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Let Me Be Misunderstood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등라모연 (작가: 노말시티, 작품정보)
리뷰어: 이나경, 19년 4월, 조회 238

여러분은 ‘주례사 비평’이라는 말을 아시는지요? 작가나 작품에 대해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는 비평을 일컫는 표현이라나요. 여담이지만 제가 결혼하던 날에는 주례 선생님께서 저의 성(姓)을 착각하곤 내내 엉뚱하게 부르시는 바람에 앞에서 저는 아주 진땀을 흘렸답니다.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주례사라는 게 썩 듣기 좋지만은 않았네요.

제가 평소 노말시티 작가님을 흠모해왔다는 건 주지의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을 리뷰에까지 끌고 오고 싶지는 않군요. 프로페셔널하게 보이고 싶어서요. 저로서는 힘든 결정이었음을 밝히며… 아무쪼록 주례사 비평이 되지 않도록 수위 조절을 잘 해보겠습니다.

이제부터 쓸 글은 소설의 내용을 단순히 누설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읽는 분들로 하여금 어떤 선입견을 갖게 할 공산이 큽니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리뷰가 그렇겠네요. 아니, 비단 리뷰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앞선 것들은 뒤따르는 것들에 영향을 끼치곤 하죠. 좋든 나쁘든 말이에요. 그러니 주객전도 예방 차원에서라도 부디 소설 본편을 먼저 읽고 오시기 바랍니다.

 

재미있으셨나요? 저도 분발하겠습니다.

 


 

일찍이 저는 ‘도그마 2013 ~ 비타협ㆍ불관용의 맹세’라는 거창한 제목의 문서를 작성한 바 있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2013년에 썼어요.

그 얘기를 하기 전에- 혹시 ‘도그마 ’95’라고 들어보셨는지요? 토마스 빈테르베르, 크리스티안 레브링, 소렌 크라흐 야코브센, 비우호적 인물 등 덴마크 감독 네 명이서 주창한 것으로, ‘순수의 서약’이라고 하는 (말하자면) 열 줄 요약이 꽤 화제가 됐었지요.

그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촬영은 반드시 로케이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 음향효과를 배제한다.
  3. 카메라는 상황과 인물에 맞춰서 촬영해야 하며 정지 상태여서는 안 된다.
  4. 필름은 반드시 컬러여야 한다.
  5. 필름의 인위적인 조작과 필터 사용, 특수조명을 금한다.
  6. 영화 속에서 살인ㆍ폭력 등이나 피상적인 행위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
  7. 영화의 공간과 시점의 자유로운 이동을 금한다.
  8. 장르영화는 허용되지 않는다.
  9. 필름 규격을 아카데미 35mm로 한다.
  10. 크레딧에 감독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

 

대략 2002년 이후로는 누구도-심지어 본인들조차-거론하지 않게 된 도그마지만 저는 달랐습니다. 소싯적에 친구가 어디선가 어설피 듣고 와서 제게 이르기를 “야 있지, 도그마라는 게 있는데 섹스는 되고 살인은 안 된대!”라고 했던 게 너무나 너어무나 강렬하게 뇌리에 박혔던 거예요.

고백하건대 ‘도그마 2013’은 ‘도그마 ’95’로부터 다분히 영향을 받았습니다. 내용보다는 주로 형식 면에서요. 자신만의 십계를 가진다는 발상이 퍽 근사하게 여겨졌거든요. 그렇습니다. 저는 이미 도그마란 곧 십계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것입니다….

따라서 모자라든 넘치든 계율을 열 개로 맞춰야 했어요. 제가 떠올린 걸 헤아려보니 열네댓 개쯤 되더군요. 이후로 석 달 열흘을 고민한 끝에 저는 뭐를 넣고 뭐를 뺄지 가까스로 결정했습니다. 더하기보다 빼기가 어렵더라고요.

이때 탈락시킨 항목 중 하나가 바로 제목에 관한 것이었어요. 그 내용인즉 대강 ‘본문에 쓰지 않은 표현으로 제목을 붙인다.’였을 겁니다.

“이게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라고 하실 분들이 많을 줄로 예상합니다. 무슨 대단한 얘기를 하려는지 기대하셨다가 김이 샌 나머지 아예 ‘도그마 2013’ 자체를 낮잡아 보실 분도 있겠지요. 급기야 저라는 인간에 대해 환멸을 느끼실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속단은 금물입니다. 제가 엄선한 십계는 가히 금과옥조라 할 법한 것들이니까요!

그러니 제발 해명의 기회를 주십시오. 제발.

 


 

제목이란 요컨대 작품의 얼굴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독자는 제목과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될 거예요. 표지라는 쟁쟁한 라이벌도 있겠군요. 우열을 논할 것까진 없고 이 둘을 적당히 호객의 쌍두마차쯤으로 합시다. 막대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얘기입니다. 뭐라고요? 작가가 누구인지부터 확인하신다고요? 하긴 저도 작가 구독을 통해 알림을 받곤 하니 할 말 없네요.

하지만 지금은 해명 시간이므로 제목 얘기에 집중하겠습니다.

한때 저는 제목을 쉽게 생각했습니다. 아주 간편한 방식으로 제목을 지었지요. 그러니까, 2음절의 한자어 중에 골라 쓰는 식으로요. 한국영화에 이런 식의 제목이 많습니다. 요즘은 좀 덜한 것 같지만 2018년에만 해도 공작, 궁합, 독전, 마녀, 명당, 염력, 창궐, 협상 등이 개봉했네요.

이런 제목은 들이는 품에 비해 효과가 좋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탁월하진 않더라도 중간은 가는, 마치 기성품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이런 것들도 슬슬 진력이 나더군요. 보면 볼수록 못생겨 보이더라는 말씀입니다. 격식있게 보이려는 싸구려 술수처럼 여겨졌어요. 제 경우엔 그게 사실이었지만 다른 작가의 작품도 마찬가지로 후려치게 되니 문제겠지요. 위의 영화들만 해도 온갖 계산과 고민 끝에 붙인 제목일 텐데요….

그보다 문제는 높은 확률로 제목과 본문의 사이즈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저런 제목은 너무 많은 것을 포괄해요. 집 주소를 대한민국이라고만 기입하는 것과 같습니다. 틀린 건 아니지만 적확하지도 않지요.

이런 방식은 아무래도 구닥다리 같다, 나태함의 전시에 불과하다, 시급히 청산해야 한다, 라고 나름의 진단을 내린 저는 다른 간편한 방식을 모색했습니다.

그렇게 이른바 ‘아다치 미츠루 식’ 제목 짓기를 도입하게 된 것입니다. 만화가 얘기하는 것 맞습니다. H2나 러프 같은 작품들이 아다치 미츠루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데요, 이 작품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불시의 속옷 노출이요? 아닙니다. (맞긴 하지만…)

바로 각 화의 제목을 그 화에 나온 대사에서 따온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러프 마지막권 마지막화의 제목은 ‘들리나요?’입니다. 작중 인물이 읊는 대사를 그대로 옮겨 쓴 것이지요. 다른 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누군가의 대사예요. 전부?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만 혹시 다른 사례가 있다면 제보 바랍니다.

‘아다치 미츠루 식’ 제목 짓기란 이처럼 본문에 등장하는 구절을 발췌해 제목으로 삼는 방법을 일컫습니다. 참고로 제가 붙인 명칭이므로 아다치 미츠루 님에게 세부사항을 문의해도 소용없다는 점 밝혀둡니다.

솔직히 저는 이 방식이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쓴 ‘극히 드문 개들만이’라는 소설도 이렇게 제목을 붙였어요.

보리는 죽음에 대해 골몰한 나머지 생의 목적을 묻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많은 반려견들이 이 질문을 던지는 데까지는 도달했다. 그러나 극히 드문 수의 개들만이 이에 대한 답을 얻었다.

103매를 저인망식으로 훑어 위의 구절을 골라 다듬은 게 바로 ‘극히 드문 개들만이’라는 제목이에요.

 

아차차! 주객전도 예방 차원에서라도 부디….

 

이 제목 짓기 방식에서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불편을 못 느낍니다만 그래도 굳이 하나 꼽자면 이런 게 있겠네요. 정녕 이리도 적당히 제목을 지어도 되는가 하는, 가히 가책이라 할 만한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는 것이요. 이것을 저는 들이는 품에 비해 효과가 좋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가성비를 따지다가 낭패한 경험이 일종의 PTSD로 작용한달까요. 그걸 어떻게 극복했느냐? 못 했습니다. 그냥 회피했어요. 하다 하다 이제는 간편한 방식을 문제 삼기 시작한 겁니다.

제가 도그마를 작성한 게 바로 이처럼 뒤죽박죽인 시절이었습니다.

‘제목 짓기를 좀 더 치열하게 해볼까?’라는 고민으로 암중모색을 거듭하다가 ‘제목 짓기를 아예 새로운 창작물로 간주하는 건 어떨까?’에 도달해 ‘본문에 쓰지 않은 표현으로 제목을 붙인다.’라는 흉물스러운 항목을 탄생시킨 거예요.

이것은 그러나 들이는 품에 비해 효과가 아주 나빴습니다. 읽어본 사람들이 다들 한 목소리로 제목이 생뚱맞고 따로 논다고 지적하더군요. 실로 최악의 방법이네요. 다른 예를 소개할 것 없이 이번 리뷰의 제목을 이 방식으로 지어보겠습니다. 어떠세요? 여러분도 이 제목이 생뚱맞고 따로 논다고 생각하시나요? 대답하실 필요 없습니다.

결국 제목 관련 항목을 도그마에 무리해서 포함시키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덕분에 금과옥조라 할 법한 것들만 남았으니까요. 흠흠, 해명 끝!

 


 

자! 비로소 ‘등라모연’ 이야기입니다.

이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의 인상은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김새는 고사성어 같은데 이런 고사성어가 있었나? 보통 명사도 아니고. 음, 그럼 아마 고유 명사겠지? ‘피드스루’ 같은.’

이게 전부였습니다.

저는 이처럼 막연한 상태로 소설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뭔지 모르겠던 제목이, 조금만 읽으면 금세 선명해질 줄 알았던 제목이, 글쎄 더더욱 알 수 없게 돼버린 것입니다!

저는 식구들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거실로 나왔습니다. 서늘한 새벽 공기에 머리가 맑아졌지만 혼란함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어요.

여러분도 이미 읽으셨으니 아시겠지요? 아니, 그냥 작품 소개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평생을 함께 하기로 맹세한 등라와 모연. 하지만 운명은 그들의 길을 가르고 심지어 맞부딪히게 한다.’

 

결국 이것은 등라와 모연의 이야기입니다. ‘등라모연’이라는 제목은 이 둘의 이름에서 따온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됩니다.

납득이 된다고요? 그럴 리가요! 때때로 저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이 제목은 말이 안 돼요. 이건 좋은 제목이 아닙니다. 그럼 나쁜 제목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요. 분류하자면 ‘등라모연’은 이상한 제목이었습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뒤 저는 새벽에 홀로 거실 소파에 앉아 청승맞게도 빠삐놈을 흥얼댔던 것입니다….

제목의 불가해함에 갸우뚱하면서도, 경쾌한 멜로디에 들썩거리면서도, 제 눈은 부지런히 이야기를 좇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었습니다. 187매를 읽는 동안 어떻게든 제목(을 비롯한 제반 사정)을 이해하는 도전 말입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앞서 제가 ‘이 제목은 말이 안 된다’고 분개한 것은 실제로 분개한 건 아니고 그저 의식적으로 대립각을 세워 본 것입니다. 어땠나요? 조금쯤 프로페셔널하게 보였을까요? 혹여나 괴팍한 트집쟁이로 보였을까요?

그런데 말이 안 될 것까진 없더라도 사실 이런 제목이 드물긴 합니다. 아까부터 제목을 문제 삼고 있지만, 제가 진짜로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제목 자체가 아니라 제목을 짓는 방식이에요. 즉 ‘등라모연이 뭐지?’가 아니라 ‘어째서 등라모연이지?’라는 거죠. 저는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제목을 붙인 작품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등장인물 이름이 등라와 모연이면 제목을 ‘등라와 모연’이라고 짓는 게 보통이거든요.

참, ‘등라모연’의 방식으로 제목을 붙인 소설이 아주 없진 않군요. ‘안녕하신가영’이라는 소설이 있는데요, 안영하라는 소년과 신가영이라는 소녀가 콤비를 결성해 복작거리는 소동극입니다만 여러분은 들어본 적도 없으실 겁니다. 재작년 말, 제가 한창 동화 쓰기에 골몰하던 때 고려했다가 폐기한 이야기거든요. ‘등라모연’이라는 제목이 유독 제 눈에 밟힌 건 어쩌면 ‘안녕하신가영’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녕하신가영’과 ‘등라모연’은 그러나 결과물은 유사할지언정 엄연히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제목입니다. ‘어째서 안녕하신가영이지?’ 하고 궁금해 하진 않잖아요. ‘신가영안영하’였다면 저와 비슷한 누군가는 또 하릴없이 분개했겠지만요.

정리하자면 ‘등라모연’은 ‘안녕하신가영’처럼 저급한 노림수가 있기보다는 순전히 이름을 부품 삼아 조립했을 뿐인, 따라서 필연적이지는 않은 제목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저는 첫 문단을 읽을 즈음에 이미 대체 가능한, 즉 아마도 노말시티 작가님에 의해 고려됐음 직한 제목들을 여럿 뽑아냈습니다.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등라와 모연

모연과 등라

등라, 모연

모연, 등라

등라+모연

모연+등라

등라×모연

모연×등라

등라 vs. 모연

모연 vs. 등라

등라 모연

모연 등라

 

몇 개 더 쓸 수 있지만 이미 충분하니 자제하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이것들은 명료합니다. 제목만으로도 대강의 힌트를 얻을 수 있어요. 인물 간의 관계 같은 것들 말이에요. 만약 이것들 중에 하나가 제목으로 쓰였더라면 제가 새벽부터 빠삐놈을 읊조리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위의 제목들이 이치에 맞다, 따라서 ‘등라모연’을 대신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닙니다. 단지 이것들을 ‘어째서 등라모연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로 쓰려는 거예요.

일단 제가 각각의 제목에서 받은 인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등라와 모연: 등라와 모연이 공동의 사건을 겪겠군.

등라, 모연: 등라와 모연의 이야기가 각각 진행되다가 뒤에서 합쳐지겠군.

등라+모연: 기질, 성향, 가치관 등이 다른 등라와 모연이 한 가지 목적을 이루고자 힘을 합하겠군.

등라×모연: 등라와 모연이 커플이 되겠군.

등라 vs. 모연: 등라와 모연이 격돌하겠군.

등라 모연: 등라랑 모연이 뭐지?

 

인상이야 개인차가 있겠지요? 저는 저런 식으로 느꼈습니다.

마지막 ‘등라 모연’의 경우는 언뜻 ‘등라모연’과 비슷한 인상을 주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등라 모연’은 본문을 읽으면서 의문이 풀릴 거라는 점이지요. 반면 ‘등라모연’이라는 제목은 등라와 모연이 등장한 뒤에도, 아하 그래서 제목이 ‘등라모연’인가보다, 하고 추측하면서도 뭔지 모를 찜찜함이 남습니다. 두 이름이 마치 한 단어처럼 찰싹 붙어 있으니까요. 등라도 모연도 아닌 ‘등라모연’이라고 하는, 보다 큰 개념이 존재할 것만 같다는 얘기입니다.

한편 등라가 먼저냐 모연이 먼저냐 하는 순서도 중요합니다. 제목만 보고 저는 당연히 등라가 주도하는 이야기가 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나오는 인물은 ‘창히’더군요…. 그야 뭐 그럴 수 있죠. 그런데 뒤이어 등장한 건 뜻밖에도 등라가 아니라 모연이었습니다. 초반의 이야기를 이끄는 건 창히와 모연입니다. 그럼 등라는? 등라가 나오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이건 확실히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찌어찌 ‘등라모연’이라는 제목을 용인한다고 쳐도 작중 비중을 감안하면 ‘모연등라’가 제목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확실히 ‘등라모연’ 쪽이 입에 착 붙긴 하지만, 그렇다면 두 인물의 이름을 바꿔서라도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듯 이해가 안 되는 점들을 늘어놓을수록 묘한 일이 벌어지더군요. 가볍게 지은 제목으로 생각되기는커녕 깊이를 알 수 없는 진의가 따로 있으리라는 심증이 굳어지더라는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즉흥적으로 붙인 제목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정녕 ‘등라와 모연’도 아니고, ‘등라×모연’도 아니고, 하물며 ‘모연등라’마저 아닌, 마땅히 ‘등라모연’을 제목으로 써야 할 당위가 있을까요?

그렇다, 있다, 라는 것이 저의 최종 결론입니다. 별달리 고민하지 않았다면 ‘등라모연’과 같은 제목은 오히려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적당히 ‘등라와 모연’쯤으로 확정됐겠죠. 즉 단순히 이름을 부품 삼아 조립하진 않았을 테요, 심지어 저는 이 짤막한 제목이야말로 치밀하게 계획된 함축의 극치가 아닐까 하고 넘겨짚기에 이른 것입니다.

 


 

어째서 ‘등라모연’이어야 하는가? 이야기가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허무하게도 제가 느낀 혼란함의 대부분은 소설을 끝까지 읽기만 하면 자연히 해소되는 것이었어요.

 

‘평생을 함께 하기로 맹세한 등라와 모연. 하지만 운명은 그들의 길을 가르고 심지어 맞부딪히게 한다.’

 

…라는 작품 소개는 새삼 의미심장합니다.

‘하지만’ 다음에 나오는 얘기가 진짜라고들 하지요? 그 이전에 나온 얘기는 중요하지 않다고도 하고요. 하지만 이 경우엔 정반대였습니다. (하하!) ‘하지만’ 이하의 얘기는 결국 극복되더군요. 그럼 뭐가 진짜냐? 뭐가 진정 중요하단 말이냐?

 

‘평생을 함께 하기로 맹세한 등라와 모연.’

 

일 것입니다.

휴, 이쯤에서 잠시 둘의 관계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얼른 읽고 오세요.

 

 

오래전 모연은 등라를 믿고 따랐습니다. 모연에 대한 등라의 태도가 어땠는지는 불분명하나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 하자고 맹세한 걸 보면 등라도 모연을 아낀 듯합니다.

그러나 운명은 가혹해 둘을 기어코 갈라놓지요. 설상가상으로 등라는 왼팔을 잃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하륜파의 장문인 강외의 계략으로, 실력이 월등한 모연이 등라와의 대결에서 힘을 아낄 것을 간파한 강외가 등라 스스로 떠나게끔 수를 쓴 것입니다. 어떻게든 모연에게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고 할까요, 우격다짐이었다고 할까요. 뭐가 됐든 결과적으로는 자충수였습니다. 등라와 대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연이 자리 물려받기를 거부했으니까요.

어쨌든 등라는 모연을 떠나고, 작품 소개에서 예언된 충돌이 실현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릅니다.

마침내 두 사람이 해후했을 때 모연은 제자를 달고 있고 등라는 웬 기계팔을 달고 있습니다. 서로가 지내온 환경이 달랐던 만큼 둘의 입장도 꽤 상반되지요. 오래 미루었던 대결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여차저차 숨가쁜 전개 끝에 모연은 등라의 기계팔을 부수고 기계는 모연의 왼팔을 부숩니다. 주거니 받거니 한 셈이로군요. 일종의 균형이겠죠.

앗! 그러고 보니 이걸 왜 설명하고 있나요? 다들 읽으셨을 텐데요.

 


 

제가 ‘어째서 등라모연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차린 것은 198매 볼륨의 소설이 끝나기까지 고작 열 문단만을 남겨둔 시점이었습니다.

소동이 진정된 뒤 모연이 앞으로는 세상을 떠돌겠다고 포부를 밝히자 제자 창히가 펄쩍 뛰며 말립니다.

“아니! 어디를 간다고 그러십니까! 팔 하나 밖에 없는 분이 밥이라도 제대로 해 드시겠습니까?”

모연은 이렇게 응수하죠.

“네 앞가림이나 잘 하거라. 그리고. 팔은 하나 더 있다.”

바로 이 대사.

“팔은 하나 더 있다.”

헉, 저는 숨을 삼켰습니다. 갑자기 많은 것들이 정리되더군요.

이것은 기계팔을 가져다 끼우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애초에 팔이 세 개였다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고요. (너무 발칙했죠.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등라와 더불어 살아갈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평생을 함께 하자는 오래전의 맹세를 비로소 지키게 된 거예요.

문득 떠올랐는데, 대학 시절에 저는 동아리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외팔이 노인이 산에 혼자 살고 있다면 구구절절한 사연은 차치하고 나는 그 사람이 손톱을 어떻게 깎는지가 무엇보다 궁금해지는 것이다.”

 

당시(3학년) 저는 일기 쓰러 등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온갖 잡스런 것들을 일기장에 적곤 했습니다. 수업이 없어도 학교에 나가 일기를 썼습니다. 동아리 학우들끼리 공동으로 쓰는 일기장이었지만 반쯤은 제 소유나 마찬가지였죠. 그만큼 일기 지분이 높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글을 왜 썼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제 기억엔 저의 좀스러운 면모를 한탄하는 맥락이었을 거예요.

이 일화를 지금 막 지어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더러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해합니다. 평소 제 행실이 그다지 진실하지 못했거니와 15년 전의 일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것도 수상쩍고 상황 설정 또한 ‘등라모연’과 지나치게 잘 들어맞으니까요. 그러나 믿어주십시오. 허언이 아닙니다. 조금의 거짓도 없이 말하건대 저는 실제로 저런 일기를 썼습니다. 부분 발췌도 아니고 딱 저렇게만 썼어요. 저도 신기합니다. 동아리에 아직 일기장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외팔이는 여러모로 불편합니다. (보세요! 여러분이라면 고작 이런 얘기나 하겠다고 거짓말쟁이로 내몰릴 위험을 감수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외팔이가 둘이라면? 없는 것보단 낫겠지요.

등라와 모연도 마찬가지입니다. 등라와 모연 각각은 손톱 다듬는 일조차 쉽지 않아요. 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돕는다면, 보듬고 의지한다면, 더불어 살아간다면, 다시 말해 하나가 된다면,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겁니다. 즉 ‘등라’와 ‘모연’은 ‘등라모연’으로서 시너지를 발하죠.

결국 ‘등라모연’이란 우여곡절을 겪은 등라와 모연이 지향하는 궁극을 의미하는 제목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상하기는커녕 아주 근사해 보이지 않나요? 같은 논리로 ‘모연등라’도 제목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나 작품의 얼굴로 내세우려면 어감이 좋은 쪽이 바람직하죠. 장유유서라는 말도 있고요.

사실 팔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팔은 상징적인 장치일 뿐 몸이 성하고 성치 않고는 별 문제가 아니에요. 여차하면 기계팔을 달죠 뭐. 무엇보다 팔이 성하던 때에도 둘은 평생을 같이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맞는 상대와 함께한다는 것은 삶의 질 측면에서 무척 이롭습니다. 요컨대 1 더하기 1은 2보다 크다는 거예요.

물론 독립적인 개인들이 살림을 합친다는 게, 시너지를 낸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나름의 각오가 서야 하죠. 더러는 그냥 혼자 사는 게 나은 경우도 있더군요. 하지만 기왕에 누군가와 함께하기로 했다면 이를 위해 명심할 것들을 지금 급하게 인터넷을 검색해 찾아보았습니다.

에-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배려하십시오.

행복한 생활을 이루기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두 사람의 조화입니다. 각기 지내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성격이나 생활습관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둘이 함께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만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동반자가 되십시오.

동반자란 함께 가는 사람입니다. 즉 뜻이 같고 행동이 같으며,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지 마음과 행동이 통하는, 다시 말해 인생의 동반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건강하십시오.

재물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라 했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부귀영화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건강은 물론이요 상대의 건강까지 세심하게 챙기십시오.

넷째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이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거나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동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탐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 모두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됩니다.

 

이렇듯 서로 간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작은 사랑을 하나씩 실천하며 배려하는 마음을 키운다면 등라와 모연은 행복이 충만한 가정을 이룰 것입니다.

 


 

핫 아뿔싸,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기어이 주례사 비평이 돼버렸군요. 이런 낭패가…. 세상에는 그러나 프로페셔널한 주례사 비평이라는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음… 없을까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거기에 기대를 걸기로 하고, 바쁘신 중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신 하객 여러분께 저는 이만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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