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휴론에 관한 이야기 공모

대상작품: 무너진 다리 (작가: 천선란, 작품정보)
리뷰어: 유언, 19년 4월, 조회 180

* 줄거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약간 있습니다.

 

SF 포스트 아포칼립스! 프롤로그부터 즐겁게 읽었습니다. 전회차 중 프롤로그가 가장 길더라고요. 다양한 등장인물의 인터뷰가 나와서 처음에는 누가 누군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세계관을 익히는 데엔 좋았습니다. 때로 SF는 새로운 세계관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게 난관이 되죠. 각계 분야의 전문가들의 인터뷰가 등장하는 건 재밌는 방법이었어요. 그들이 서로 알고 있어서 위트 있게 진행되는 것도 재밌었고요. 다양한 국가, 다양한 언어권의 이름, 인간과 휴론(인공지능 안드로이드), 세계 정세.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라와 아인 형제가 있습니다.

아라는 물속으로, 아인은 우주로. 둘 다 파랗고 까만 공간으로 나아가는 이미지가 좋았어요. 1부에서는 아인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아인의 이야기가 나오고요. 2부에서는 아인이 관찰하고 기록하는 입장으로 휴론들의 대륙을 걷습니다. 1부는 ‘아인’, 2부는 ‘카인의 대륙’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요. 1부에서는 인간이었으나 휴론으로 재탄생한 아인을, 2부에서는 휴론이나 자아를 인지하는 카인을 얘기하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이를테면 어두운 숲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과 정체를 아는 것의 차이다. 정체를 알면 마을을 향해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고 소리칠 수 있다. 이름은 개체의 존재를 증명함과 동시에 미지의 세계로부터 끄집어내는 장치였다.

― 아인 (3), 무너진 다리, 천선란

 

휴론에게 이름을 붙인 인간들은 휴론을 덜 두려워하기 위해 이름을 붙였죠. 후반부에는 휴론이 스스로의 이름을 발음하면서 자아를 찾더군요. 인간과 휴론, 인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자꾸 던지는 작품입니다. 성경이나 신화 소재도 자주 차용하셔 재밌었어요. 멸망하는 세계와 인간에 관한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소재죠. 가치관이 짙은 작품이라 그런지 화자의 목소리가 일관적인데요. 일관적인 목소리에 반해 등장인물은 많아서, 상대적으로 인물이 약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아쉬움은 덮어도 좋겠네요. 그 목소리는 이 작품에서 소중하니까요. 세계는 멸망해가고 있고 등장인물들의 상황도 녹록치 않지만, 작품 전반에서 따뜻한 시선이 느껴져요.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SF라서 좋아요. 근미래를 배경으로 삼을 때 특정한 문화권이 대상화되기 쉬운데, 이 소설은 배경 설정에 신경을 기울이시는 태가 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시호와 수잔, 해태, 스님들이 등장하는 사원이에요. 더 보고 싶더라고요. 배경 설정뿐일까요. 앞서서는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했지만, 실은 모든 캐릭터가 입체적이기도 합니다. 모든 배경과 캐릭터가 진중하게 다가와요. 서로 얽혀 있는 캐릭터들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답니다.(그래서 제가 이 캐릭터를 좋아해도 될지, 앞으로도 죽 나올지 조마조마하기도 하지만요.) 설정 고민도 고민이지만, 세계관 속에 그 설정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쓰시는 게 감탄스럽습니다. 세계관이 탄탄해요.

 

아인은 인류의 희망인가 싶다가 버려진 인간인가 싶기도 해요. 그러고 보면 인류(혹은 휴론을 포함한 인류) 전체의 과거와 현재를 닮은 상징적인 인물인 것도 같고요. 카인이 하필 카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에도 이유가 있겠지 생각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네요. 결국 인간(휴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 그런 이야기를 참 좋아하고요.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SF는 섬세한 사람이 써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리고 ‘무너진 다리’는 섬세한 사람이 쓰는 이야기 같아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국내 SF를 찾아서 기쁩니다.

3부의 제목은 ‘접경지’더라고요. 인간과 휴론이 실제로든 개념적으로든 충돌하게 될까요? 기대하고 있어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건강하게 연재하시기를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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