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밖에 없습니다…ㅠㅠ
제목을 거창하게 지었습니다만, 다시 읽어보니 아인을 사랑하는 사람 1이네요.
‘무너진 다리’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부터 챙겨 읽었습니다. 만약 무너진 다리가 책이었다면 프롤로그에 가장 먼저 나오는 ‘2083년’은 지워졌을 겁니다. 제가 아주 많이 만졌을 테니까요. 프롤로그에 등장한 캐릭터들이 너무 확실하게 자신을 주장하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살아있는 인물의 영상을 보는 것 같아서요. 왜 갑자기 SF 소설의 연재를 기다리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연이니까 안하던 짓도 하고 그런 거겠죠. 저는 ‘무너진 다리’와 제가 결코 가벼운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부의 마지막 문단까지 핥듯이 읽으면서 더 확신을 가졌습니다. 배경이 가까운 이런 SF를 또 다시 만나는 것은 정말 힘들겠구나, 하고요.
아주 멀지도 않고 아주 가깝지도 않은 시간 배경이 마음을 끌었습니다. 그 덕분에 상상이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생각이 트이지 않고 고인 제게 SF는 타 장르 소설보다 상상하는 어려움이 많은 장르였는데도 불구하고요. 나딤과 베벌리라는 낯선 느낌의 이름을 가진 캐릭터들이 한강에 위치한 아파트를 배정받았다는 것처럼, 이 소설에는 ‘보다 쉽게’ 상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들이 많아서 저 같은 SF장르 초심자에게도 편하게 읽힙니다.
처음엔 아라의 성격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신에 대해 겸손을 떨지 않는 당당함이 제게는 없는 것이라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아, 저는 무너진 다리를 읽으며 캐릭터들과 실제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했습니다. 캐릭터들이 하는 말, 행동 하나가 다 개성을 담고 있어서 정말 좋았거든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들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일까요?
다시 돌아오지 않아야 좋을 집이거늘, 없는 동안 집에 먼지나 빗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창문을 꽉 걸어 잠그는 나딤의 행동을 바라보다 베벌리는 말없이 집을 빠져 나갔다.
저는 이 부분 때문에 나딤과 베벌리를 더 정확히 구분하게 됐고 사랑하게 됐습니다.
개성은 완벽한 정답이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그 언저리에 ‘완벽은 종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도 있었지요. 저는 부근을 읽으며 ‘무너진 다리’의 작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과 자신이 이 글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가치관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하고자 하는 말을 글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은 초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방식이 부드럽고 섬세해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가랑비에 옷 젖는 줄도 모르고 몰입하게 되는 것도요.
아인이 다시 깨어났을 때, 아인은 기억을 제외한 모든 것이 자신이 아니게 됐습니다. 게다가 아인은 더 이상 자신이었던 종족,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이었을 적의 기억을 모조리 가지고 휴론으로의 재탄생. 저는 그때 차라리 그대로 죽는 게 나았을 거라고 쉽게 생각하고 넘겼습니다. 너무 어마무시한 상황이라 감정 등이 제대로 이입이 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단순히 마냥 “불쌍하다.”하고만 읽던 제 생각이 한 순간에 뒤집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티아스가 몸에 대한 설명을 하는 동안 아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말이 끝났을 때 자신의 팔뚝 아래를 가리키며 화상자국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몸에 대한 설명을 듣다니, 웃기기도 하고 딱하기도 합니다. 아인은 그 말을 마치고 웃었지만, 마티아스와 주연은 웃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음 편에서 마티아스는 아인의 화상에 대한 대답을 합니다.
“알지 못했던 건 아니야.”
마티아스의 목소리가 반쯤 줄어들었다.
“팔에 있던.” 마티아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팔뚝 밑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아 화상.’
“없애고 싶어 했잖아.”
“내가 그랬었나?”
“딱 집어 말한 적은 없지만 늘 긴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저는 작가님이 사소한 행동과 대사로 개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너무 좋습니다. 마티아스는 이 한 마디로 자신이 아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마티아스는 어떤 종류의 섬세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저는 마티아스의 이 말 한 마디로 아인을 ‘인간이었는데 어찌어찌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로봇이 된 캐릭터’라고 정리하고 있던 뇌를 뒤집어 갈았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아인을 그저 ‘아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이었고, 인간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몸이 휴론이라는 불행에 갇힌 캐릭터가 아니라 이로 인해 비약적인 변화를 맞이할 캐릭터로요. 그 첫 번째가 화상자국의 유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있던 것이 없어진 것처럼 아인은 없던 것을 있도록 만들겠지요. 정작 아인은 체온을 잃은 것이 비극이라고 생각했지만요.
아인은 잃을 것이 없는 캐릭터입니다. 작중에 나온 것처럼 임무에 실패해서 죽었으니 뒤처리를 하라고 깨우다가 죽어도 상관없는 그런 캐릭터입니다. 그런 주변의 생각 속에서 아인은 다시 깨어났고 펄서의 폭발과 임무가 실패해서 세계가 멸망했고 자신에게 임무가 있다는 말을 쉴 새 없이 듣습니다. 전개가 주는 고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무너진 다리라는 이야기는 숨도 돌리지 못한 아인에게, 또 제게 이번에는 ‘아라’를 들려줍니다. 아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라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리고 아라의 마지막도 알려줍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프롤로그를 다시 읽었습니다. 일등한 게 뭐가 대수냐고 말하던 인간이던 아인. 1부가 끝났을 무렵, 저는 아인의 행동을 중점으로 모든 회차를 다시 읽었습니다. 프롤로그 두 번째 문단의 아인과 이야기의 회차가 거듭할수록 드러나는 아인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좋았습니다. 작가님이 등장인물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섬세하게 다듬었는지, 그리고 그들을 세상에 선보이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엿 볼 수 있었으니까요.
2부에서 아인은 멸망한 미국과 마주합니다. 미국에서 아인은 물에서 내쫓겨 아가미를 잃었다는 아라의 말을 자주 생각합니다. 아인은 아라와는 상관도 없는 곳에서, 몸에 휴론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아라를 온 몸이 휴론이 되어서 자주 떠올립니다.(혹은 꿈을 꿉니다.) 저는 인간의 몸이 아니게 되어서야 아라의 말을 떠올리고 그 아이가 맞았다고 생각하는 아인이 인상 깊었습니다. 아라는 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빠졌으니까요.
카인의 대륙에서 휴론을 마치 새로운 부족처럼 나타낸 부분도 너무 좋습니다. 이 세상이 멸망하기 전의 휴론과 다른 존재 같아서요. 아, 다른 존재가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휴론인 산양이 아라가 했던 말을 똑같이 했을 때랑 푸른 선을 따라 그린 무늬가 핏줄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는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좋아 소름이 돋았습니다. 좋다고 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저도 쓰면서 당황스럽지만, 다 좋습니다. 한 줄, 한 줄 작가님이 신경을 써서 배경을 짜고 그 곳에 사는 캐릭터에 애정을 들인 태가 나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배경은 수잔과 시호가 처음으로 나오는 절이었어요. 스님들의 멋짐은 생각할 때마다 좋습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땐 게임의 트레일러처럼 혼자 맵을 그리며 신나게 상상했었어요.
2부에 들어서는 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더군요. 그만큼 아인이 엮일 캐릭터가 늘었다는 것이겠지요. 아인이 그들과 만나며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할 것들이 기대되어 미치겠습니다.
아인이 휴론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혹은 휴론으로 다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물음을 자주 던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인으로 인해 저도 인간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있게 됐고요. 저는 아인이 좋습니다.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또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시선의 주인공이어서가 아니라 아인이 가진 답답함의 리듬이 좋습니다. 저는 삶을 살 때 마주하는 사람들의 비밀들이나 숨기고 있는 점은 굳이 궁금해 하지 않으면서,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거든요. 어차피 책 속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걸까요? 제가 그들의 비밀을 다 알아도 현실과 달리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인은 아니에요.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자신을 쉽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알았을 때 제가 짊어질 어떤 감정에 대해 걱정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로써 아인이 가지고 있는 답답함이 너무 좋습니다. 아직 숨겨진 아인의 이야기를 빨리 듣고 싶습니다. 다른 친구들도요.
이야기의 흐름이 무섭습니다. 캐릭터들 하나, 하나가 가진 진정성과 살아있는 것 같은 입체감은 무겁게 다가오면서 이야기는 또 약간의 정체구간도 두지 않고 흘러갑니다. 그러면서도 담길 이야기는 제대로 담기고 있어 속도감 있게 읽으면서도 신기합니다. 스쳐가듯이 한 번 언급된 언어에 관련된 이야기도 조만간 나오겠죠. 전개 속도는 정말로 속이 다 시원합니다. 연재 속도도 빠릅니다. 그래서 더 꾸준히 기다리는 맛이 있는 것 같아요. 빠른 세상에 살아 느린 것을 참지 못하는 저로서는 마음이 편하지만 한 편으로는 조금 더 느리게 아인과 아인이 사는 세상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보고 싶습니다. (이야기 전개가 빠르면 완결도 빠르다는 절대의 법칙…)
소설이든지 드라마든지 완결이 난 후 한 번에 몰아보는 사람인지라 프롤로그부터 한 편씩 챙겨본 건 정말 손에 꼽는데, ‘무너진 다리’는 제게 이런 이유로도 특별한 작품입니다. 매일 기대하고 기다리며 읽었습니다. 벌써 3부를 시작했네요. 감격스럽습니다. 말바보여서 캐릭터들과 만나서 행복한 제 마음이 잘 전해졌는지 모르겠네요. 부족한 리뷰를 추천용으로 쓰자면 한 마디로 “무너진 다리는 정말 재밌고 우리 애들이 쩝니다.”입니다.
앞으로도 소중히 만나겠습니다. 건강히 연재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