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려서 손을 잡아 줄게 의뢰 브릿G추천

대상작품: 선향불꽃 (작가: 자우, 작품정보)
리뷰어: 한켠, 19년 3월, 조회 338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처 말하지 못했어. 다만 너를 좋아했어.

어린 날의 꿈처럼 마치 기적처럼.

시간을 달려서 어른이 될 수만 있다면

거친 세상 속에서 손을 잡아 줄게

-‘여자 친구’의 ‘시간을 달려서’ 가사-

 

30대의 유현은 어느 날 갑자기 뺑소니 사고로 죽고, ‘한국인은 삼세번’이라서 그런지 저승사자는 그에게 시간을 돌려서 미련이 남은 사람과 세 번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유현은 고등학생 때로 돌아갑니다. 사랑했던 지민이 죽었던 그 때로. 그리고 유현과 지민은 세 번을 만납니다.

자우 작가님의 작품에는 정조(情操)가 있습니다. 섬세하고 담담하고 잔잔하고 아련한 감정이지요. 평범한 꽃 한 송이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고 잎맥 하나, 꽃가루 하나까지 묘사해 낼 것 같습니다. 그림으로 치자면 세밀화 입니다. 그러나 ‘다르게’ 보냐고 한다면, 글쎄요.

첫사랑은 언제나 애련하지요. 청춘의 죽음은 애틋하고요. 이런 걸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많은 문장이 필요하지 않아요. 작품의 분량은 유현과 지민이 왜 이토록 이렇게까지-저승사자 말마따나-‘예외적으로’ 사랑하는지에 할애되어야겠지요. 그런데,모르겠어요. 유현이 지민이 죽고 나서 다른 사랑을 하지도 못하고 남들이 한창 좋을 때라는 대학생 때도 술 마시고 방황하는데, ‘그렇게까지 사랑했었나…?’ 하고 스크롤바를 다시 위로 올렸습니다. 분명히 ‘풋풋한 첫사랑’의 순간들은 작가님 특유의 솜씨로 사진처럼 빛나는데…스크롤바를 내리면 타임리프가 왔는지 ‘얘네가 언제 뭐하고 사귀었나…?’하고 기억이 안 나는 겁니다. 이들 커플만의 특별한 게 없어서 그렇습니다. 비유하자면, 예쁜 사진이긴 한데 인스타그램에서 많이 본 ‘갬성사진’ 같아요. 반면에 지민이 죽었다는 건 ‘하연 마커 자국’ 이미지가 강렬해서 확실하게 와 닿고요. 지금처럼 소소한 데이트를 자잘하게 보여주기보다는‘외모를 바꿔서 다시 만나도 서로를 알아보는 암호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거나 특별한 한 두 개의 사건이나 이미지를 보여주세요.

특히 지민의 시선, 지민의 감정은 별로 나오지 않다 보니까 지민이 왜 유현을 보려고 죽음의 문턱에서 몇 시간을 버텼는지, 왜 지민도 유현을 만나는 데 세 번의 만남을 썼는지 의아했습니다. 혹시 지민이 유현을 만나러 가던 길에 죽어서 미련이 강하게 남은 걸까요? 그러다 보니 ‘반전’이 애절하게 와 닿기 보다는 뜬금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이거 사실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알고 보니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소심한 짝사랑남 유현의 판타지여서 장르가 판타지인가…?’했어요.

왜 유현과 지민은 고등학생으로 설정된 걸까요? <은교>의 여고생 은교가 도저히 현실의 여고생 같지가 않고 노작가의 ‘환상 속 여고생’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이 작품의 고교생 시절 유현과 지민은 ‘아주 예쁜 정물화’ 같아요. 무해하고 모범적이고 인형 같죠. 얇고 납작하고 10대의 불안과 복잡함은 없어요. 애늙은이 같아요. 실제 고교생이라기 보다는 어른이 꾸며 쓴 고교생 같은 느낌입니다. 작가님이 그 시절의 소품들을 감탄이 나올 정도로 꼼꼼하게 고증해서 독자를 잠시 타임리프시킬 정도인데도요. 30대의 유현이 10대 시절로 타임리프를 했는데 너무 자연스럽죠. 위화감이나 어색함이 전혀 없어요. ’과거의 기억도 있고 미래를 아는 30대의 성숙한 성인’이 ‘그 시절 10대’로 돌아갔을 때의 긴장감이나 ‘충돌’이 있을 법도 한데요. ‘세상사에 찌들어서 욕심 따위 부리지 않고 모든 걸 체념하는 30대의 태도’가 몸에 밴 10대 군요. ‘굴러가는 낙엽을 보면 서로에게 장난을 쳐 댔으며’라니,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깔깔대는 10대’라는 환상 속 인류는 어른들의 머리 속에나 있는 환상 속 동물이지요. 서로의 어깨에 기대는 건 알퐁스 도데의 <별>인가요?

세 번의 기회를 지민과의 소소한 데이트에 ‘몰빵’할 정도로 사랑했다면(부모에게 못다한 효도는 미련이 남지 않고 뭘 제대로 해 보지도 않은 첫사랑은 미련이 남는다니…이래서 자식새끼 키워봤자…)이렇게 끝내서는 안 되겠죠. 저승사자가 수명은 바꿀 수 없다고 했더라도, 꼼수를 쓰든 저승사자한테 뒷돈을 먹이든 염라대왕과 맞다이를 뜨든(?) 어떻게 해서든 방법은 찾아 봤어야죠. 의지의 한국인 아닙니까.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살리겠다고 저승까지 내려가는데…이럴 거면 타임리프를 왜 하는 걸까요.회상만 해도 충분할 것을. ‘과거를 바꿔서 현재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타임리프를 하고-아무리 용을 써도 과거가 바뀌지 않거나 과거가 바뀌어도 현재는 바뀌지 않는다-타임리프를 하면 그 대가를 치른다’가 보통의 타임리프물의 법칙인데요. 과거를 그대로 반복하려면 굳이 타임리프가 필요했을까요?

수명을 바꿀 수 없다면 교통사고 대신 다른 걸로 고통 없이 편히 가게 해 주거나,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죽지도 못하고 기다리게 하지 않도록 미리 병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다거나…뭔가 ‘지민을 위해’ 노력을 해야지요. 사랑했다면서, 지민이 저를 기다리느라 몇 시간씩 버틴 걸 ‘사랑의 증거’로 여기는 걸 보면…’쑥대머리 귀신 얼굴 된 춘향이 보고 이 도령은 잔인스레 웃었다. 저 때문의 정절이 자랑스러워’ 하는 김영랑 시인의 ‘춘향’에 나오는 이몽룡 같아요…(지민도 유현도 교통사고로 죽길래 타임리프와 관계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ㅎㅎ지민을 친 차가 유현을 친 바로 그 차…? 이런 식으로요.)

삼세번의 만남으로 지민과 유현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죽도록 사랑할 만큼 만나진 못하고 헤어졌지만, 죽음에서 잠시 돌아올 정도로 사랑했던 이들은 이제 정말로 죽을 수 있을까요. 저승사자는 왜 이들에게 ‘예외적으로’ 삼세번의 기회를 주었던 걸까요.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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