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스템 덕분에 30일 동안 하루 한 작품 씩 꾸준히 읽어보았다. 책이야 늘 읽고 있지만 1일 1단편이라는 걸 의식적으로 해나간다는 건 그 나름대로의 감회가 있었다. 끝내고 나니 ‘벌써 30일이나 지났구나’ 하는 느낌도 있다.
1일 차. 아이디어보다 막상 쓴 글이 더 큰 작품. 점점 커져가는 작품을 처음의 아이디어로 수렴하려 하면서 끝으로 갈수록 작품이 점점 작아져간다. 그래도 재밌음.
2일 차. 초반에는 대화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전개가 느린 거 아닌가 좀 투덜거렸지만 중반부터 순풍을 맞은 듯 쭉쭉 나갔다. 새삼, 단편은 딱 이정도 분량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일 차. 테이스티 문학상 수상작. 달달한 과자보다는 쓴 커피 맛이 떠올랐다. 그것도 아주 진한 에스프레소로.
4일 차.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 읽을 때도 느낀 거지만 문장이 잘 읽힌다. 너무 건조하지도 않고 너무 화려하지도 않아서 불호가 거의 없을 듯한 문장. 소품에서 33매면 많다 싶기도 한데, 지루한 부분없이 술술 잘 읽혔다.
5일 차. 블랙코미디. 주인공의 암울한 처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깊었다. 아스트라이아를 읽은 후에 읽은 작품이라 좀 아쉽게 느껴졌다. 선입견이 생긴 탓이리라.. 반전이 없는 게 반전이라는 식인데 이게 좀 흐지부지한 느낌이다.
6일 차. 짧은 분량에 많은 인물이 나와서 좀 산만했다. 그래도 두 가지 반전을 놓아두는 빌드가 좋아서 괜찮았다고 생각함.
7일 차. 18매 만으로 이만큼 해낸다는 게 대단하다. 엽편의 한계를 초월했다던가 하는 건 아니지만, 짧은 분량에, 담겨있는 정보량이 적은 그대로 군더더기없이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8일 차. SF에서 과학문명을 다루는 데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광속 항해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질 정도의 문명이라면, 그리 자세하게 우주선의 과학기술에 대해서 서술하지 않는다. 행성에서 행성으로 건너가는 기술은 마치 서울에서 대전으로 자동차를 타고 내려갔다는 정도의 느낌으로 서술되고, 작중에서도 그런 식으로 작용한다. 반면 행성 간의 이동이 좀 더 어려웠을 시절을 다루는 작품은, 이 이동이 좀 더 무거운 것이 된다. 화성에서 지구로 떠나는 것을 ‘결코 이동할 수 없는 거리는 아니지만’ ‘워프게이트를 타니 눈을 감았다 뜨자 지구였다’라는 식으로는 쓰지 않는 걸로 무거움을 나타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우주시대가 도래하면 인류에게는 ‘새로운 거리감’이라는 게 생길 것이다. 걸리는 시간이 같더라도 서울에서 대전과는 다른 느낌의 거리감이 되지 않을까. *하드SF는 아님.
9일 차. 글의 대부분이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이야기일 뿐인데도 몰입이 잘 되었다. 어린 시절을 다루는 작품 특유의 노스탤지어도 좋다.
10일 차. 좀 뻔한 얘기긴 했는데 초반부에서 미스디렉션이 능숙했다. 결말을 보기 전까지는 전혀 다른 얘기인 줄 알았고, 결말을 본 후에는 낡은 트릭에 눈 뜨고 코 베이듯이 낚였다는 걸 깨닫고 놀랐다.
11일 차. 매수가 짧은 작품 위주로 읽긴 했지만, 작가의 스타일이 딱 상황에만 집중해서 간결하게 쓰는 타입인 것 같다. 이런 스타일이면 중장편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졌다.
12일 차. 왠지 모르게 이런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은 있는데 단언은 못하겠다. 좀 더 써야 이야기가 제대로 구성되겠다 싶었는데,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는 생각도 딱히 틀린 건 아닌 것 같아서 건드리기 힘든 느낌.
13일 차. 초반부는 재밌었는데 결말은 좀 허무했다. 느긋한 템포로 전개되던 것과 다르게 결말이 급작스럽기도 했고. 이 작품에 필요한 건 급격한 방향전환보다는 일관성이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14일 차. 플롯 위주의 스릴러다. ‘영리하다’는 말이 어울린다. 플롯으로 승부보는 작품은 늘 평균 이상의 재미는 주는 듯. 살인마 공모전에 내면 당선될 것 같은 작품.
15일 차. 최근에 ‘셰이프 오브 워터’를 봐서 그런가 기예르모 델 토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6일 차. 일곱 통의 언간을 하나하나 해석해가며 주제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는 구성이 좋았다. 예전에도 이 비슷한 걸 어디선가 보고 이거 괜찮다고 생각했었던 기억이 있는데, 무슨 작품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리뷰가 있는데 리뷰도 재밌게 읽었다.
17일 차. ‘시계 바늘 위의 선택’을 재밌게 읽어서 찾아보게 되었다. 저지르게 됐을 범행을 보여줌으로서 무고한 이들이 떼죽음 당한 게 아니라 악인의 죽음이라는 식으로 해명한다는 느낌.
18일 차.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작품소개를 읽고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생각해보았다.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은 이것은 ‘나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이것은 아들의 이야기다.’ 이것은 좀 더 그럴 듯하지만 내키지 않는다. ‘이것은 아버지의 이야기다.’ 더 나아진 것 같지만 완전히 정리한 것 같지는 않다. 작품 자체는, 어려운 소재였던 만큼 지금보다 좀 더 완벽한 형태가 있었을 것 같아서 좀 아쉽다. 조금만 더 완벽했으면 아쉬움없이 좋았을 듯.
19일 차. 공모전에 아슬아슬하게 제출했다는 글 때문인지 좀 급하게 쓴 느낌이 든다. 작품 자체에 급하게 쓴 티는 별로 안 난다. 문제는 제목이다. 작중에서 ‘친절한 이웃’이란 제목이 반어법으로 작용하지도 않고, 정말로 이웃이 ‘친절한 이웃’이란 제목을 쓸 만큼 친절하지도 않다. 추측해보자면, 좀 더 처절하게 몰아넣었어야 하는 걸 마감 때문에 중간에 선회해서 마무리 지은 느낌.
20일 차. 예전에 재밌게 봐서 다시 봤는데 역시 재밌었다. 탑승 보류라는 이상한 상황에서 뜬금없이 심리역사학을 주제로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간다는 기묘한 흐름인데 재밌다. 유명한 작품 중에 비슷한 걸 꼽아보라면 맨프롬어스 정도.
21일 차. 스토리는 단조로운 편이지만 마임맨이란 소품의 매력이 대단하다. 최근에 본 작중의 소품 중에선 가장 매력적인 듯하다. 명작이라 불리는 정말 유명한 작품들에서조차 소품은 대체로 기괴한 이미지만 내세우기 마련인데, 마임맨은 착실히 이야기를 굴리는 톱니바퀴 역할까지 착실히 수행한다. 만약 시리즈화 하는 식으로 더 살릴 수 있다면 한국공포 소설의 대표적인 소품이 될 수 있을듯, 까지 쓰고 태윤님의 리뷰를 읽었는데 똑같은 의견이라, 마임맨에 대한 매력이 객관적인 의견이라는 걸 확인받은 기분이다.
22일 차. ‘의식의 끈’이라는 비유를 그대로 구현해본 느낌의 소설. 의식의 흐름 기법 자체가 장단점을 다 포함하고 있어서 굳이 장단점을 정리해볼 필요는 없을 듯.
23일 차. ‘한국 작가가 일본인을 주인공으로 쓴 소설은 다 재밌다.’ 왠지 그런 인상이 있어서 읽어보았다. 작품 소개의 ‘여행객’이 당연히 일본인이 일본에서 국내여행하는 건 줄 알았는데, 한국인 가족이 주인공이어서 내 예상과는 조금 빗나갔다. 초중반부는 좀 지루했는데 후반부에서 다 만회한다. 작가의 여러 작품을 읽어봤는데, 100매 이상의 작품보다는 100매 이하의 작품에서 결말을 더 잘 쓰는 것 같다.
24일 차. 위에서 작가의 중장편이 궁금하다고 적었던 터라 이걸 골라서 읽어보았다.
주인공을 보며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떠올랐다. 절망적인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일상을 버리면서까지 노력하는 사람. 그런데 그에게 닥칠 최악의 상황은 절망적인 미래가 그대로 찾아오는 것인가,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미래를 대비했던 모든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현재의 상태가 그대로 고착화되는 것인가? 예언자의 딜레마다. 예언한 미래가 찾아오지 않으면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게 되는. 이야기가 좀 단조롭긴 한데, 그 부분에서 손해를 본 만큼 글이 몰입감이 있다는 느낌이다.
25일 차. ‘과자로 지은 사람’ 때도 느꼈지만 테이스티 문학상 출품작이라는 게 놀랍다! 두 작품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차라리 식인 소재의 소설이 더 활기차지 않을까 싶음.
26일 차. 이걸 시작할 때 취지는 최대한 다양한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보자는 것이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읽어본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는 경우도 있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전작 독파를 결심했으므로 마음 내키는 김에 읽어보았다.
이 단편이 힘을 더 발휘하려면 시리즈가 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한 편이라기엔 애매하고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 느낌? 드라마 에피소드 하나가 완결성을 띤다고 해도 그 에피소드가 그대로 영화가 될 수는 없는 것처럼(90분 드라마 같은 경우는 빼고), 이 작품의 주인공의 행보도 끝난 것 같지가 않다. 마지막에서 고양이 탐정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도 감상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27일 차. 펭귄 작가의 작품. 아직까진 작가의 단편보다는 장편이 더 취향에 맞는 것 같다. ‘좀비는…발현의 의미가 더 크다. 그전에는 좀비가 없었을까?’ 이 문장이 작품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듯하다. 새벽의 저주 류의 전통적인 좀비물과 달리 좀비들이 의식이 있어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기존 계층과 반목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개인적으론 그렇게까지 기막히게 뛰어나고 정교한 비유는 아니었던 것 같다. 문득 든 의문인데, 아버지는 좀비가 되지 않은 걸까?
28일 차. ‘낯설게하기’라는 기법을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뛰어난 기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도 낯설게하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작품이다. 『친구』가 ‘『친구』’인 것처럼.
초반에 『친구』의 이미지를 확실히 잡아놨는데 그 이후로 모습이 변하는 것은 좀 아쉬웠다. 비유하자면 소년만화에서 갈수록 적이 포스가 없어지는 느낌? 드래곤볼을 역순으로 보면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마인부우 대신 블루 장군이 가장 마지막에 나온다고 생각해보면..
29일 차. AI로도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 부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싶다.
재밌는 이야기긴 한데 재밌는 만큼 분량 배분이 좀 아쉽다. 시점을 기준으로 나누면 총 세 파트로 나눌 수 있을 텐데, 앞의 두 파트는 이렇게 길 필요는 없었던 것 같고 마지막 파트는 더 길어야 할 것 같다.
30일 차. 엽편은 복불복이란 인상이 강한데 다행히 재밌었다. 짧은 분량 안에서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세워서 흥미를 끌고, 분량이 짧다 보니 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작품이 끝나서 독후감도 좋다. ‘안개가 도시를 우유처럼 뿌옇게 뒤덮은 정오 무렵’, ‘자그마한 공처럼 변해가는 아이들 앞에서 시민은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같은 문장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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