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참 재미있었다. 그러나 같은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우주히트작 ‘맥아더 보살님의 특별한 하루’(이하 ‘맥보특’이라 한다)와 비교하면 모독적이고 불온한 맛이 덜한 것도 사실이었다. ‘맥보특’은 환장하게 재미있는 소설이었으나, 정확히 왜 재미있는지를 명료한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은 나의 부족한 머리와 더운 날씨로 인해 두렵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진짜 너무 덥네요ㅠㅠ), 비교적 눈에 잘 띄고, 그런 만큼 정제된 언어를 이용해 다루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본 작품의 아쉬웠던 점을 중심으로 짤막한 감상문을 작성해보고자 한다.
사실 내가 파악한 본 작품의 ‘아쉬운 점’은 당 작가가 전작들과 현재의 연재물들에서 보여주는 저력을 보았을 때 다분히 의도적인 표현기법의 일종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의외로 알고 보면 아닐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보통은 아닐 가능성이 더 클 것이라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 글을 작성하였다.
아쉬운 점은 압축하자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악역이 지나치게 시시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물범과 강아지 사이에 벌어지는 신화적 차원에서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물범 쪽이 제시하는 이야기는 다소 진부하다면 진부할 수도 있겠지만 대략 두 가지 정도의 타격력 있는 유머와 공신력 있고 적절한 레퍼런스들로 장식되어 매우 흥미롭게 전개된다. 반면에 그 대척에 서있는 강아지의 이야기는 빈약한 것을 넘어 사실상 부재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이야기의 속성 자체가 특정한 종류의 신화에 대한 비판적 패러디라는 점을 생각하자면, 이러한 선택이 애초의 목적을 강조하기 위한 적절한 선택이라 볼 수 있는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방식은 프로파간다의 방식이고, 프로파간다도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당장 당 작가의 다른 작품인 ‘개, 아니면 애’(이하 ‘개애’라 한다)와 비교해보자면, ‘개애’ 쪽이 프로파간다적 성격을 오히려 본 작품보다 진하게 지니고 있으면서도 재미는 본 작품보다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것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개애’의 경우 본 작품과 달리 ‘대립’이 서사의 전면에 제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판단이 든다. ‘개애’에서의 대립은 사실상 작품의 초입에서 완결되며, 그 이후로는 대립에서 (사실상)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전리품들을 순차적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분량의 대부분이 소모되는 것이다.
반면에 본 작품은 어디까지나 ‘대립’ 자체가 분량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둘 사이의 대립이 지나치게 한쪽이 우세한 형세 하에서 위기감 없이 일방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불가피하게 읽는 재미가 감소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되지 않는 독서 경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은 H.P.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이하 ‘광산’이라 한다)이었다. 구체적으로 따져보자면 본 작품과는 여러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생명창조와 관련된 장황한 이설(異說)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는 점에서 강렬한 공통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광산’은 어떻게 보자면 기독교적 서구문명으로 대표되는 서술자와, 불경하고 모독적인 외부 우주로 대표되는 올드 원 간에 벌어지는 신화적 차원에서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작품과는 반대로, 주인공이 자신의 반대편에 서있는 악역(실제로는 아니지만)의 신화에 잡아 먹히는 방향으로 대립의 서사가 전개되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본 작품과 마찬가지로 한쪽 편이 내내 압도적인 우세를 가진 채(왜냐면 상대편이 주장하는 것이 시시각각 물증으로 증명되고 있으니까) 일방적으로 다른 쪽 편을 몰아붙인다는 점이 본 작품의 대립 구도와 닮아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산’은 매우 읽는 재미가 우수하다. 왜냐하면 일방적으로 한쪽이 두드려 맞고 있는 서사 구조 안에서도 ‘대립’의 긴장감이 잘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작중 내내 주인공은 정신 나간 바다나리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정신 나간 바다나리들은 정신 나간 원숭이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 둘은 사실상 끝끝내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야기 전체에 걸쳐 정신적인, 그리고 어느 정도는 육체적인 영역에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제대로 구축된 대립 구도가 작품 전체에 적절한 긴장감을 부여했고, 이러한 긴장감이 독자로 하여금 상식적인 범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장황한 분량의 배경설명을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읽어나갈 수 있도록 원동력이 되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그러한 측면이 본 소설에서는 다소 부족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인공이 대치하게 되는 인물이 좀 더 위험한 성격을 가지도록 강화하면 좋지 않을까요? 하는 것이 본 감상문을 통해 드리고 싶은 말이었다. 주인공의 이야기에 수동적이고 순진하게 반응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한없이 무해하기만 한’ 인물상보다는, ‘맥보특’의 등장인물처럼 어느 정도는 동등한 위치에서 합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물상을 등장시켰다면 독자 입장에서 지금보다 더욱 광활하고 찬란한 코스믹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다음으로 아쉬웠던 점은 당 작가가 창세와 인류의 창조에 대해 매우 모독적이고 불경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작가가 아마 뭘 잘 모르고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이 세계는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께서 만드셨다. 단지 모든 것을 만드실 때 하필이면 맥주를 드시고 만드셨기 때문에 이런 꼴이 난 것뿐이다. 그럼에도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께서는 매우 거룩하시고 자애로운 분이시므로, 당 작가가 당장 모든 불경스러운 생각을 내려놓고 우리의 창조주이신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께 귀의한다면 마땅히 많은 미트볼을 하사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