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공지능이 등장하는 많은 작품에서 ‘그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답다.’라거나, 되려 더 우월하다고 표현되는 일이 잦은 편이다. 왜 그럴까? 인간성에 대한 환기작용을 위해?
이전에는 그런 부분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유가 달라져간다는 생각이 든다. 작금에 나오는 인공지능에 대한 낭만은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피로감’에서 비롯된다 여겨진다. 스필버그 감독의 ‘A.I’가 그러했고 최근 완주를 마친 드라마 ‘웨스트 월드’는 더욱 노골적이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괭이갈매기들이 보인 동족과 어린 개체들에 대한 잔인한 공격성은 무리 간의 밀집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는 해설이 기억에 남는다. 물론 모든 종류의 새가 밀집한다고 이런 공격성을 보이지는 않겠지만 괭이갈매기들 이야기가 너무 익숙하단 점은 사실이었다.
도시화와 범죄율은 상관관계에 있으며 범죄에 대한 프로파일링이 발전하고 그 지식이 일반에 전해지면서 이제 사람들은 역병보다도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를 더 두려워하게 되었다. 더이상 교통사고는 특별한 일이 아니며 층간소음은 더더욱 흔해져 간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성에 대한 낙관론은 깨어져 버렸고 이후 인간 자신에 대한 연구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바닥의 바닥을 갱신해갈 뿐 죽어버린 신과 영혼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과학의 발전이 인권사상 발전에 크게 기여한 동시에 인간성에 대한 신화를 무너뜨렸단 역사는 무척 아이러니하다. 메리 셸리에게서 시작된 피조물에 대한 공포가 피그말리온 신화의 갈라테아에 대한 동경으로 바뀌어간 흐름 역시도 역설적이다. 시대의 흐름은 이제 인간 찬가가 아닌 비관론에 귀를 기울이고 음모론에 불과했던 맬서스 트랩은 다른 방식으로 현실화가 되어가는 실정이다.
인간보다 더 나은 존재들이 인간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스토리가 서스펜스가 아닌 힐링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인간에 대한 피로감이 가져다준 역설의 한 결과일 것이다. 참으로, 인간이 가장 피곤한 시대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