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라는 매체가 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울림 <태양과 달을 쫓는 소녀> 의뢰(비평)

대상작품: 태양과 달을 쫓는 소녀 (작가: 이엘, 작품정보)
리뷰어: 소나기내린뒤해나, 1일 전, 조회 16

 

 

 

목차

1.너무 거대한 주제들, 그렇기에 의미를 찾는.

2.어쩌면 이 이야기는 아직 걸음마에 서툰 걸지도.

3.이 이야기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도와볼까요?

4.『우리는 왜 소설을 쓸까요?

 

 

<본 리뷰는 “이엘”님으로부터 의뢰를 받아서 작성한 리뷰이며, 현재 완결된 회차를 전부 감상한 뒤에 작성되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1.너무 거대한 주제들, 그렇기에 의미를 찾는.

 

개인적인 고찰로 말문을 열자면, 간혹 여느 창작물들이 좇는 주제들이 너무 거대한 바탕을 헤엄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느끼곤 합니다. 역사, 신화, 사회, 미래 등 그 자체만으로도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를 모래사장처럼 헤집으며 의미를 발굴하는 시도들을 보면, 어쩌면 그 내막에는 깨달음이라는 원석에 눈이 멀어 쉴 새 없이 땅을 파게 되는 인간의 본능이 자리 잡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죠.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읽은 <태양과 달을 쫓는 소녀>는 상당히 의욕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시작했던 작품은 하나의 신화로서 그 결말을 맺고, 2천년 뒤에 그 역사를 물려받은 인류를 조명하며 어떤 ‘깨달음’을 설파하기 위해 그 필력을 뽐내고 있죠. 그 과정에서 가려진 진실을 탐구하려는 인간의 본성이 쉴 새 없이 목소리를 높이고, 광활한 우주 너머까지 통괄하는 인류와 문명사회의 교집합까지 고려한다면, 이 작품은 그 주제와 소재만으로도 두 손에 담기지 않는 거대함을 자랑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작품의 기술적인 문제를 논하기 이전에, 소설이라는 매체로 구현하려고 시도한 형태만으로도 작가님의 노력은 폄하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이 감평문은 작가님께 의뢰를 받고 요청을 받은 이상, 그에 따른 내용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예정입니다. 작가님은 제게 ‘날카로운 비평을 부탁드린다’는 언질과 더불어 ‘장점과 단점을 모두 말해달라’ 부탁하셨고, 저는 이것을 작품의 기술적인 피드백을 바란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감평문에서는 작품 그 자체의 주제와 구조적 분석보다는, 말 그대로 이 소설의 설익은 지점들을 하나하나 짚어볼 예정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글을 오답노트처럼 받아들이시지 않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일개 독자에 불과하고, 이 글 또한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제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지점이 누군가에게는 듣기 좋은 울림이 될 수도 있고, 제가 마음에 들었던 지점이 누군가에게는 귀에 익지 않은 소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은 존재하기 힘듭니다. 저는 그런 흐릿한 경계에서 이 작품을 판단해볼 생각입니다.

 


 

2.어쩌면 이 이야기는 아직 걸음마에 서툰 걸지도.

 

우선 구조적으로 이 작품을 살펴보면, 2천년 뒤의 세월을 건너는 지점을 경계로 삼아 ‘2부작’으로 분류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저는 이 작품을 크게 ‘3부작’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1부 – 멸망을 코앞에 둔 문명이 어린소녀를 제물로 바치려하는 이야기.

2부 – 그로부터 2천년 뒤, 핵전쟁으로 황폐화된 인류문명의 이야기.

3부 – 지하세계에서 탈출한 뒤 새로운 터전을 찾아 우주로 떠나는 이야기.

 

독자에 따라 더 세부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분류해볼까 합니다. 이중 1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창작물에서 거의 등장하지(정확히는 사료 부족으로 등장하기 힘든) ‘고조선’ 시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천나라’라는 가상의 나라가 예언에 따른 멸망을 막기 위해 어린소녀를 요구하는 사건을 과감하게 풀어내는 데에 집중합니다. 다소 신화적인 결말로 1부를 마무리한 뒤에는, 핵전쟁 뒤에 지하세계로 숨은 인류문명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부조리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권력자들의 모순들을 짚기 시작하죠. 말 그대로, 이 작품은 과거와 미래를 전부 아우르고 있는 셈입니다.

 

작품의 가독성이나 재미를 뒤로 하고, 이 시도가 성공적이었느냐고 한다면, 물론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작품 내에서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와 소재들이 이미 하나의 작품으로 정제될 수 있을 만큼 이미지가 큰 것도 물론이거니와, 이 작품 자체가 그런 거대함을 확실하게 정제되었다고 말하자니 다소 표면적인 시도에 그쳤다는 느낌이 크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아쉬움들을 크게 두 가지 키워드로 풀어볼까 합니다.

 


 

첫째는 고증입니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작가님이 먼저 ‘고증에 대해 살펴달라’며 부탁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즉, 작가님 본인 이 작품에서 ‘고증’에 힘을 들였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것이 역사적 고증인지, 사회적 고증인지, 혹은 과학적 고증인지에 대해서는 고려해볼 여지가 있겠으나, 저로서는 이 작품에서 ‘고증’이라는 걸 따져본다는 것 이전에 그 시대에 걸맞는 개연성에 관해서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후술하겠습니다.

 

우선 1부에서 배경으로 제시되는 중화대륙과 고조선을 살펴봅시다. 작중에서는 ‘조선’이라는 명칭으로 나오지만, ‘기자(箕子)’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걸로 봐선 흔히 고조선으로 정의되는 시대의 지역을 배경으로 했다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자(箕子)’가 작중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나라 ‘천나라’의 인물이었다고 언급되는 걸로 볼 때, ‘천나라’는 ‘상(商)’을 모티브로 했다고 추측할 수 있죠. 그렇게 추측하면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아렴풋하게 잡히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왜 ‘천나라’라는 가상의 국가를 설정했냐는 질문에서 비롯됩니다. 애당초 그 국가명칭까지 지적하고 들어가면, 그 시절 중화국가는 ‘하, 상, 주’처럼 단음으로 끝나는 명칭을 사용했지 굳이 ‘나라’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고증을 의식했는지 감이 안 잡히지만(우리가 흔히 ‘청나라’라고 부르는 시대에도 정식 국호는 ‘대청(大淸)’과 같은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초에 ‘천나라’라는 가상의 국가를 설정한 데에서 그 고증조차 무의미해지는 감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창작된 국가임을 시사하는데, 그 시절의 명칭과 규칙을 적용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즉, 이 작품의 역사적 고증은 처음부터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합니다. 물론 작품 내에서는 달력을 비롯한 발전된 문명의 사물들과 각종 관리직의 명칭들이 주석을 달아서 등장합니다. 물론 저는 그것이 해당 시대에 실제로 존재했던 명칭인지 알지 못 합니다. 굳이 알 필요도 없습니다. 혹여 그것이 시대적 고증과 배경적 고증에 어긋나는 무언가일지라도, 애초에 가상의 국가를 등장시키는 시점에서 그 또한 가상의 소품으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고대를 다루는 시간대에 위화감이 드는 장면들을 큰 고민 없이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1부의 중심사건으로 제시되는 ‘어린아이에 대한 공양’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만약 ‘천나라’가 하상주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 맞다면, 주술적인 의미의 인신공양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 시대를 다룬 연구를 살펴보면 인신공양 자체가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그것이 만연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죠. 물론 인신공양 자체야 악습으로 사라져가기 시작했지만, 인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인신공양에 갈등을 겪는 사건 자체가 위화감이 상당한 편입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인신공양 자체가 아닌 ‘어린아이’를 희생시키는 건에 대해서 깊은 갈등을 묘사합니다. 물론 아이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도 큰 죄악으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나, 이 시대는 그런 도덕적인 갈등이 벌어지기에는 너무 과거의 일입니다. 실제로 갑골문에서 발견되는 내용으로 시녀나 소녀를 제물로 바치자는 글귀가 남아 있는가 하면, 다소 그 시대에서 멀어진 한반도의 가야나 신라의 무덤에서 열 살 전후의 소녀가 주술적인 의미로 매장된 것이 밝혀지는 등 그 인권의 감각은 현대와 비교할 때 무척 희미한 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작중에서는 문명의 멸망을 코앞에 두고 있지 않던가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절박한 고대 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지나친 도덕적 결벽이 시대적 배경과 충돌하며 발생하는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정도로 어린아이 희생에 민감한 국가에서, 인접한 다른 국가로 천 명이 넘는 군대와 함께 여자아이를 내놓으라며 들이닥치는 장면 따위는 이미 고증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무리수로 느껴집니다. 작중 배경을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로 치환해서 가정하면, 아무리 상국인 명나라 측이라도 군대와 함께 들이닥쳤다면 그건 곧 전쟁 선포나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그런 군대가 국경을 넘어서 왕을 알현하는 것도 불가능하죠. 그 전개를 살펴보면 조선이 비굴할 정도로 천나라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과거 고조선과 상나라가 마찰과 교류를 반복했던 관계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복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그 시대에 대한 고증을 지키려는 시도보다는, 드라마 따위에서 창작되었던 조선시대의 명나라와 조공관계를 지나치게 과장시켜 적용한 결과라는 것이 타당해보입니다.

 

그렇다면 작중의 ‘조선’이 14세기에 건국된 이씨조선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떨까요? ‘천나라’의 모티브는 ‘명나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가정한다면 언급되는 ‘기자’의 존재 때문에 ‘천나라’는 하상주 시대부터 한 번도 멸망을 겪지 않고 존속되었다는 엉뚱한 결론에 다다릅니다. 작중에서 기자가 대륙에서 건너온 옛 성인이 아니라, 명확히 천나라 출신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죠. 애초에 가상의 나라인데 그 고증이 무슨 의미인가 싶겠지만, 엄연히 역사서에 실존했던 이름을 빌려오고 ‘이건 창작이니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상의 국가라는 편리성에 기댄 변명처럼 느껴질 여지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적 인물을 빌려온 것으로 추측되는 지점을 수도 없이 많습니다. 삼황오제의 인물로서 반쯤 신화적 인물로 해석되는 ‘요 임금’이 조선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든가, 순에게 폐위된 역사(죽서기년 기록)는 어디가고 그의 아들이 하나라를 멸망시킨 ‘걸’로 등장한다든가, 고조선의 인물로 알려져 있는 성기가 천나라 측의 신하로 등장하다든가 등 그저 이름만 따오고 배치된 인물들이 다수 있는 편입니다. 단순히 이름만 따온 것이 아닌 걸이 폭군으로 등장하는 등 그 인물 자체를 따왔다는 인상이 확실하죠. 이것이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독자의 눈에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가 하면 ‘고주몽의 아들 연산군이 복희와 천하를 두고 다퉜다’ 정도의 엉뚱한 패러디나 마찬가지로 느껴집니다. 애초에 가상의 국가인데 뭐가 문제인가? 그렇다면 인물들도 처음부터 가상으로 창작했다면 이런 엉뚱함은 희석될 수 있을 텐데, 굳이 실존인물들을 차용해놓고 이런 괴리감을 주는 이유가 뭘까요?

 

아마 작가님이 말씀하셨던 ‘고증’이란 주석을 달고 인물들의 입을 빌려 설명되는 여느 흔적들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해나래가 천나라로 끌려간 이후 여러 문물들을 접하며 놀라워하는 장면들이 이어지죠. 하지만 그것들이 작중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따지자면, 사전과 같은 정보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해나래가 천나라에 끌려간 이후 도망치기 이전까지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이야기들을 전부 도려내도 전개에 큰 문제가 없습니다.

 

2부~3부로 이어지는 내용 자체도 고증이나 개연성 면에서는 어떤 지적을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이런 방공호라는 이름으로 지하로 숨어든 인류가, 무조건적인 복종만으로 하층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제쳐두더라도, 이런 세상에서 우주선을 만들어서 새로운 문명의 터를 찾아 나선다거나, 전생과 같은 미신적 이야기까지 나오면, 그 현실적인 괴리감을 더 이상 독자가 쫓아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앞선 1부에서 달을 활로 쏘아 떨어뜨린다는 신화적 결말로 매듭을 지어놓은 것까지 고려하면, 이 작품이 판타지인지, 사회비판인지, 우주SF인지, 역사물인지, 신화물인지, 그 컨셉조차 파악하기 어려워집니다. 그것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겠지만, 현재의 형태는 그 이상적인 결과물과도 거리감이 있는 편입니다.

 

요약하자면, 이 1부에서 드러나는 고증이란 가상이라는 이름으로 허락되고 무시되거나, 소설 내에서 역할이 없는 부수적인 정보에 불과한 것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것들조차도 독자들의 눈을 거의 고려하지 않아 자리만 배치되어 위화감을 주고, 때로는 과장된 언행과 묘사로 당혹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역사적 지식에 무지한 독자들에게조차 위화감을 줄 정도라면, 작가님이 상상하는 가상의 배경과 독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 간의 시선 간 거리감이 무척 큰 것이 아닐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둘째는 인물입니다.

 

이 대목은 2부~3부를 주목하고 있지만, 큰 의미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고증 문제와도 교집합을 두고 있습니다.

 

2부에 이르러서는 거의 다른 소설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배경이 크게 바뀌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마지막 결말에 다다르면 그것도 어느 정도 의도가 반영된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며, 류츠신을 비롯한 인물들에서 1부와 연관성을 두고 있는 것도 고려할 만한 부분입니다.

 

고증보다는 개연성이라는 표현으로 정의되는 지적이지만, 이 2천년 뒤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첸’이라는 소년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도덕적’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눈이 있으며, 인간에 대한 정이 많고 사회적 부조리에 분노합니다. 비단 첸 뿐만이 아닙니다. 앞서 1부부터 등장했던 대부분의 인물이 그렇습니다. 작중 인물을 선과 악으로 구분해서 줄을 세울 수 있다면, 선으로 구분된 인물들은 무조건적인 도덕과 정의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부 내내 ‘어떻게 어린아이를 죽이면서까지’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 또한 그런 경향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이 옳다 아니다가 이미 결론이 내려져 있고, 인물들을 그에 대한 고찰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실 이 지점은 ‘인물이 평면적이다’ 라는 식의 관습적인 표현으로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왜 이런 인물들이 주를 이루는가’에 대해서는 한 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인간이 복잡한 생물이라는 말이야 익히 통용되지만, 그 복잡함이 학습의 산물이라는 고찰 또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과 환경 등 한 명의 인간이 오감으로 학습되며 형성되는 것들이 다양성의 요인이라는 뜻입니다. 이 작품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은 그 인간의 학습적 요인입니다. 가령 ‘첸’은 어린소녀를 성적유희로 소비하는 이들을 비도덕하다고 규정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인식이지만, 작중의 배경을 고려할 때 그 도덕성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에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핵전쟁으로 인권이 무너지고 계급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물이, 그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폭력적인 행위들을 비도덕하다고 규정할 수 있는 바탕이 어디 있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무조건적인 복종을 목표로 세뇌당한 채 살아가는 현실을 보면, 이런 방공호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첸이 현대 인권의 보편적 도덕을 추구한다는 것이 개연성 면에서 부족하다고 지적할 여지를 남기는 셈입니다. 당장 ‘하늘’이라는 개념조차 모르는 인물이 밤하늘과 관련된 꿈을 꾸는 것만 봐도 그 바탕은 작중배경과 동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죠,

 

이 질문에 스스로 답을 달자면, 이 작품의 가치관적 사고는 모두 현대(글을 쓰는 작가님 본인)의 기준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자명합니다. 아이를 희생시키는 행위에 대한 반감, 민주사회에 대한 동경, 진실을 추구하려는 본능 등 작중에서 주제로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알고 보면 21세기 인권사회의 가치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죠. 작중에서 등장하는 사회와, 그 사회를 경험하고 있는 인물들 고유의 가치관이 반영되지 않고 마치 입을 맞춘 듯이 같은 생각과 말을 반복하는 것도 또한 이런 이유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즉, 이 작품은 인물들이 개개인의 형태를 구성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작가님이 작중에 그리고 있는 사회와, 작가님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놀랍도록 인물들의 평면성이 납득되는 면이 있죠. 이런 인물들이 탄생하는 배경에는, 인물 개개인보다는 주제와 사회를 대변하려는 태도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거의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인물들이 주제를 대변하는 건 당연한 역할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그 주제를 벗겨냈을 때 어떤 인상이 남는지를 고려해본다면, 한 명의 인간으로 느껴지는 다양성 면에서 상당히 무취한 인상을 풍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작품을 직접 읽고 느낀 저로서는 작중의 인물들의 성격조차 구분하기 힘들었습니다. 오로지 이 인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에만 초점이 가 있었을 뿐이고, 아마 그것이 작가님의 의도라고 여겨집니다.

 


 

일단 이 목차에서는 두 가지 면에서 흠집을 지적했지만, 전체적인 구성 면에서도 엉성함이 적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것들을 함부로 지적하자니 제 마음이 불편할 것 같습니다. 혹시 더 궁금한 지점이 있다면 따로 질문을 남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알고 있는 만큼 의견을 드리겠습니다.

 


 

3.이 이야기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도와볼까요?

 

사실 작품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은 요리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재료를 그릇으로 빼놓는 것만큼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에 따라 발견되는 장점들을 설명하는 것 또한 식빵에서 건포도를 골라먹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죠.

 

이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적인 면에서 많은 아쉬움들이 눈에 밟히면서도, 우직하니 밀어붙이는 주제에 대한 집중력이나 플롯이 명확한 줄거리 면에서는 적지 않은 가산점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대목에서는 이 작품이라는 요리를 한 번 재조립해보는 과정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저 입맛에 거슬린다고 무시하자니 그 노력의 향취가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작가님께서 이 작품을 퇴고하신다면, ‘역사’와 ‘미래’ 중 하나에 집중하는 방향을 제안 드리고 싶습니다.

 

감평문의 도입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현재 이 작품에서 담아내려는 소재들은 그 자체로 무척 거대한 개념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역사, 신화, 미래 사회 등 분명 함의성이 커다란 주제들이지만 그 함의성에만 집중하고 있는 현재의 작품은 그 방향성이 ‘이야기’라는 가치에서 멀어져 있다는 느낌마저 주고 있죠.

 

결국 소설은 이야기입니다.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뜻 이전에 표면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이야기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죠. 하지만 전체적인 줄거리를 따지자니, 1부와 2부의 간격이 무척 거리가 있는 것과 더불어, 그 공백을 거의 설명하지 않는 탓에 마치 연결되지 않는 두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읽은 듯한 느낌마저 주고 있습니다. 물론 결말부에서 그 두 가지 이야기를 관통하는 시도가 엿보이지만, 그 배경에는 신화와 전생 같은 형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소재들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음새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도 한 몫 합니다.

 

그렇다면 1부와 2부, 두 가지 이야기 중에 하나를 거세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역사를 다룬 1부의 내용을 살릴 것을 추천합니다. 그것은 2부 자체의 속성에서 기인합니다. 그 내용은 문명의 멸망을 다룬 여느 작품들에서 볼 법한 이야기를 날 것으로 차용한다는 느낌에 가까우며, 불평등한 인류와 자유의 가치를 모르는 우인과 같은 이야기는 지나치게 사변적인 감각으로 그려집니다. 냉정히 말하면, 2부 자체에서 발견되는 신선함은 부족한 편입니다. 방공호마다 다른 환경과 핵전쟁으로 멸망한 지구 표면의 환경 등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다시피 무시되며, 오로지 민주사회의 가치와 진실에 대한 가치만을 웅변처럼 주장하는 내용만이 선명한 것을 볼 때, 작가님 본인도 이 배경을 구체적으로 잡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때문에 주인공인 첸도 그 자신의 욕구보다는, 작품의 주제에 따른 가치를 쫓거나, 주변 인물과 환경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 이상으로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반면에 1부는 플롯만큼은 명확합니다. 주인공인 ‘해나래’가 등장하고, 인신공양의 제물로 선택되는 갈등도 선명합니다. 생존욕구와 자유추구라는 보편적인 공감대도 충분하며, 그 뒤로 벌어지는 왕실의 폭정과 반란에 관한 이야기도 그 줄거리는 독자로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개연성 측면에서 썩 좋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이상적인 사회와 인간적인 가치만을 대변하려는 2부에 비하면 ‘유아에 대한 비인도적인 희생’이라는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주제만큼은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야기의 반절 가량으로 도려내라고 제안하는 것 자체가, 작가님이 작품에 들인 애정을 무시하는 발언으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작가님의 인간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목소리를 폄하하는 발언으로 느껴질지도 모르죠. 다만 그런 목소리를 독자에게 가장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려한다면, 적어도 이 이야기를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간단할지도 모릅니다. ‘이야기’ 그 자체가 뼈를 보일 수 있도록 다듬는 것이죠. 그것을 이뤄냈을 때 비로소 독자들은 주제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그때가 작가님이 말문을 틀 순간입니다.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지우고 가릴 수 없는 진실의 가치를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죠.

 


 

4.『우리는 왜 소설을 쓸까요?

 

고백하자면, 전 이 작품에서 주장하는 가치들만큼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습니다. 다소 사변적이라고 비판했던 대사들 또한, 천천히 훑어보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여지가 충분한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소설이라는 매체에 걸맞게 이상적으로 표현되었는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적어도 작품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결말까지 한결 같다는 것은 제게 좋은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작품이 반드시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잠시 머릿속에 구겨두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서 상기시켜주는 것 또한, 인간이 손으로 빚는 작품들의 유용한 가치일지도 모르죠.

 

이 <태양과 달을 쫓는 소녀> 또한 그런 가치에 부합하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기술적으로 부족할 수도 있고, 주제 전달 면에서 투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어떤 의도로 쓰였는가를 한 번 상상해본다면, 그 순수하고 도덕적인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작가님이 아직 글을 쓴다는 경험적인 면에서 깊이가 얕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소설을 쓸까요?’라는 질문에 명징한 대답을 건넬 수 있다는 것이 앞으로 글을 쓰고 고치는 나날에 큰 자산이 되리란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이 부족한 감평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인상적인 이야기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집필 활동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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