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하자면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글이다. 천재와 범재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아마데우스’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그냥 사랑 이야기라고 해도 좋으리라.
혹은 여러 사람을 추억하는 이야기. 유지현, 선생님, 서연…
이런 스타일의 글을 좋아한다. ‘오랜 시간 바이올린을 배웠던 서란호는 과거 유지현이라는 한 후배를 만나 겪었던 일들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섬광처럼 빛났던 순간들을 되새기며 떠올리는 사건들은 모두 음악속에 머물러 있다.’ 라는 소개글도 좋았다. ‘아, 이거 재밌어 보인다’라는 느낌을 준다. 예술과, 어린 시절의 관계성과, 그런 것을 아우르는, 화양연화(花樣年華)라 부를 만한 시절에 대한 막연한 동경. 화花, 양樣, 연年, 화華, 꽃 화, 모양 양, 해 연, 다시 꽃 화.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이 말은 분명 청춘(靑春)이란 말과는 느낌이 다르다. 봄(春)은 사계절의 시작이다. 파릇파릇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시기다. 하지만 꽃은 어떤가? 꽃은 끝이다. 피고 나면 진다. 이제 앞길이 창창한 청춘이란 말과는 다르게, 오히려 죽음 바로 직전의 시기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청춘보다 아름답다는 생각도 든다. 一閃이란 제목의 한자도 그렇다. 번뜩일 섬閃은 문 사이로 보인 사람을 뜻한다. 이때 문은 ‘닫히고 있는 중인’ 문이다. 문이 닫히기 전, 돌아본 순간 잠깐동안 문틈으로 보이는 사람의 모습. 그리고 다음 순간 문은 완전히 닫히며 그 사람의 모습을 가려버린다. 단절이다. 헤어짐이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지만 잠깐 보였던 그 모습은 망막에 남아있다. 그래서 번뜩임이다. 찰나지간에 번뜩이는 섬광(이럴테면 벼락 같은 것)도 보고 나면 눈에 한동안 남는다. 눈을 감으면 그 잔상이 더 선명하다. 그것은 분명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동질감이 글을 읽게 만든 원동력이다.
아마 호불호는 많이 갈릴 듯하다. 질색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래저래 스토리가 약한 글이다보니…영 이해할 수 없는 글이란 건 있는 것 같다. 이 글이 중점을 둔 부분은 인물들간의 관계, 그리고 화자의 입장에서 보는 한꺼풀 ‘과거’라는 프레임이 씌어진 풍경. 그런터라 로맨스라고 할 부분도 다른 로맨스 작품들에서 보던 밀당이라던가, 콩닥거림이라던가와는 무관한 태도에서 바라본다. 그런 것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권하기 어렵다(지문 위주의 글이라 진입장벽도 만만치않다. 단점도 있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클래식을 들으면서 이 글을 읽었다. 아닌가? 20세기 초의 음악도 클래식으로 쳐야 하는 건가? 그런 의문은 제쳐두고라도, 사실 바이올린 연주곡이 아니라 피아노 연주곡을 들었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그래서 더 좋았다는 생각도 든다. 바이올린 곡 보다는 그 연주와 함께하는 피아노 반주가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