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름은 인간 주제에 슬퍼하기도 한다.
-천선란, ‘환상여행’ 리뷰, 스포 있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언니와 은서 둘 뿐이다. 인물 비슷한 걸 찾아보자면, 죽은 동생과 죽은 동생의 배에 얹혀 통증을 유발하는 거대한 슬픔 덩어리를 말할 수 있다.
동생은 무거워진 배를 들고 돌이 많은 계곡에 가 죽는다.
동생도, 엄마가 치매에 걸린 것도, 죽은 동생의 배에 들어있던 슬픔이 빠져나와 구르다 언니 배에 부딪힌 것도,
모두 사고다.
사고가 없는 일상은 모두 점심 메뉴 같은 거다. 하필 사고가 난 인물들은 강박적으로 뭘 삼켜서 소화하려고 노력한다. 슬픔이 점심이 되게, 슬픔이 저녁이 되게. 그러다 보면 다시 점심에는 점심 메뉴를, 저녁에는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날이 오겠지. 육체가 내일을 위해 움직이겠지. 그런 희망을 가지면서 말이다.
은서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사람이다. 은서는 죽을 먹이는 사람이다. 은서는 대신 씹어 소화해주는 사람이다. 윗니와 아랫니를 아주 천천히, 담담하게 들었다 내려놓는 사람이다. 은서는 죽은 것들이 남아있는 방에서, 언니에게서, 퍼다 먹인 슬픔을 도로 앗아간다. 조금씩 자주.
먼저 태어난 언니는 동생이 죽고 동생이 된다. 아픈 배를 되돌려 받는다. 담담한 동생의 친구에게 밥을 먹이고, 재우고, 엄마를 닦는다.
은서에게는 은서의 슬픔을 확인받고 싶어 하고 엄마에게는 다 말해버리고 싶어 한다. 이기적이고 자기방어적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일찍 소멸해버리는 바람에.
아픈 배를 움켜쥐고 그렇게 말한다.
너무나도 인간스러운,
이름도 없는 주제에 언니는 울지도 않고 슬퍼한다.
작고 좁은 변기 안에서 사람들은 각자 다른 시계를 차고 있다. 모두 다르게 출발하고 모두 다르게 도착한다.
배가 아파 죽은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거워진 배가 늘어져 슬픔의 밑바닥까지 가닿은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나라면 어떨까.
내 통증과 슬픔 중 어느 것이 이길까.
잘 쓴 글을 보면 따라 쓰고 싶다. 소설을 다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나는 누군가의 1초를 바꾸는 일에 평생을 바치고 있다. 이 작가는 오늘 내 꿈의 한 조각을 훔쳐 먹었다. 이왕 훔쳐 먹을 거면 달콤한 레몬 케이크 맛이 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