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미셸의 멸종과 바나나 공화국(Banana Republic)
작품을 논하기에 앞서 화자 ‘미셸’을 상징하는 오브젝트로 등장한 그로미셸 바나나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나나는 여타 작물과는 다르게 ‘씨가 없는’ 즉, 생식 능력이 전무한 상태로 출하해야 상품가치가 생기는 특수한 작물이다. 이 특수성이 바나나의 유전자를 획일화시키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고. 푸사리움균에 의한 파나마병이 그로미셸 바나나의 상품적 가치에 멸종을 선고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 기인한다. 그러나 당시에 일어났던 하나의 소동이 과연 ‘무분별한 유전자 교배’라는 하나의 인과로 발생했던 일일까.
미국의 단편소설 작가인 오 헨리가 1904년에 발표한 <양배추와 왕들>이라는 작품에선 온두라스를 빗댄 가상의 공화국이 등장하는데, 이 국가를 지칭하는 데 쓰인 단어가 바로 ‘바나나 공화국’이다. 1
바나나는 플랜테이션의 대표 작물로 상징되는 만큼 중미와 인도, 동남아에서 대량 생산되는데, 이 모두가 다국적기업의 독과점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이곳에서 개인소유의 바나나 농장은 살아남기가 어렵다. 단순히 그로미셸이 무분별한 유전자 교배라는 인과 때문에 탄생한 종이었다면 1950년에 세계를 덮친 ‘바나나 멸종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획일화된 유전자가 그토록 빠르고 넓게 열대 농업지구에 퍼질 수 있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유전적 획일화뿐 아니라 농가 사업체의 획일화가 동시에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다국적 농업 기업의 독과점 플랜테이션은 비정상적인 농업 재배구조를 만들었고, 이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재배된 것이 바로 ‘그로미셸’이었다.
오늘날 바나나 플랜테이션에 이용되는 품종은 ‘캐번디시’다. 곰팡이 균에 내성이 강한 종으로 그로미셸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지만 여전히 획일화된 유전자와 농업구조로 유통되고 있는 중이다. 작품 내에 등장하는 미셸의 조부는 바나나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는 다국적 기업과 몇 가지의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로미셸 품종을 탄생시켰으나 멸종 해버리는 결과를 맞이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종(캐번디시)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 그 새롭게 생산한 종마저 언제 멸종해버릴지 모르는 불안감과 함께 살아야한다는 것.
보다 더 매끈한 피조물(The Creature)
작중 내에서 미셸은 매우 다양한 소재에 비유되었지만, 나는 글을 읽으면서 오히려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을 떠올렸다. 양쪽 모두 탄생에 인위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점과 대중들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점, 원치 않게 태어나서 절대적 고독감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 등의 유사성을 공유한다.
작픔이 시작 되는 공간은 매우 의미심장한 장치가 숨어 있는 듯 보인다. 작품에서 배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은 오직 둘 뿐인데, 아무리 단편소설이라고 해도 이는 상당히 제한적인 영역이다. 도입부에 등장한 ‘바이칼 호가 보이는 슬류단카의 작은 집(이하 작은 집)’과 미셸의 ‘저택’을 비교해보자. 사실상 작은 집은 도입부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으므로 이 소설의 배경공간은 미셸의 저택뿐이라 말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작가가 화자인 미셸을 굳이 작은 집에서 등장시켰다. 일정한 의도가 있다고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셸은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처럼 세계로부터 고립된 존재다. 이 고립에는 두 가지 면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유전적인 취약성으로 인해 생명을 위협받는다는 태생적 고립과 비윤리적이고 탐욕스러운 방식으로 태어나 사회로부터 지탄받는다는 사회적 고립이 양존한다. 사회적 고립은 미셸이 기차역의 플랫폼으로 가는 동안 표면적으로 드러난다.
‘사람들이 메신저로 끊임없이 바나나 이모지를 보내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에서 계속해서 바나나 사진에 나를 태그했다. 바나나 걸이라고 대문짝만하게 프린트 된 내 티셔츠는 뉴욕 기념품점 아무 곳에서든지 살 수 있다.’
이 외에도 인스타그램에서 그녀의 불행을 ‘카르마’라 지칭한다든가, 혹은 그녀의 영상을 교묘히 합성해서 배포하는 식의 악행이 서사 내내 반복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고립을 미셸은 꽤나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미셸을 작은 집에서 끄집어내어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게 만든 원인은 따로 있다.
‘기차에 올라탔다. 드물게 화창한 날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다. 동생들이 먼저였고, 어머니 다음이었다. 나는 결국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에 참석할 사람이 오직 나뿐이었으므로.’
그와 매우 유사한 유전자를 공유한 아버지의 죽음은 곧 미셸의 죽음이기도 하다. 농장에서 재배되는 바나나가 모두 유전적 쌍둥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미셸은 자신의 유전자가 사멸해가는 과정에 당도해있다. 미셸을 외부의 ‘작은 집’에서 다시 숨 막히는 고립의 공간인 ‘저택’으로 불러온 것은 바로 미셸이 마주해야 하는 유전적 죽음(고립)이었다. 일가는 이미 모두 몰살당해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할 사람조차 없다. 그 일가를 재배한 할아버지는 아들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는다. 혼자서 빈소를 지켜야 하는 와중에 미셸의 SNS로는 끊임없이 조롱이 담긴 사회적 고립이 밀려들어온다. 좀 더 매끈하게 다져졌을 뿐, 미셸은 미래의 ‘피조물’이라고 부를만하다.
이렇듯 작가는 미셸을 철저히 외부로부터 고립시킨 상태로 서사를 시작한다. 바이칼 호수라는 개활지에서, 기차역의 플랫폼이라는 한정된 공간으로. 다시 시체와 나란히 서 있으면 꽉 차버리는 좁디좁은 빈소로. 공간의 변주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샤론프로이데
소설의 중심 내용은 미셸과 아마디스가 나누는 세 번의 대화로 이뤄져 있다. 이는 곧 미셸의 인식 및 사유가 변화하기까지의 경로이기도 한 셈인데, 아마디스와의 첫 번째 대화에서 미셸은 본인의 자서전이 갖게 될 의미를 ‘샤론프로이데’라고 예상했다. 이는 곧 그녀를 가둔 사회적 고립성에 대해 말한 셈이다. 아마디스는 바로 다음 대화에서 계급적 차별성과 양극단의 단절에 대해 설파하고, 다소 냉소적인 미셸의 반응을 듣는다.
사실 미셸의 냉소적 반응은 이미 아마디스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예견된 바가 있다. 50살의 같은 나이임에도 어머니와 딸처럼 보이는 이 외양은 두 사람의 계급간 격차를 보여주기에 알맞은 연출이다. 시위둥이인 아마디스와 승리의 여신인 미셸 간의 격차는 동시에 아마디스가 미셸에게 ‘당신은 내 딸처럼 보인다.’라고 말한 순간에는 또 다른 분절로 드러난다. 사회나 유전적으로 고립되지 않은 채 가족 구성원을 이룬 아마디스의 모습은 일가가 몰살당하고 할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미셸의 처지와 대비되기 때문이다.
이 격차가 미셸의 사회적 고립을 생성해냈다는 면에서, 아마디스가 펴낸 자서전이 샤론프로이데로 소비될 것이란 미셸의 추측은 대체로 설득력을 갖는다. 미셸과 아마디스가 정서적으로 가까워진 두 번째 만남에서도 미셸은 본인의 모습이 합스부르크가 왕조의 초상화처럼 남을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이 쓸쓸하고 자학적인 냉소로 가득한 대화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은 세 번째 대화부터였다.
“니케가 자라는 동안에 다른 한편에서 나같은 시위둥이들도 자랐어요. 당신 가족과 그 주변은 크림 구름 위에서 성을 짓고 살았으니까 우리가 한 번도 마주칠 일이 없다는 게 놀랍진 않네요. 장애나 병의 정상성에 대해서 들어봤어요? 아주 오래된 개념인데…….”
아마디스가 자신의 딸이 청각장애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미셸과 아마디스 사이의 단순한 관계가 변화한다. 미셸 – 아마디스의 관계는 자본으로 은유되는 계급과 사회적 격차였다. 자본력을 통해 수만 분의 일을 만들어낸 리치와 그 반대편에서 사회적 양극성을 반대한 시위둥이의 격차였다. 그러나 미셸 – 아마디스 – 아마디스의 딸 세 사람의 관계에서 계급적 격차는 단숨에 일소되어 버린다.
“백 년 전만 해도 여전히 국가 정책과 사회적 방향은 장애인들이 재활과 보조수단을 통해서 정상성을 회복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있었어요. (중략) 그런데 온갖 비현실적이고 SF적인 상상을 잘하는 당신이 하나만 생각해봐요. 오로지 수어만 통하고 아무도 듣지 못하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 당신이 떨어지면 며칠이나 살 수 있어요?”
장애의 개념은 사회와 시대마다 새롭게 정의된다. 사회의 시각에서 아마디스의 딸은 청각장애인으로 단절을 겪겠지만 아마디스와 그녀의 딸만의 세상에선 수화를 모르는 미셸이 단절을 겪는다. 미셸의 조부는 더욱 완벽한 신을 만들기 위해 미셸을 가공했으나 아마디스는 딸의 장애를 가공하지도, 존재를 지우지도 않았다. 대신 결여에 다가가기 위해 ‘수화’를 배웠다.
이 시점에서, 더 이상의 샤론프로이데는 없다. 오픈형 플랫을 만들고 수화를 만들어 결여의 틈을 메우는 이들에게서 미셸은 그 어떠한 적의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에 미셸은 자서전의 집필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스스로가 정한 자서전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의미의 공백에 아마디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본심을 채워넣는다.
“글쎄요. 나는 백번 말해도 당신이 속한 절반의 사회는 듣지 않더군요.”
아마디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미셸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이들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녀를 저택으로 부른 것은 사회적인 조롱이 아니라 아버지의 부고였다. 그녀를 진정으로 고립시킨 것은 자본을 통해 신에 당도하려 했던 그녀의 조부들이었던 셈이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결말에 대해 논하고 싶다. 병에 걸려 시한부 상태에 놓인 미셸이 자신의 자서전 제목을 ‘미셸의 고백’에서 ‘나는 바나나다’로 바꾼 것은 스스로에 대한 냉소성을 더욱 높인 처사였다. 그리고 미셸과 그의 아버지, 동시에 그의 조부가 매우 유사한 유전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본인의 할아버지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도 이와 비슷한 유명한 대사가 등장한다.
“내가 이토록 잔인해진 것은 억지로 내게 정해진 이 진저리치도록 고독한 삶 때문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