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객관적인 리뷰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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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노력만 가상합니다.
좋은 소설입니다. 익숙치 않은 현재형 어미임에도 술술 읽혔고, 복잡할 수 있을 세계관이 잘 전달되었으며, 캐릭터 또한 색이 살아있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거의 흠잡을 곳이 없는 작품이에요. 끝내 단편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만 빼면 말이죠.
세계관
‘경기장의 아이’의 세계관은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배경은 헝거게임인데 내막은 겜판소 같더니 정작 까보면 판타지거든요. 헝거게임과 겜판소는 그렇다 쳐도 저기에 판타지 감성을 다이렉트로 연결한 점은 참신했습니다. 설정덕후라면 눈이 번쩍 뜨일 떡밥과 설정이 여기저기 가득해요.
문제는 저 매력적인 떡밥이 소모품에 그친다는 겁니다. 높으신분들이 경기를 여는 이유, 미르와 미르난데의 정체, 크리스탈, 섀도우가 찾는 것, 마스터의 정체, 분명 게임 AI같은데 진짜 미래를 예언하는 할머니, 세계가 박살난 이유, 본령, 통수왕 흑늑대. 이 모든 게 전개를 위해 도구로 작동할 뿐 세계관에 짜임새를 주지 못해요. 왜? 고작 6화 만에 끝나버렸거든요. 결국 회수된 떡밥은 할머니의 예언뿐인데, 그마저도 다른 더 큰 떡밥을 남겨버렸죠. 좋게 말하면 맥거핀이지만… 글쎄요. 전 맥거핀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건 천재들이나 쓰는 거죠.
결국 이 소설은 저 모든 떡밥을 이어줘야 할 ‘정답’을 주지 않은 채 끝나버렸습니다. 때문에 점점 하나로 완성되던 세계가 결말에서 우르르 흩어져버렸어요. 작중 ‘경기’는 그냥 헝거게임이고 ‘미르난데’는 그냥 겜판소의 게임입니다. 판타지 관련 설정은 용의 몇 마디 말과 함께 허무하게 흩어졌고요. 좋은 세계관이란 각 설정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만들어지는 건데, 그 역할을 해야 할 떡밥이 붕 떠버리니 다른 설정들도 클리셰로 회귀한 거죠.
만약 저 많은 떡밥이 해결된다면 이 작품은 헝거게임, 겜판소, 정통 판타지의 좋은 점만 녹여낸 명작으로 재탄생할 거라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헝거게임, 겜판소, 판타지의 클리셰를 이야기 전개를 위해 빌려 왔을 뿐입니다. 집으로 치면 기둥 세우고 바닥 깔고 지붕도 올렸는데 그 재료들을 이어줄 못질을 안 한 거죠. 멀리서 보면 있어 보이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위태롭습니다.
스토리텔링
좋았습니다. 근간이 오마쥬=클리셰라 안정성이 뛰어난데, 거기에 적절한 떡밥과 반전을 섞으니 수준급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떡밥 문제가 해결된다면 스토리텔링도 탄력 받을 거라 생각해요.
아쉬웠던 점은 호흡입니다. 작품 전체가 현재형 어미로 도배되어 있는데 대사마저 적어 전개가 플롯 수준으로 빠릅니다. 검은성에서 결말까지 1화 컷이더군요. 그래서 흑늑대 씬에서 결말까지 한나의 감정선이 잘 와 닿지 않았어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옆에서 설명해주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캐릭터
스토리텔링과 마찬가지로 각자 개성이 살아있어 좋았습니다. 단점이라면 위에서 언급한 데로 전개가 과하게 빠르고 대사가 적어 감정이입이 힘들다 정도겠네요. 이건 캐릭터보단 스토리텔링 문제니 말을 줄이죠.
못 다한 이야기
1화부터 결말까지 쭉 떠오른 생각은 이게 ‘단편’으로 끝나선 안돼는 작품이라는 겁니다. 단순히 제가 장편을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작중에서 맥거핀에 그쳐버린 떡밥들, 그로 인해 클리셰로 회귀해버린 주요 설정들, 빠른 전개를 위해 압축당한 감정선–캐릭터와 스토리. 모두 ‘단편’이라 희생당한 요소들입니다. 호흡을 더 길게 늘이고, 캐릭터와 세계관를 차근차근 쌓으며 전개할 수 있는 ‘장편’이라면 이 작품도 날개를 달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근데 진짜 뭐가 있는거죠? 저 떡밥들 맥거핀 아니죠!?! 네?! 작가님!!
+제목이 좀 평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이 세계관으로 더 이어가실 생각이 있다면 제목에 더 신경써주시는 편이 어떨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