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정말 너무 웃겨요.
요원에게 납치당한 뒤 재회한 동료와 만담처럼 따귀를 주고받는 장면에서는 육성으로 웃음이 터졌을 정도예요.
사실 며칠 전 프롤로그만 보았을 땐 별 감흥 없이 뒤로가기를 눌렀어요. 탈모인을 놀리는 내용이야 인터넷에서 이미 많이 접했으니까요. 너무 자주 봐서 이젠 재미 없다, 라는 생각이었어요.
다시 말해 ‘소재주의’에 함몰된 작품일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그런 경우가 많죠. 독특하고 시사성 있는 소재를 발굴해 낸 것까지는 좋은데, 오직 그것 뿐인 작품 말이에요. 소재를 이용하는 데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이야기’는 뒷전이 되어버린 경우가 종종 생기곤 합니다.
물론 그런 작품은 그런 작품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어떤 소재가 주는 독특함에 대해 깊이 고찰하다 보면 평소 생각치 못했던 시사점을 선취할 수도 있고요. 그런 아방가르드함이야말로 문학을 진일보시키는 데 일조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빛나는 녀석들>처럼 코믹하긴 힘들겠죠.
그와 달리 <빛나는 녀석들>은, 튀는 소재를 전면에 내걸면서도 그것에 연연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탈모물(?)로서의 이야기를 하다가도, 필요한 경우 첩보물로서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 놓습니다. 이를 통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단순히 소재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를 넘어 각자의 드라마를 가지고 살아숨쉬는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첩보물로 흘러갔던 소설은 이에 안주하지 않고 머지않아 탈모물의 영역으로 귀환합니다. 탈모물에서 첩보물로의 전환을 통해 인물들이 각자의 입체성을 찾아갔다면, 첩보물에서 탈모물로의 전환을 통해 각 인물들의 드라마는 다시 한 줄기의 이야기로 엮여듭니다. 이로써 소설은 그저 병렬된 드라마가 아니라 완결된 이야기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빛나는 녀석들>은 탈모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소재와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를 탈모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취합니다. 이를 통해 인물은 개성적인 드라마를, 소설은 통일된 서사를 얻습니다. 오로지 탈모, 탈모 이야기만 고집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방법이 아닌가요?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가 있었던가요. 이것은 탈모일까요, 소설일까요. 누가 묻는다면, 우리는 이것을 ‘탈모소설’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