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귀고 싶었던 동성의 후배와 사귀지는 못하고 룸메이트로서 동거 중인 완선은 어느 날 청첩장을 받는다. 학부 시절 수업을 함께 들은 친구의 청첩장이다. 남자가 싫다고 토로하던, 자신은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맹새한 친구. 그러나 웃는 얼굴로 연필을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던 친구. 바로 그 친구 혜수의 결혼식에 완선은 가느냐 마느냐의 양가감정을 안고 참석한다. 그리고 결혼과 친구의 결혼식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며 돌아온다.
‘지극히 평범하고 전형적인 대한민국 남녀 결혼식’이라 부름직한 친구의 결혼식은 자신만의 세계관이 뚜렷한 퀴어인 완선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어쩌면 혜수의 결혼식은 완선에게 두 번째 상실인 동시에 자기다움에 대한 재확인이었을 것이다.
친구의 결혼식이 어째서 상실이며, 그것도 왜 두 번째 상실인가. 첫 번째 상실은 결혼식이 있기 훨씬 전, 혜수가 ‘여자와 키스해 봤는데 아무 느낌도 없었다’는 잊지 못할 말을 완선에게 남겼을 때 발생했다. 그전까지 완선은 혜수에 대해 ‘나처럼 이상한 애’라는 모종의 동질감을 느꼈으나, ‘난 남자들이 싫지만 여자와의 키스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라는 고백은 그 동질감에 맞먹고도 남을 이질감으로 작용한다. 이 발언을 포함해 완선의 단편적인 기억 속 혜수를 종합해 보면, 대학 시절 혜수의 심리는 ‘나는 이성애자 여성으로서 남자와의 사귐을 너무도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사귈 만한 남자가 없음에 깊이 절망하고 있다’로 풀이되지 않겠는가. 섹슈얼리티가 생각보다 훨씬 막대하게 인간의 세계관을 좌우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자신처럼 인생에 어떤 행복도 없을 거라 완선이 믿었던 혜수가 실은 완선이 원한 행복을 이미 누려 보았으며 그것에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이질감은 사소한 수준의 것이 못 된다.
첫 번째 상실이 일방적으로 기대했던 동질감의 상실이라면, 혜수의 결혼식은 혜수와 완선 사이의 이질성을 강화하는 두 번째 상실이다. 누군가를 사귀고 말고와 달리, 결혼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다. 이 전환점을 놓고 결혼의 당사자인 혜수와 결혼하지 않은 하객 완선의 관점이 확연히 갈린다. 혜수는 (필시 내심으로 갈망했을) 남자와의 결혼에 도달해 ‘자신의 결혼에 도취된 사람처럼 흥분’한 모습까지 보이지만, 완선의 눈에 비친 혜수의, 혹은 남녀의 결혼식은 하나부터 열까지 어색하고 공허하고 기만적이며, 너도 나도 사람의 얼굴을 프로필 이미지로 내걸어 사람의 얼굴로 도배된 트위터 타임라인 같은 것으로(완선은 ‘사람이 사람의 얼굴을 보는 행위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따라서 완선은 다시는 친구의 결혼식에 가지 않겠다고, 결혼을 하더라도 남자와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에 이른다.
자기가 잘 아는 친구의 결혼식에 가서 친구는 자신과 너무나 달라 공감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상실감만 거듭 느끼고 온 격으로 보이지만, 이 결혼식에서 완선은 얻은 것도 있다. 퀴어라는 소수성의 사회적 제약 때문에든, 다른 어떤 이유로 인해서든 원하던 형태에 못 미치고 지독한 외로움에 파묻혀 위축되어 있기는 하지만 자신답게 살기를 계속 추구하는 편이 만족스럽다는 확신이다. 그렇기에 ‘꼭 결혼을 해야만 한다면 (법으로 결혼이 허용되지도 않는 동성인) 내 룸메이트와 결혼하고 싶다’라는 생각까지 해 보며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