 되었으니까요.

주인공 로봇은 감정을 느끼기에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조치에 공포를 느낍니다. 후회도 합니다. 슬퍼도 합니다. 이성밖에 없었다면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 겁니다. 노후화되어서 새 부품으로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고, 그게 장기적 운용에 도움이 될 것이 100% 확실하다고 판단을 내렸을 겁니다. (슬픔에 대해서도 ‘저는 제 자신의 소멸에 대해 슬픔을 느끼고 있다고 연산코어가 도출해내었습니다’라고만 말하고 넘겼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역시 감정은 비효율적이고 나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소설에서 마지막에 로봇이 이러한 부정적 감정을 이겨내고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원동력을 짧지만 강렬하게 제시해줍니다. ‘세상에 태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말입니다. 미래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과거에 쌓아왔던 긍정적인 감정으로 극복해내는 겁니다. 무미건조하게 ‘노후화되었으니 교체한다’가 아니라, 마치 사람처럼, 하나의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죽음이 두렵고 헤어짐이 슬프며 과거가 후회스럽다는 것은 그저 존재한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았고 그 삶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의 반증이며, 존재가 삶이 되고 그러한 삶이 소중하게 된 이유는 그 사이에 있었던 타인과의 교류를 통한 즐겁고 좋았던 감정 때문일 겁니다.

리뷰가 길어졌습니다. 제가 리뷰를 많이 써보지 않은 터라, 서툴고 조금 글이 중구난방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꽤나 인상적으로 본 소설이었습니다. ‘인공지능’이라는 담백한 제목에 걸맞게, 과장되지 않고 화려한 기교 없는, 서정적이고 고전적인 설정과 전개가 근본적인 물음을 건드리는 좋은 소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길지 않으니 다른 분들도 부담없이 읽어보시고 다양한 생각에 잠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리뷰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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