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터넷 세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밈 중, ‘게이 밈’은 가장 널리 쓰이고 긴 생명력을 이어 오고 있는 밈 중 하나입니다. 그 기원을 빌리 헤링턴과 엉덩국 만화로 잡으면 10년도 더 넘게 활발히 쓰이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빌리 헤링턴과 엉덩국이라는 기표 자체는 사장되었지만, 해당 기표들을 통해 약속되었던 기의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게이 밈이 생겨날 즈음 함께 활발히 사용되었던 밈들(비둘기야 먹자 같은거요)이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생명력입니다.
10여 년간 수도 없이 변용되어 왔던 게이 밈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약한 남성성을 가진 이성애자 남성이 강한 남성성을 가진 게이 남성에게 성적으로 굴복당한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게이 밈에서 게이는 우락부락한 몸과 커다란 남근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또한 게이 밈에서 게이는 게이에게 욕정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연약한 이성애자 남성이 강제로 범해지는 것이 게이 밈의 포인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게이 밈은 성소수자의 가시화라기보다 오히려 변형된 남근중심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소설이 차용하고 있는 ‘레즈 밈’도 단순히 생각하면 게이 밈과 비슷해 보입니다. 두 인물이 논의와 토론에서 보여 준 우열(노련은, 물론 제대로 된 논의와 토론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신입의 말을 전부 수용하고 있습니다)은 성적 관계에서의 우열에 의해 침식당합니다. 성적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노련은 신입의 이야기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입을 성적으로 좌지우지합니다. 이는 마치 성별만 반전된 남근중심주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게이 밈과 완전히 동치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게이 밈에서 보여주는 성적 관계는 어디까지나 강제적인 것일 뿐인 데 비해, 노련은 신입에게서 ‘동의’를 이끌어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다시 말해 노련이 보여 주는 성적 접촉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상대방을 강제로 범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 것(더 찐한 접촉?)을 상대로부터 이끌어내기 위한 능글맞은 전략에 가까워 보입니다. 결국, 노련과 신입은 상호 애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게 PC한지, 빻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설왕설래가 오갈 것 같네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서 이만 말을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