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짧고, 빠르고, 굵게
개인적으로 짧은 글을 잘 써내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의 길고 짧음으로 그 우위나 난이도를 따지는 게 어불성설이지만, 제한된 분량 안에 완성된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효과/경험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요. 단편은 가장 필요한 말만을 골라 가장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가 닿아야 하니 버릴 수 있는 문장이 없어야 하지만 너무 여유없고 딱딱한 글이 되어도 곤란하지요. 그런 점에서 이 짤막한 단편이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구성은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짐작하지 못한 영역까지 전개가 훅 뻗어나갈 뿐만 아니라, 그 사이사이에 유쾌한 디테일도 세심하게 들어 있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차분하게 시작한 이야기는 위화감 없이 속도감이 슉슉 올라가다가 고무줄 튕기듯 훅 들어와 작품을 닫는 결말부까지 긴장감의 흐름도 즐거움을 더했습니다. 32매짜리를 읽었다고 생각하기 힘드네요.
스포는 절대 밟지 말고 작품을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2. 지휘관, 선장, 대위, 기사, 교수, 미래인
인류는 기어코 블랙홀만은 정복하지 못했군요. 71억 2천년이 지날 때까지 스팅레이호에 찾아온 사람들은 저만큼 뿐이니까요. 아니면 블랙홀에 들어갔다가 나갈 기술을 장착은 했는데, 저 블랙홀은 유독 바깥세상(?)과 시간차가 커서 미처 나가기 전에 이 지경까지 와 버린 걸까요? 모 영화에서마냥 블랙홀을 통해서 과거에 발을 담그는 건 안 되려나요?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지만 이 작품의 포인트에서는 벗어난 질문들 같습니다.
처음 선장이 지휘관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구도는 블랙홀의 경이, 표류자와 구출자, 200년 후의 미래 – 정도의, 우리에게 익숙한 동시에 앞으로 벌어질 모험을 기대하게 하는 무언가였습니다. 스팅레이호에 도킹하고 조심스레 탑승하는 초반 장면은 고전적인 스페이스 오페라스럽고, 아직은 속도감도 정상이고, 약간의 기대감을 줍니다. 사실 대위가 탑승할 때까지도 그렇지요. 하지만 웬 철갑을 두른 기사가 뛰어들어와 ‘스티크레이’를 찾을 때부터 뭔가 이상합니다. 이 다음부터는 갈수록 가관이고,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러가고, ‘스티그레아로’는 고대의 전설이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주고던지는 대사들을 통해 우주의 역사를 재구성해볼 수는 있겠지만, 갑자기 몇천, 몇만, 몇억년 뒤의 인물들은 만나고 있는 등장인물들에게 그런 정보를 처리할 여력은 없었겠지요. 독자에게도 그 경험을 전해주고 싶은지 글에서는 점차 나래이션이 줄어들고 후반부는 거의 인물들이 서로에게 던지는 (지극히 논리적이지만) 혼란스러운 대사들로 이루어진 형태가 흥미로웠습니다. 짐작하기 어려운 스케일의 이야기가 등장할수록 작품의 속도감은 점차 빨라지고, 느낌표를 연발하며 빠른 호흡으로 함께 달려오다 보니 어느 새 우주의 역사를 전부 봐 버렸습니다. 등장인물들에게는 한 시간도 안 되는, 독자에게는 32매 분량일 뿐인 제한된 시공간 속에서 엄청난 상상력과 즐거움을 던지는 것이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