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적 반응의 필연성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촛불이 다 하기 전에 (작가: rottenlove, 작품정보)
리뷰어: 유이남, 4월 30일, 조회 52

몇 년 전에 ‘학원 가기 싫은 날’이라는 시가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가문비 출판사가 진행한 초등학생 시집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출간된 <솔로 강아지>라는 시집 안에 수록된 작품이었는데, 상당히 잔혹하고 원색적인 표현이 가득한 작품인지라 인터넷 구설수에 휘말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게 무슨 시냐, 이것도 충분히 시다. 그런 식의 공방이 오갔더랬습니다.

<촛불이 다 하기 전에>는 연재식 소설의 형식에 충실한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개별 회차에 따라 산문적인 연작시에 가깝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가까운 시일 내의 작품 중 비슷한 작품을 꼽자면 한강의 <흰>이 있겠군요. <촛불이 다 하기 전에>가 어느 부분에서 소설이고 어느 부분에서 시인지 이야기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으나 그건 더 즐거운 다음을 위해 남겨둡시다.

제가 이 작품을 읽고 ‘학원 가기 싫은 날’을 떠올린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겁니다. 비슷하게 무서운 인상을 주거든요. 다만 ‘학원 가기 싫은 날’이 ‘분노’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능동적 반응을 드러낸다면 <촛불이 다 하기 전에>는 ‘체념’과 ‘우울’에 가까운 수동적 반응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두 작품 속 ‘세계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는 자아의 반응 양상’이 이렇다는 말입니다. 말이 좀 거창한데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누군가/무언가가 나를 못살게 굴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되겠습니다.

공격 받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철저하게 투쟁하는 ‘학원 가기 싫은 날’에 비해 <촛불이 다 하기 전에>의 자아는 언뜻 힘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체념하고, 우울하고, 슬퍼하고, 울죠. 다시 말해 수동적입니다. 수동적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평가처럼 보이기도 하겠으나(우리 사회는 능동성을 미덕으로 칭송하니까요) 저는 그러한 뉘앙스를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촛불이 다 하기 전에>의 자아가 경험하는 위협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쟤는 이러다가 내가 죽어버리면 어쩌려고 저럴까. 내가 죽으면 나를 볼 낯이 있기나 할까. 뒤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버릇은 옛날하고 딱 똑같았다. 이번에도 어색해 하는 것은 내가 될 것같았다.

최악이었다. (“원한을 품어서 귀신이 될 수 있다면 꼭 널 찾아올게”)

너 떠난 날부터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아, 식사하다가도 목이 막히고 자다가도 편치 않아 새우등을 굽히니, 책임지라고 하고 싶어도 그 말을 들을 자가 없구나. 아, 생쥐여, 내가 너없이 어찌 살 수 있으리. (옆집사는 생쥐가 죽었다.)

내가 아직도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는 그 시절이 걸려 있는 중학교를 벗어나지 못한 채 매일 같이 그 길을 지난다. 무언가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어디로도 가지 않은 채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그렇지만 역시 이제 안될 지도 모르겠다. (이번 생은 안될지도 몰라)

세계는 <촛불이 다 하기 전에>의 자아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당한 대상은 서술자의 주변인이고, 서술자는 그러한 죽음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존재, 죽은 존재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기억이라는 것이, 우리가 기억을 다룬 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 애틋하고 풋풋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아주 끔찍합니다. 자아는 아무 이유 없이 타인의 죽음에 시달리기도 하고, 타인이 죽었다는 그 사실에 생을 유지하기 힘들어하기도 하고, 타인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기억한다는 것은 이처럼 치열한 일일 것입니다. 타인의 감정을 자기 식대로 재단하고 판단하여 기억하기 좋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느꼈을 고통과 슬픔과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려고 할 때, 그래서 그 아픔을 내 것처럼 느낄 수 있을 때, 그 치열하고도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야, 누군가의 고통은 아주 조금이나마 기억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작품이 수동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것이 타인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수동적 태도는 이로써 미덕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너무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나요. 타인의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관음과 소비의 대상으로 여겨질 때, <촛불이 다 하기 전에>의 구절들을 들여다 보시는 건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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