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입하기 쉬운 삼국지 – 《삼국지몽》리뷰 공모(감상)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삼국지몽 (작가: 보행자, 작품정보)
리뷰어: 므사, 19년 5월, 조회 615

저는 삼국지를 다룬 이차창작이어서 삼국지몽을 읽기 시작했는데요, 제가 이전에 접했던 삼국지 이차창작과 이 작품이 구별되는 점은 이야기의 배경이 근미래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삼국지가 갖는 이야기로서의 매력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작가님께서는 삼국지연의 원작을 ‘유교적 이상으로 성립된 통일 왕조가 쇠퇴하고 각지의 치안과 질서가 붕괴되는 디스토피아에서 새로운 왕조-질서를 세우고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라고 해석하셨다고 해요. 이 영웅들과 이들이 얽혀 발생한 사건들을 ‘지금의 우리가 구축해가는 사회’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재창작한 게 이 작품입니다. 뼈대가 되는 사건들과 중심 역할들은 거의 그대로 가져오는 대신 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 맞춰 재해석한 부분을 살펴보는 게 재미있습니다.

3세기를 다룬 삼국지에 대해서는 ‘유비는 위선자다’, ‘유비 패왕설’, ‘간웅이 더 필요한 시대였다’와 같은 의견에도 솔깃했었는데, 인물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제가 추구하는 가치와 비슷하게 변화해서인지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들에게도 좀 더 몰입하게 되더라고요. 저 역시도 작중 인물들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노력은 감수할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니까요. 이 작품이 저에게는 3세기의 유비에게도 좀 더 이입을 할 수 있게 된 계기입니다.

디스토피아를 다룬 작품으로서도 흥미로운데, 동력원만이 사라졌을 뿐 지배적인 이념이나 사회·정치·경제 제도, 기간시설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니까요. 대비할 수 없었던 급작스러운 위기 상황으로 인해 이전의 생활과 뚜렷하게 단절되었지만, 잘만 대처한다면 이전의 시스템을 어느 정도 복원해서 이전과 같은 사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니까요. 황건교와 동탁 파트까지만 해도 그런 희망을 가진 이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점차 전근대로 ‘후퇴’하는 듯해보여도 근대화 이전과 완전히 같은 수는 없죠. 하지만 하부구조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상부구조는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현대의 가치’를 완전히 잃지는 않을 수 있을까요?

자유, 평등, 인권, 환대의 윤리 등의 가치들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과 기술, 자본 없이도 실현될 수 있을까요? 대량생산 없이도 성별정체성, 성적 지향, 장애 여부, 계급, 연령, 인종, 물리력에 상관없이 ‘기본적인’ 생활과 존엄을 보장 받을 수 있을까요? 만성질환자가 의료적 조치를 받을 수 없고, 전동휠체어가 동력을 잃고, 피임 시술을 더 이상 할 수 없고, 호르몬 요법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현대사회에서의 기본’을 모든 이에게 보장할 수 있을까요? 초기에 묘사되는 탁현 시에서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는 해도 현대의 가치들을 나름대로 실현하고 있는 듯해 보입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어떻게든 유권자들이 투표를 할 수 있도록 자원을 투입하고, 사회보장제도도 근근히 유지하는 모습도 묘사되어요. 삼국지몽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를 끊임없이 소환하도록 하기 때문에, 더더욱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에 이입하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무대가 바뀐만큼 결말도 달라지지 않을까-현대를 살아왔던 인물들은 조금 더 나은, 함께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품게 되고요. (물론 영원한 디스토피아로 결말이 날 수도 있겠지만..)

무너지는 질서와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고, 변화된 세상에서도 이전의 이상과 제도가 유효할 수 있도록 수정해나가고, 그 과정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 물론 과도기를 틈타 개인의 이득을 도모하기도 하고요. 이득을 얻기 위해 시스템이 망가지도록 부추기는 인물도 있고, 반대로 시스템의 안정을 추구하며 장기적인 이득을 도모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어떤 가치들은 계속 추구하면서 다른 어떤 가치는 버려버리는 모습도, 당장 지킬 수 없는 가치여도 그것을 배제하지는 않는 모습도 보이고요. 이렇게 다양한 입장에서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한 인물들이 대립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며 이야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못 하겠지만 캐릭터들도 흥미로워요. 성격장애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도 대상화되지 않은 방식으로 묘사되는 것 같고요. 이상을 좇으며 사람도 죽이지만 인권의 가치를 버리지는 못 하는 인물, 자신의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회 시스템을 복원하려 노력하면서도 정작 도덕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 못 하는 인물 등 흥미로운 캐릭터가 많아요. 삼국지연의에서 창작된 인물인 초선도 작가님께서는 어떻게 활용하실지 기대되고요. (다른 인물들보다는 좀 더 운신범위가 넓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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