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작품을 읽다 보면, ‘나도 저런 걸 쓰고 싶다’는 충동이 솟아오를 때가 있습니다. 반면, 어떨 땐 ‘내가 저런 걸 썼어야 했는데’라는 부러움 섞인 탄식이 나오기도 합니다. <스페이스, 맨>은 저에게 그 두 가지 느낌을 복합적으로 선사했습니다. –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이 바로 이런 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이 리뷰는 작품을 어떻게 읽었는지 작가님께 전달하는 피드백이기도 하지만, 제 감상을 다른 독자분들께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글입니다. 작품을 읽고 나서 큰 감명을 받았기에, 각 장의 내용을 요약하고 장단점과 인상 깊었던 부분을 상세하게 짚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계획을 작가님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리뷰에는 결말을 포함한 소설 내용의 상당 부분이 담길 예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요약하더라도 작품 자체를 그대로 담아내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요약을 제대로 해낼 거라는 자신도 없고요. 원작의 감동을 온전히 느끼고 싶으시다면, 작품을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각 장의 내용을 천천히 훑어보겠습니다.
1장
1장은 삼촌에 의해 우주에 관심을 갖게 된 열 살 소년 ‘순식’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출발은 느긋합니다. ‘순식’과 ‘삼촌’, 두 인물과 그들의 관계에 충분히 감정 이입할 시간을 주면서 독자를 점점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1장 마지막에서 순식과 삼촌이 함께 밤하늘 별을 보러 간 다음 날, 학생 운동에 연루된 삼촌이 낯선 남자들에게 끌려갔다가 최후를 맞이했을 때는 울컥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2장
‘순식’의 성장에 맞추어 이야기 속도가 점차 빨라집니다. 순식은 우주를 동경하며 관심을 두었으나, 이과 과목에 소질이 없어 인문계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외곽의 사립대 행정학과로 진학합니다. 삼촌처럼 ‘딴 생각하지 말라’는 어르신의 당부에 따르고, 점점 사회인이 되어가며 꿈과는 멀어집니다.
그러던 어느날 순식은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에서 촛불을 이어받아 누군가에게 건네며, 이내 빛들이 바다를 이루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그 속에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밤하늘의 별, 우주’를 떠올립니다. 운명과도 같은 장면을 마주한 순식은 집에 오던 길에 갈림길에 들어서고, 평소와는 방향이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순식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3장
3장의 이야기는 머나먼 우주 저편, 알파 센타우리의 정보 도시 시타델에서 시작됩니다. 말하자면 공간이 훌쩍 이동하여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죠. 이에 맞춰 분위기와 속도도 급격하게 바뀝니다. 1, 2장이 개인의 서사에 초점을 맞춰 독자의 몰입을 유도했다면, 3장에서는 멸종을 연구하는 학자 ‘로멘’이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그를 거대 서사를 조망하는 렌즈로 활용하며 큰 줄기의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이와 같이 소설에서 기존 이야기를 뚝 끊고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특히 웹 소설에서는) 일종의 모험이기도 합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그동안 몰입했던 대상이 갑자기 사라지고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면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이죠. 자칫하면 흥미를 잃고 이탈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는다면 입체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없겠지요. 그리고 그 시도 덕에, 소설의 배경은 지구에 머무르지 않고 우주까지 확장됩니다.
독자는 이 새로운 이야기가 우리가 알던 앞선 이야기로 어떻게 연결될지 본능적으로 기대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새 이야기의 흐름에는, 우리가 이전에 몰입했던 세계와 다시 만나게 할 임무가 자연스레 부여되는 겁니다. <스페이스, 맨>에서는 이 과제를 매우 인상적인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앞서 말한 멸망학자 로멘은 지구의 위성인 달을 탐사하던 중 인류가 남긴 흔적을 발견합니다. 거기에 흥미를 느낀 로멘은 좌표를 수정해 지구로 향하고, 이어서 지구를 조사하다가 어느 하얀 정사각형 건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집니다. 이 건물은 ‘인류가 2000년 전 멸종하기 직전에 건설한 최후의 방주’라는 것이죠.
여기서 놀라운 건, 이 대목이 독자를 수천 년 후의 아득한 시간 너머로 단숨에 도약시켜버린다는 점입니다. 만약, 사건보다 ‘시간’이 먼저 언급되었다면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흔한 방식으로 ‘2천 년 후, 알파 센타우리의 시타델에서…’ 처럼 시공간적 배경을 먼저 제시하고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 소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대신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공간적 배경’에서 이야기를 전개하여 독자가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사실은 지금 놓인 ‘시간적 배경’이 인류 멸종 2천 년 후의 미래라고 밝히며, 갑자기 독자를 먼 미래에 확 떨구어버립니다. 이 순간 느껴지는 어떤 당혹스러운 문학적 경이감이 있는데요. 그와 동시에 이야기가 본격적인 SF에 돌입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우주를 우(宇:시간)와 주(宙:공간)으로 볼 때, 이 소설은 ‘우주를 제대로 다루겠구나.’라는 기대를 품게 만듭니다. 이러한 ‘시간 점프’가 단순히 일시적 경이감을 노린 것이라면, 그저 얕은 효과에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충격적 서술은 이후에 따라나오는 인류 멸망사의 도입부로서 적절한 맥락을 형성합니다.
이후 거대 서사가 휘몰아칩니다. 인류가 어떻게 하다가 망했는지를 재빠른 속도로 풀어냅니다. 한 문단만에 몇 백년이 훌쩍 흘러버리죠.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럼 순식은?’ 그렇습니다. 1장과 2장에 걸쳐 감정을 이입하게 둔 순식도 거대 서사에 휩쓸려 사라졌다는 거죠.
저는 이 대목에서 대하소설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토지>에서 몇 권이었나,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작중에서 꽤 비중있는 역할로 나오던 어느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로가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채, 나중에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그저 ‘강물에 떠내려가버렸다’는 식으로 서술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는 처음엔 이런 장면이 너무나도 가차없고 냉혹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페이스, 맨>에서 유사한 정서를 일으키는 장면을 보고 나니, 그때 토지의 장면이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에 휩쓸려가버리는 작은 인간의 덧없음을 그려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선 <토지>에서의 상황과는 조금 다릅니다. 순식이 그냥 이대로 사라졌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곧이어 인류의 멸종정보등록 신청을 해둔 로멘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인류 개체 하나가 생존해있다는 거였습니다. 그 순간, 어쩌면 그 인물이 순식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자아내는 동시에, 어떻게 이곳에 그가 남아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며 독자를 다음 장으로 안내합니다.
4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쯤에서 작품의 ‘서술상 특징’과 ‘내용 면에서의 의문점’을 몇 가지 짚어보고 싶습니다.
우선, 서술상의 특징 네 가지입니다.
1. 처음 눈에 띄었던 것은 서술의 속도를 조절하여 다른 질감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1, 2장에서는 느린 속도로 개인의 삶을 세부적으로 묘사하며 등장 인물에 부드럽게 감정이입이 되도록 합니다. 그런데 3장에서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빠르게 서술되고, 이런 속도감은 인류의 문명이 이룩되고 파괴되는 과정이 거칠게 보이도록 합니다.
2. ‘낯설게 하기’로 서술대상의 타자화를 시도한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은 인류를 ‘우리’가 아닌 ‘그들’로 보게 만듭니다.
3. 역사적인 사건을 서술할 때, ‘익명화’의 방식을 취한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1, 2장에선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사건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나오지만, 이를 구체적인 명칭으로 대놓고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얼핏 보면 ‘세월호 참사’라는 사건명 대신 ‘많은 생명이 바다에 가라앉는 배에 갖혔다’고 서술하는 건, 직접적 언급을 회피하는 태도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익명화는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익명화’하는 것은 다르게 보자면, ‘보편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편화는 이러한 참사를 과거에 일어난 단편적인 이벤트에 머무르게 두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 사건으로 확장하는 효과를 일으킵니다. 이 ‘익명화’는 3장 초반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서술할 때도 나타납니다. 호모사피엔스(인류)에게 관심을 가졌던 어느 멸종학자가 임신한 적 없는 처녀를 택하여 아들을 탄생시키고 가르침을 전하며, 고난을 통해 사랑을 설파했다는 점은 구체적인 인명이 나오지 않더라도 예수를 묘사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제 감상을 말씀드리자면, 이 사건을 로멘이 속한 ‘도토스 족의 개입’으로 그려낸 부분은 놀랍긴 했지만, 처음에는 좀 상투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예수가 외계인이라는 가정은 외계문명기원설만큼이나 흔히 거론되는 이야기니까요. 게다가 이 대목은 어떻게 보면 ‘구제불능의 인류를 외계인이 구원한다’는 식으로 비쳐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나중에 등장하는 ‘순식의 활약’을 병치하여 보니, 이 대목이 그저 참신한 설정을 보이기 위해 삽입된 장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후술하겠습니다.
4. 꼭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문단이 길고 밀도가 높다는 점도 특징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웹소설 환경에서는 길게 이어진 문장을 흔히 ‘벽돌’이라고 일컫기도 하죠. 이 작품에서도 많은 문단이 두꺼운데, 게다가 내용이 꽉 차있습니다. 그렇다고 내용을 덜어냈으면 좋겠다는 말은 아니고요. 사실은 설령 개작을 하시더라도 고스란히 빼놓지않고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알차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내용이 나쁘지는 않은데, 문단의 모양새 자체가 일부 독자에게는 압박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풀어서 서술해보는 것도 고려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고 내용 면에서의 의문점 두 가지입니다.
1. 그렇게 큰 결함까지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인류가 멸망한 초기 원인이 국가 간의 갈등이 아닌 시스템의 착오로 설정되었다는 점에선 조금 의아함이 느껴집니다. 물론 서로를 견제하는 미사일이 적국을 향해 있었다는 조건이 있긴 했지만, 어쩐지 인류가 싸워서 멸망했다기보다는 ‘천재지변’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거든요.
2. 인류 멸망 이야기에 나오는 아시아 기지 총책임자 ‘양 웬리’의 이름은 추측하건대 <은하영웅전설>에 나온 인물의 이름을 오마주하여 삽입하신 듯 합니다. 작가님께서 다른 작품에 나오는 인물의 풀네임을 가공 없이 그대로 사용하신 이유가 있으실지 궁금하네요. 제가 볼 땐 이게 저작권 문제 또는 캐릭터에 대한 호오를 떠나, 좀 튀어보이는 감이 있습니다. 한때 유행어 마냥, ‘형이 왜 거기서 나와?’ 같은 느낌이랄까요. 자칫 이런 감상이 독자에게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하진 않을까 우려됩니다. 이름에 약간 변형을 해보시는 건 어떨지 조심스레 제안해봅니다.
4장
이야기는 다시 주인공 ‘순식’으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알던 순식은 이미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에 국한한다면)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인류의 거대사를 훑은 뒤에도 여전히 전개되는 ‘순식’의 이야기는 그가 죽어버린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은 다른 행로를 거쳤을 거라는 암시를 줍니다. ‘오호라. 순식이 살았겠구나. 어떻게 살아서 여기까지 갔을까? 시간 여행?’ 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4장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순식이 꿈인지 뭔지 모를 이상한 체험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죠. 분해된 자신의 몸체가 둥둥 떠다니는 기묘한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계 생명체들이 자신의 신체를 두고 논의를 하던가 싶더니 잠시 후, 시야에 갑자기 나타난 정육면체의 덩어리가 자신의 조각난 몸을 삼키는 걸 보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4장의 내용은 이게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나중에 회수될 떡밥의 단서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저는 4장이 ‘시간적 배경’을 설명하는 측면에서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께서 의도하신 대로라면 각 장의 시간 순의 배치는 이렇게 되겠죠.
2장 → (3장) → 4장
즉, 2장과 4장은 연결되어있고, 그 사이에 괄호를 쳐놓은 3장은 다른 시간대의 이야기가 끼어든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완전히 파악하게 되는 것이지만, 실제 시간의 순서는 이렇습니다.
2장 → 4장 → 3장
즉, 2장(순식이 광장에서 다른 길로 들어선 후,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를 마주하는 장면) 다음에 4장(순식이 토막난 자신의 몸을 보는 사건)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2장 다음에 4장이 전개된다는 사실을 현재 내용만으로는 한번에 파악하기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이렇게 되면, 독자는 자칫 그냥 기술된 순서대로 2장 → 3장 → 4장 이렇게 작성된 순서로 사건이 발생했다고 잘못 받아들일 수도 있겠죠. 아니면 엉뚱하게도 4장은 2장보다 오히려 더 과거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오해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앞서 ‘3장에서 시간의 선형적인 흐름을 한번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장 → 4장으로 이렇게 시간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려주고 싶다면, 더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더욱 뚜렷한 단서를 제시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3장에서 기나긴 시간을 뛰어넘은 거대서사를 다룬 만큼, 두 장의 연결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명확한 시간성을 밝히지 않으려는 것이 작가님이 의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지’를 넘어선 ‘오해’로 작품 이해에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 더 분명하게 알려주는 건 어떨지 고려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5장
5장은 (4장을 건너뛰고) 3장 이후에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로멘은 앞서 3장 마지막에 언급된, 생존해 있는 ‘이안’이라는 이름의 호모 사피엔스를 만납니다. 그리고 이안으로부터 그가 전쟁 중인 안드로메다의 다르칸 출신의 난민으로, 추방되어 이리저리 떠돌다 1000년만에 프록시마 센타우리에 도착했다는 이력을 전해듣죠. 이안의 유전자 감식 결과, 그의 DNA가 21세기에 살았던 ‘허순식’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지구의 역사 데이터로부터 허순식이라는 인물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비핵화 활동가, 평화 활동가, 환경 활동가였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스토리 흐름상, 갑자기 나타난 호모사피엔스가 허순식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거란 짐작은 되었지만, 수천 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허순식과 DNA가 일치하는 인물이 나타났다는 점은 아무리 봐도 이해되지 않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로멘은 깊은 생각에 빠졌고, 곧 가설을 유추해냅니다. 이어서 내용은 6장으로 이어집니다.
6장
6장에서는 허순식과 DNA가 일치하는 인물이 어째서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속사정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읽어본 결과, 그 내용 자체는 너무나도 훌륭하게 잘 짜여있다고 느꼈습니다. 다만 저는 작품을 거듭 읽으면서 내막을 밝히는 타이밍 면에서는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미스터리가 생겨나자마자 너무 빨리 풀려버렸기 때문입니다. 퀴즈를 내고 난 후, 독자가 궁금해 할 시간을 조금 더 줬다면 한층 몰입감 있는 장면이 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해답을 내리기까지의 유예기간이 너무 짧아서 약간 자문자답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순식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순식은 우연히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통상적 서사 관점으로 보자면 순식은 주인공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능동적인 인물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지도 않고, 우연에 의해 목숨을 건집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그냥 ‘운이 좋아서’ 살았다고 하면, 이야기의 깊이가 좀 떨어질 겁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 우연에 촘촘한 맥락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전혀 헐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선, 초기 우주경쟁 시대에 원숭이나 개를 쏘아 올려보내던 인류의 만행이 행성감시단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배경이 먼저 서술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지구를 감시하던 우주선이 사고를 일으키고, 그 사고에서 발생한 절단난 사체(순식)를 가져와버립니다. 이어 행성감시단의 의무관 카론이 그 사체를 ‘침팬지’라고 보고하는 바람에 유로파 기지를 거쳐 시타델로 이동하여 회생할 수 있었다는 내막이 알려집니다.
앞서 3장에서 멸종학자 로멘이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그들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아이러니’라는 단어를 좋아했다는 점이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무자비하게 쏘아올린 실험 동물로 취급한 덕에 살아났다.’는게 진짜 아이러니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 뒷이야기도 앞서 짚어본 바와 같이, 밀도 높게 서술됩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만큼 압축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용 자체는 더없이 훌륭합니다만, 조금 더 풀어서 서술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어서,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된 로멘은 여기서 ‘ 허순식이 어떻게 살아서 지구로 귀환했는지’에 대한 핵심적인 이야기가 빠졌다는 점을 알아챕니다. 그리고 이 부분의 기록을 열람하기 위해, 이안을 지구에 남겨둔 채, 시타델로 향합니다.
7장
소설의 마지막이자, 핵심인 7장입니다. 여기서는 모든 떡밥이 회수됩니다.
행성감시단을 방문한 로멘은 어떻게 허순식이 살아났는지에 대해 알게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순식은 ‘닉스’라는 신비하고 불가해한 물체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닉스는 일생을 금속 재질의 정육면체로 보내다가 특정조건에서 생명체와 결합을 하게 되는 신비한 물체입니다. 행성감시단의 의무관 카론은 유로파에서 발견된 닉스에 대한 연구를 하던 중이었고, 닉스가 그때 맞딱뜨린 생명체가 순식이었습니다. 닉스는 조각난 순식의 몸을 치유했고, 신체가 안정화된 순식은 시타델로 이송된 것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지금껏 이야기를 이끌고 온 주요 동력이었던 ‘순식의 행방’이 마지막 장에 가서야 어떤 신비한 장치에 의해서 되살아난 것으로 밝혀진 것은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구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이상한 장치가 나타난다고 해서 SF의 경계를 넘어선 판타지처럼 보인다는 위화감도 생기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여러 정황적 요소들이 이 장면을 잘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 이유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순식이 어떻게 살아났는가’라는 의문 자체가 이 소설의 핵심이었다면, 마지막 장에서 닉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조금 김이 빠지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핵심은 ‘순식이 어떻게 살아났는가’가 아니라, ‘되살아난 이후에 순식이 무엇을 했으며, 그것이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크게 보자면, 이 소설은 그 자체로 거대한 인트로인 셈입니다.
로멘은 닉스의 연구 과정에서 파생된 공감각 자료 연구를 요청합니다. 공감각 연구는 ‘멸종에 대한 예고’가 단일 개체, 즉 순식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된 것이었습니다. 순식의 기억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 공감각 배경을 만들었고, 이 때의 경험이 데이터로 남았습니다. 로멘은 이 때의 연구결과를 열람하며, 순식이 겪었던 공감각을 그대로 똑같이 겪게 됩니다.
여기서 저는 ‘공감각 열람’이라는 설정이 순식의 경혐을 그대로 체험하여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설정 덕분에 ‘로멘’이 아니라, ‘순식’이 순간 삼촌의 골방에서 되살아났고, 그와 이야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삼촌의 골방에서 시작된 우주는 기나긴 시간과 먼 공간을 돌아 다시 그 오래전의 골방으로 되돌아 옵니다. 이 부분은 소설의 첫 문장을 되짚어보게 만듭니다. ‘공감각 연구 열람 장면’은 제게 먹먹한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이 이후, 허순식은 지구로 무사귀환했으며 닉스는 허순식과 결합 이후, 허순식의 신체를 그대로 복제한 생명체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즉, 이안은 ‘허순식을 복제한 닉스의 후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지구에 남아있던 이안이 보낸 메시지가 로멘에게 도착하는데요. (저는 작가님께서 이안이 보낸 메시지 부분을 텍스트 에디터의 블록 기능을 활용해서 시각적으로 구분이 더 잘 가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메시지의 내용에 따르면, 사실은 이안은 자신이 ‘닉스의 후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안은 로멘에게 자신의 기원이 된 허순식이 지구로 귀환한 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려줍니다. 이안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후 지구에서 비핵 활동가 및 구호 활동가로 활약했습니다. 이러한 순식의 행방은 앞선 3장 인류의 역사에서는 묘사되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부활과 대조하여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와 대조적으로, 순식은 시리아의 폭격현장에서 사흘 만에 건물 잔해에 깔려 사망합니다. 순식이 예수만큼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긴 건 아닙니다. 그는 8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저는 이 움직임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감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신성이 아니라, 누구나 목소리를 내지만 크게 주목하지 않는 메시지에 사실은 인류 구원의 해답이 있다는 사실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안은 오염되어버린 지구가 회복될 1만년이라는 시간을 동면하며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이야기를 다 읽기 전에 이런 식으로 상상했습니다. ‘순식이 시간여행을 통해 먼 미래로 이동하여 지구의 종말을 확인한 후, 다시 새로운 기회가 주어져 현재로 돌아와 사회활동가가 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저라면 분명 이런 식으로 소설을 써버렸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너무 손쉬운 해결입니다. 말하자면 상처를 너무 간단하게 씻어버리기 때문에 감동과 여운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비가역적인, ‘시간’을 건드리지 않은 것은 옳은 선택이라고 보입니다.
1만년이란 시간은 인류 문명이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여 멸종하기까지의 시간과 맞먹습니다. 이를 새로운 기회로 해석한다면, 비유가 좀 그렇긴 합니다만 일종의 ‘자숙 기간’으로 적절하다고 해야할까요. 자신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이안과 로멘의 마지막 결심은, 제가 처음에 반감을 가졌던, ‘외부 세계에게 구원의 손길을 떠맡기는’ 것과는 오히려 반대 지점에 서 있었던 겁니다.
닉스를 통한 DNA의 복제는, 정신의 감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광장의 촛불이 다른 촛불로 이어지고, 별이 되어 우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손에 달려있음을 알리며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총평을 하자면, 이 소설은 경이롭고 감동적이며, 내용이 매우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각 요소들이 굉장히 촘촘하고 유기적으로 잘 쌓여있습니다. 알레고리를 형성하는 방식 또한 탁월합니다.
아쉬움을 굳이 한 가지만 꼽자면, 서술의 밀도가 높고 압축적이라는 겁니다. 이게 조금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겟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쩌면 단순히 제가 따라가기 어려워서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모릅니다. 현재로선 221매라는 분량에 더 이상 축약이 불가능할 정도로 알차고 방대한 이야기가 농축엑기스처럼 담겨있는 느낌인데, 조금 더 풀어낸다면 독자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저로서는 이야기를 이대로 두지 않고 더욱 상세하게 전개하는 편이 과연 좋은 선택일지, 그렇게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할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 이해와 판단의 영역을 넘어선 일처럼 보입니다.
제목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제목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저는 불필요하게 SF 소설 제목을 영어로 짓는 건 선호하지 않지만, 이 작품에선 영어가 제목으로 매우 적절하게 쓰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공백, 우주, 공간’의 개념을 폭넓게 아우르는 ‘스페이스’라는 단어는 이 소설의 정체성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해줍니다.
나름대로 제목에 의미를 더 부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제목의 ‘스페이스’와 ‘맨’ 사이엔 쉼표 뒤에 한 칸의 ‘공백(空白)’이 있습니다. 이 공백 역시, 영어로는 Space(공간, 우주)로 번역할 수 있죠. 풀이하자면 우주와 인간 사이에 공백(우주, 공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작중에 스페이스맨(spaceman, 우주인)이 나오기는 하지만, 제목에 여백을 두어 그 존재 자체보다는 우주와 인간, 그 사이에 더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고 보여집니다.
삼촌은 순식에게 우주를 알려주었고, 순식은 결국 그의 열망대로 Space(우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사람들 사이의 Space로 향합니다. 그 광활한 우주는 먼 곳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었죠.
<스페이스, 맨>은 먼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배경으로 하는 SF지만, 이를 통해 결국 하고 싶은 건 지금 우리 옆에 있는 인간(人間)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