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ing. 친박 집회 아저씨와의 눈 싸움, 그 결과는…
광화문 거리에 세월호 사건 희생자들의 빈소가 철거된 지도 어느덧 시간이 흘렀다. 물론, 그 빈소가 광화문에 자리를 잡고 풍찬노숙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에서, 기나긴 시간 동안 인내와 시련을 견뎌온 시간에 비하면, 그리고, 차마 인간으로서 참아주기 어려운 모욕을 견뎌온 시간에 비하면, 매우 짧지만.
16년 겨울과 17년 봄을 기점으로 정권이 바뀐 후에도, 비록 기세는 줄었으되, 빈소 주변에는 모멸의 언사를 뱉으며 내가 말로 설명하는 게 부끄러울 정도인 추태를 보이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은 한결 같이 늙었다. 저 중 한 분이 내일 돌아가셔서 자리를 비워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그러던 어느날, 지하철 안에서 나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조끼 주머니며 가방이며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아저씨 한 분과 눈 싸움이 붙었다. 50대, 많이쳐야 60대 쯤 될 법한 어르신. 대한민국 애국 어쩌고 하는 글귀를 금색 실로 붉은색 캡모자에 박아놓은 자였다.
나와 그는 시청인지 종각인지 쯤에서 1호선에 올랐다. 방금 전까지 저 자는 빈소 주변을 얼쩡거리며 입에 담기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댔으리라. 이리 생각하니,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나도 모르게 반대편에 앉아있는 그를 당장이라도 공격할 듯 노려보았다.
그는 나의 시선을 알아차렸고, 잠시 눈을 힐끔힐끔 피하다가, 정면으로 나를 맞바라보았다. 그렇다, 욕설과 폭행만 없을 뿐, 우리는 적의를 감추지 않고 집요하게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후, 그는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정면을 보려했으나, 그 때마다 내가 한치의 어긋남없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통에, 그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이며 어찌할 줄 몰라했다.
그러다가 우리의 싸움은 2라운드로 넘어갔다. 그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선글라스를 꺼내는게 아닌가. 선글라스로 눈을 무장시킨 그는, 이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팔짱을 끼고 내 쪽으로 당당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내 눈은 노출되는데, 상대의 눈은 읽을 수 없으니, 나로선 불리한 상황. 그럼에도 집요하게 선글라스를 뚫어버릴 기세로 쏘아보던 내 눈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적개심을 품고 있었단 말인가.
그러다가 종로3가 쯤 되었을까,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 한 분이 객실에 나타났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불편한 몸을 구부정한 자세로, 지금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늙은 몸을, 휠체어 하나에 간신히 지탱한 상태로. 할아버지를 발견한 순간, 가슴 속에 묵어있던 무언가가 순식간에 비워지더니, 두 눈을 부릅뜨던 힘이 사라져버렸다.
도저히, 더 이상 눈에 ‘적개심’을 통한 힘을 실을 수 없었다. 그날, 나는 휠체어 할아버지가 등장하자마자, 도망치듯 다른 객실로 자리를 옮기며 방금 전까지 벌였던 ‘사소한 분노’에 허망함을 느꼈다.
당장 쓰러져 숨을 거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휠체어의 어느 노인까지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볼 수 없으므로.
‘이편’과 ‘저편’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저편’인 노인을 상대로 아무렇지 않게 적의를 품어도 될까. 마치 한국전쟁의 어느 한복판, 겁에 질린 피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자본주의 반동분자’인지 ‘공산주의 빨갱이’인지를 따지듯이. 이것, 아니면 저것. 흑, 아니면 백.
고작 알량한 눈 싸움으로 마치 내가 대의명분의 열사인양 굴었던 방금 전의 상황이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1. ‘퀴어’는 조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단어처럼 쓰이는 ‘퀴어(queer)’는, 아실 분은 이미 아시겠지만, 본래 ‘괴상한’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남녀이분법과 이성애 도식에 들어맞지 않는 자들을 ‘괴상한 것들’로 격하하는 표현이었고, 조롱과 멸시의 시선이 다분했다.
퀴어가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단어로 탈바꿈한 것은, 이 역시 아실 분들은 아실 터인데, 성소수자들이 도리어 적극적으로 ‘그래, 너네가 말하는 그 퀴어 맞다! 어쩌라고? 아니, 우리는 그럼 더욱 퀴어하게 해줄게!’라는 태도로 오히려 스스로 적극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부터이다. 퀴어 페스티벌에 ‘흔히 말하는’ 일상적이지 않은 코스튬으로 활보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더욱 더 퀴어해지기 위해서. 그 결과, 멸시의 언어였던 퀴어는 성소수자의 언어로 전유되었다.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의미가 구성되고 변모한다. 사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고, 언어는 그 바뀌는 흐름, 즉 역사와 함께 변모한다. 퀴어라는 단어의 변모는,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언어의 핵심 의미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낸, 성공적인 전유 사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변화는 의식적인 노력보다는 주로 무의식적인 활용을 통해 변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아니, 거의 대다수이다.
모두들 ‘씨발’이 좋은 단어가 아님은 알지만 추임새처럼 달고 다니듯. 그나마 ‘씨발’은 나은 편이다. ‘제기랄’은 욕이라는 인식조차 거의 없어졌다. ‘제기랄’은 ‘니미랄’과 짝을 이루는 단어이며, 각각 ‘제기 씨발’과 ‘니미 씨발’이 축약된 말이다. ‘니미 씨발/니미랄’은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들 하시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제기 씨발/제기랄’의 원래 뜻은… 이쯤되면 눈치채셨으리라 믿겠다. 차마 거론조차 불편하여 따로 설명치 않겠다.
언어는 변한다. 그리고 여기, ‘꽃’이라는 단어가 화두에 올랐다.
2. 언어라는 이름의 빗나간 화살
내가 가끔 써먹는, 내가 지어낸 (딴에는 제법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는) 말이 하나 있다.
“대화의 의미는 대화하는 말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대화 바깥에 있는 것들로 이뤄진다.”
언젠가 별 생각 없이 내뱉었다가 제법 있어보인다 싶어서 두고두고 우려먹는 문구이다. 저작권 나한테 있다.
영화배우 정우성은 예전부터 난민에게 관심이 많았고, 난민 혐오가 수면 위로 올라온 때에도 소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 당시에는 혐오로 말미암은 질타도 많았으나, 오히려 그는 악플 하나 하나를 읽어가며 자신의 자세를 떳떳이 하였고, 더욱 빛나는 인간이 되었다.
그런 정우성도, 물론 재빠른 처신으로 하루이틀만에 정리되긴 했으나, ‘꽃’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가 비판을 받았다. 역시 정우성답게, 그는 앞으로 더욱 생각하겠다는 답변으로 상황을 잘 마무리하였다.
꽃이라는 언어는, 어느새 ‘아름다움의 은유’가 아닌 ‘성 권력의 위계를 대변’하는 언어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 ‘누군가의 윤리 의식을 평가하는 척도’라는 기능까지 확장된 셈이다. 왜? 우리가, 인간이, 세상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흘러가는 변화의 양상으로 말미암아서. 정작 들판에 피어난 꽃 그 자체는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식물로서의 꽃이라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꽃을 두고 벌이는 언쟁은, 꽃에 대한 언쟁이 아니라 사실상 우리들 자신에 대한 논쟁이다.
정우성의 꽃은 그저 아름다움의 은유였고, 불편함을 느낀 이들에게 꽃은 미소지니의 사례였으며, 비판하는 자들에게 꽃이란 윤리의식 평가의 기준이었다. 모두 똑같이 ‘꽃’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들 모두 애초부터 다른 생각으로 꽃이라는 단어를 바라보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서로를 향해 던지는 모든 언어는 사실상 서로 다른 과녁을 바라보고 던지는 것이요, 그런 점에서 모든 언어는 자기만의 과녁을 향한 화살들이라고. 그러므로 타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엉뚱한 과녁에 꽂힌 걸로 보이는, 빗나간 화살들이라고.
3. 관념과 현실의 경계에서
사실 <백합쓰지마세요>는 전개의 양상이나 구조 등의 측면에서 긴 말을 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분량도 많지 않고, 작가의 코멘트에서 확인할 수 있듯 발상의 측면이나 실제로 작성하는 데에 걸린 시간이나, ‘순간적이지만 분명한 장면’으로 그려진 이야기이다. 작중 인물 ‘신입’의 논리를 ‘노련’이 슬쩍 뒤집어내는 것, 이 간단한 핵심 하나가 강력하게 작용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남성적인 권력 양상이나 여성과 여성의 관계 등 성 담론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언어’라는 지점에서 접근한다. ‘신입’의 윤리적 태도는 논리정연하지만, 언어의 중요한 특징 하나로 구성된다. 바로 ‘관념’이라는 점이다. ‘노련’이 ‘신입’의 논리를 뒤집는 것은, 노련이 더 논리적이어서가 아니라, 노련의 태도가 관념에 개의치않고 몸, 감각, 육체라는 ‘현실’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작동한다. 신입의 언어는 옳다. 꽃을 사용하지 말아야 할 논리도 튼튼하다. 그러나, 노련은 논리가 추상적/관념적이라고 말한다. 아니, 행동한다. 말과 논리로 대응하는 신입을 상대로, 노련은 경험과 행동을 끄집어올린다.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우리는 관념 속에 살고 있는가, 현실 속에 살고 있는가? 너는 현실을 보고 있는가, 관념을 보고 있는가? 당신은 현실과 관념을 도식적으로 일치시켜 예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현실과 관념의 틈새를 이유로 모든 언어를 비웃고 있는가? 혹은, 그 두 틈새에서 방황하는 중인가?
개인적으로, <다크나이트>에서 브루스 웨인을 비웃는 조커가 떠올랐다. 질서정연한 룰이 있는 배트맨, 그리고 그 룰과 달리 현실은 카오스라고 낄낄거리는 조커.
언어는 현실의 사물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머릿속의 추상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라는 점에서, 언어 그 자체는 현실과 관념의 경계, 그 어딘가에 서있다. 나는 신입과 노련의 이중주로 구성된 이 작품을,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쓰는 말, 단어, 언어가 필연적으로 봉착하는 ‘관념과 현실의 틈새’를 슬그머니 찌르는 합창곡이라 말하고 싶다.
Closing. ‘PC함과 빻음’, ’20대 XX끼론과 꼰대’, ‘자본주의 반동분자와 공산주의 빨갱이’, 그 모든 ‘흑과 백’
언젠가 후배 몇과 이야기하던 중, 무슨 이유인진 희미하지만, 대강 이런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데올로기/담론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눈 앞의 인간을 놓친다면 공허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이데올로기/담론이 아니라, 지금 살아 숨쉬는 우리 모두로서의 인간이다. 가치관이 관념적으로 머릿속에만 머물 때, 인간을 놓치는 순간, 너는 잔인해 진다. 바로 너의 관념에 어긋난 사람들을 상대로, 잔인해진다. 그러니 담론의 관념성에 빠져 인간을 망각하는 함정에 빠지는 일은, 여기 있는 우리만큼은 그러지 않도록 조심하자.”
수많은 가치관, 윤리론, 이데올로기 중 그 무엇하나 ‘인간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가지지 않은 적은 없다. 그러나 역사는 인간을 위해 탄생한 그 무수한 것들이 인간을 학살하고 유린해온 사례들을 셀 수 없이 보여준다.
누군가는 머뭇거린다. 이 작품이 ‘PC’ 한지 ‘빻은’ 건지 조심스럽다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PC함과 빻음’이라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접근 자체를 경계하겠노라고.
아직도 종종 유효한 ’20대 XX끼론’과 조금이라도 벗어난 이야기가 나오면 ‘꼰대’로 분류하는 이분의 구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라는 명분하에, 발언과 책과 그 모든 것들을 ‘반동분자’인지 ‘빨갱이’인지로 양분하는 이분법.
기실 소수자를 위한 유용한 도구로 작용하는 ‘젠더 담론’조차도, MALE과 FEMALE이라는 이분 구도가 기본 토대임은 부인할 수 없다. ‘트랜스젠더’라는 제3의 표현이 등장함은 젠더 담론이 MALE과 FEMALE의 이분으로만 사람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반증이며, 트랜스젠더가 MTF와 FTM으로 분류됨은 또다시 이분 구도 속에서 이분 구도를 적용하는 반복이다. 섹슈얼리티 소수자 중 바이섹슈얼이 소수자 내부에서조차 암암리에 배제되는 양상이 없지 않음 또한, MALE-GAY와 FEMALE-LESBIAN이라는 이분 구도에 포괄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나누고, 분류하고, 이를 통해 규정하는 방식의 언어 논리가 계속되는 한, 절대로 해방의 유토피아는 없으리라. 이는 파고들면 파고들 수록 나의 정체성을 쪼개고 또 쪼개고 결국 쪼개어 결국에는 저 멀리 어딘가로 베재시키는 무수한 담론들에 환멸을 느낀, 내 개인적 회의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또한, 정의로운 싸움이라도 되는 양 ‘관념화 된 분노’로 눈 싸움을 벌이다가 뒤늦게 쇠약한 어느 노인의 모습을 보고나서 쇠약한 몸이 느끼고 있을 고통을 뒤늦게 떠올리며, 내 분노가 관념의 소산이었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운 반성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인간은 현실을 살지만 또한 언어를 통해 현실과 관념을 소통시킨다. 누군가는 관념에 함몰되고, 누군가는 관념의 공허함을 차갑게 비웃으며 현실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사이, 현실과 관념의 어긋난 틈새 속에 누군가는 고뇌한다. 나는 그 삼자 중 가장 마지막에 해당하리라.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언어의 양상 또한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며, 현실과 관념 사이의 간극으로 말미암은 아슬아슬한 긴장감 또한 우리들의 생활 속에 영원히 도사릴 것이다. <백합쓰지마세요>는,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영원히 우리가 짊어지고 갈, 추상적 관념과 물질적 현실의 긴장, 그것의 한 단면이라 말하고 싶다.
EDIT) 굳이 이 작품을 규정하라면, 나는 ‘재미있다’라고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