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서론부터 풀어보자면, 저는 꿈을 다루는 작품을 읽을 때마다 꿈이라는 단어가 중의적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곤 해요. 꿈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잠을 자고 있는 도중에, 혹은 그 외의 이유로 의식의 명료함이 저하된 상황에서 진입하게 되는 정신의 세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의식의 명징함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끊임없이 갈망의 대상으로 마주하게 되는 또 하나의 현실’을 의미하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이처럼 이름만 공유하고 있을 뿐, 명확하게 의미가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념을 사람들이 묘사하는 방식을 보다 보면 둘 사이의 경계가 생각보다 명료하지 않다는 인상 때문에 혼란스러울 때가 있어요. 반면에, 둘이 가진 공통점은 언제나 명확해 보이죠. ‘꿈에서 깨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자면서 꾸는 꿈도, 원하는 미래에 대한 꿈도 ‘현실’과는 다른 가상세계라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 말이에요. 그리고 픽션 속에서는 이러한 공통점을 기반으로 전자의 꿈이 후자처럼, 후자의 꿈이 전자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고요.
그런 생각에 빠져있다 보면 비록 후자의 의미일지라도, 그 꿈이라는 것이 때때로 현실에서 구현될 경우가 있다는 것이 한 순간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실제로 ‘꿈을 이룬다’는 형식에 의해 종종 어떤 이들의 꿈이 현실로 도입되곤 하니까요. 그리고 많은 경우, 그처럼 현실화된 꿈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까지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치기도 하고요. 그럼 후자의 꿈이 전자의 속성을 포함한다는 시각 속에서 보았을 때, 그렇게 꿈에 의해 변이된 현실은 과연 나에게, 혹은 타인에게 여전히 명백한 현실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현실이 그저 전자의 의미로서의 꿈에 불과하다는 관념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야기로 다뤄져 왔죠. 당장 제가 쓰고 있는 이 감상문의 대상이 되는 은우님의 소설도 현실과 꿈의, 서로 분리되기 어려운 속성에 대해 묘사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와 같이 현실이 꿈일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는 그와 관련된 새로운 종류의 의문점, 현실이 꿈이라면 이 꿈은 내가 꾸는 나의 꿈인지, 아니면 남이 꾸고 있는 남의 꿈인지에 대한 의문점으로 이어질 수 있었죠. 또한 이 전자의 꿈에 대한 의문점을 후자의 꿈에 대한 관점에 그대로 적용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은우님의 ‘에덴 동산’이 바로 이 꿈에 대한 두 가지 의미가 모호해지는 지점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이 꾼 꿈이 자기가 낳는 아이의 삶이 된다(실제로는 좀더 온건한 설정이지만)는 설정 자체는 곧바로 전자의 꿈과 관련하여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들’을 연상시키지만, 그러한 관념 자체만을 짚고 넘어가는 보르헤스의 작품과는 달리 은우님의 소설은 후자의 꿈이 가지는 핵심적인 속성인 욕망이라는 소재를 이야기에 더함으로써 한 단계를 더 나아갔던 것 같았으니까요.
왜 작품 속에 욕망이라는 개념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냐 하면, 저는 아무래도 인구절벽이 전세계적인 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요즘 시대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니만큼, 자동화된 출산 시스템을 연상시키는 에덴의 설정을 현실의 상황과 겹쳐보지 않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어요. 극도로 종교적인 색채로 포장되어 있으면서도 기묘하게 인공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띠고 있는 에덴의 시스템은 코스믹 호러에서 등장하는 비인간적이고 절망적인 우주의 권화로 읽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에게는 그보다 누군가의 병적인 욕망, 누군가의 역겨운 꿈이 실체화된 현실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여졌거든요. 그것은 보르헤스를 읽은(실제로는 안 읽었겠지만) 차우셰스쿠의 꿈이었을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 나이지리아 아기 공장 운영주의 꿈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정신 나간 누군가의 꿈이었을 수도 있겠죠. 그리고 주인공, 좀더 포괄적으로는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사육되는 모든 ‘여신’들은 그 꿈에 의해 꿈꾸어지는 존재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고요.
그리고 이런 상황에 처한 주인공은 자신이 살아온 삶이 그저 꿈에 불과했다는 남자의 설명과 마주하면서 현실과 꿈 사이의 떼내기 힘든 경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에덴의 실체에 접하게 되면서부터는 욕망을 방아쇠로 하여 그러한 인식을 점차 증폭시킨 것 같았어요. 욕망이 방아쇠가 되었다고 본 것은, 주인공이 최종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진정한 현실이 아닌 것으로 확신하게 된 이면에는 눈앞에 펼쳐진 미치광이 같은 체계에 절대로 종속되고 싶지 않다는, 바꿔 말하면 뒤틀리고 병적인 욕망으로 가득한 타자의 꿈에서 놀아나고 싶지 않다는, 그 대신 자신이 원하는, 자신이 주인공인 꿈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강력한 원망(願望)이 그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고요.
이러한 추측을 통한다면 결국 결말의 주인공은 후자의 의미로서의 타인의 꿈에서 살아가기보다는 자신의 꿈을 선택한 존재라는 맥락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죠. 그게 주인공 개인에게 좋은 선택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마치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에게 선악과가 남았던 것처럼(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야훼의 꿈을 꾸기보다는 선악과를 먹는 자신의 꿈을 선택했다는 상징으로 선악과가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자신의 꿈이 아닌 뱀의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론에는 취약한 논리입니다만) ‘남의 꿈에 의해 꾸어지기보다 자신의 꿈을 꾸는 것이 좋다’는 강력한 메시지만은 소설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었으니까요.
전체적으로 무난하게 재미있었고, 꿈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준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해요. 다만 작품 전체가 한 가지 아이디어만으로 지탱되고 있는데, 하필이면 그 아이디어가 상당히 오래 묵은 종류였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고 봅니다. 입밖에 내기가 좀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사실 이젠 제목을 말하는 것 자체가 진부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워쇼스키의 매트릭스조차도 이 작품보다 몇 단계 더 나가기는 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