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 모호하고 연관성이 없는 현상이나 자극에서 일정한 패턴을 추출해 연관된 의미를 추출해내려는 심리 현상, 혹은 여기에서 비롯된 인식의 오류를 나타내는 말. 파레이돌리아는 어떤 현상에서 일정한 유형을 찾아 익숙한 의미를 찾아내려는 인간의 욕구가 빚어낸 착각인데, 그 사례를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우주 탐사선이 화성의 사이도니아(Cydonia) 평원을 찍은 사진에서 사람의 얼굴이나 건축물의 형태를 인식하거나, 달 표면을 보고 토끼 모양을 연상하는 것 등이다. 특히, 음악을 거꾸로 들으면서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해석하거나, 얼룩 등에서 종교적 성인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보는 것처럼, 파레이돌리아 현상은 불특정한 대상을 일정하게 형식화하여 스스로 보고 듣고자 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적 착각의 성격을 지닌다.(두산백과)
‘나’는 어느 날 욕실의 틈에서 손가락이 나오는 걸 발견합니다.그것은 ‘나’의 손가락과 닮았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손가락일까요 아니면 ‘파레이돌리아’ 일까요? 이 모든 것은 ‘나’의 환상일까요?
욕실은 가장 내밀하고 본능적인 공간이지요. 배설하고, 벌거벗고 씻는 공간이고, 몸 속과 밖의 더러운 것들을 비우고 닦아내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 손가락에게 뜨거운 물을 뿌려 퇴치 하려 합니다. 그것은 파괴되지 않고 욕실은 희부연 수증기로 가득 차 버립니다. 안개에 싸인 것처럼요. 가려지고 모호해지지요.명확하지 못합니다. 아버지처럼요. 혹은 나타난 손가락만 얼른 치워 버리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게 진짜라는 확인을 받으러 다닐 뿐 벽을 망치로 부숴서라도 실체를 확인하려고 하지는 않는 ‘나’처럼요.
이 집의 가족들은 모두 도망치고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망가지기 시작한 건 아버지의 우유부단함이 원인이 됐다. 명확하지 못한 남자는 당하고 피해를 보게 된다.”고 평합니다. 아버지는 사회에서의 무력함에 맞서지 않고 가정폭력의 가해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을 대신할 다른 남자를 찾아 도망치려 불륜을 저지르고요. ‘나’는 폭력을 방관합니다. ‘우울증 초기’라고 하지만 가면성 우울증에 가까워 보입니다. 자기 감정을 대면하지 않으려는 것 같지요. 감정이 없으면 마음의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으니까요. 동생은 방문을 잠그고 시끄러운 롹음악에 파묻히고 (어머니처럼) 남자들을 만나고 다닙니다. 그나마 식구들 중에 맞서 싸우는 인물은 동생입니다. 아버지를 욕실에 감금하고 ‘나’를 비난하고 감금된 엄마를 구출하려고 하죠. 이런 동생은 심판자, ‘나’의 내면의 초자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선미 입니다. 선미는 나를 계속 걱정해 주고, “나와는 달리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존재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진작에 독립해서 살고 있지요. 무엇인가를 아는 것처럼 다 바뀌어야 한다고 합니다. ‘나’의 애인인 성식을 먼저 좋아하고 있었다고 굳이 고백을 하지요. 아버지의 성폭력을 ‘염려’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 가족이 아닌데도 ‘그것’에게 잡아 먹히게 됩니다.
선미는 ‘나’의 무의식이 아니었을까요? 독립적으로 잘 살고 있는 선미가 ‘뜬금없이’ 더러운 세상이 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좀 이상하지만 선미가 ‘나’의 내면의 말을 대신 해 주는 존재라고 보면 이상하지 않지요. ‘나’도 아마 이런 집구석에서 나가야 한다고는 알고 있었을 겁니다. 우울증에 따른 무기력이 그걸 불가능하게 했겠지만요. 선미가 성식을 먼저 좋아했다고 했던 건 동생이 성식을 ‘빼앗아’ 갔을 때 내가 동생에게 하고 싶었던 말 아니었을까요? ‘나’는 여동생이나 어머니가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니는 걸 비난하는 눈으로 봅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도피수단으로 택한 것인데, 가혹할 정도지요.엄마가 밖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니면 자식 입장에서는 ‘더럽다’ 보다는 ‘엄마가 날 버리고 가출하면 어쩌지’ 하는 공포가 더 클 것 같은데요. 동생이 남자를 마구 만난다면 언니 입장에서는 ‘저러다가 임신이라도 되면 X된다’는 눈으로 주시할 것 같고요. 선미가 아버지의 성폭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해 준 건 악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다 큰 딸들 앞에서 보란 듯이 배설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나’는 폭력만 있고 성폭력은 없었다고 하지만, 정말 없었을까요?
성식은 나, 선미, 동생에게 사랑 받는 ‘마성의 남자’인데요. 성식이 작가님의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멀티맨’ 같은 캐릭터라는 걸 아는 독자들은 ‘성식이가 또?’하고 웃겠지만 다른 독자들은 ‘얘는 갑자기 툭 튀어나온 엑스트라 같은데 대체 무슨 매력이 있어서…?’하고 의아할 겁니다. ‘짐승남’이라고 매력의 비결이 나오기는 하지만요.
어머니의 비밀(불륜)이 아버지에게 발각되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옷장에 가두고, 동생은 아버지를 욕실에 가둡니다. 폐소 공포증 환자가 감금되는 건 엄청나게 두려운 상황일 텐데 동생은 조금 노력해보다가 쿨하게(?) 포기하고 어머니는 잠잠해집니다.아버지도 욕실 안에서 잠들어(?) 버리고요. 어머니가 어쩌다가 폐소 공포증이 걸렸는지는 작품 안에서 명확하게 나오진 않습니다. 집과 아이를 지키기보다는 밖으로 나가 남자를 만나는 어머니를 ‘징벌’하고 싶은 ‘나’의 소망이 어머니의 폐소 공포증을 만들어 낸 걸까요? 이 집 식구들이 서로를 그다지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진 않습니다만, ‘나’는 ‘가족의 탄생’을 아버지에게 급하게 대시한 어머니 탓으로 돌리고, 동생(아버지 입장에서는 딸)과 어머니(아버지 입장에서는 아내)의 ‘성적인 일탈’을 집요하게 비난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폭력의 이유를 대는데,묘하게 아버지를 변호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딸이 아니라 아들 같아요. 내가 그것을 보았던 욕실에 아버지를 가둬 버린 건,나=아버지라서 그랬던 걸까요?
‘정화’된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감정이 없어집니다. 신체 강탈자나 좀비가 떠오르는군요. 감정이 없어진 가족들은 더 이상 두렵거나 증오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선미에게 달려가지만 선미도 그것에 잡아 먹히고 맙니다. 선미가 그렇게 되는 것 까지 봤으면 이제 집에서, 그것에게서 달아나야 할 텐데 ‘나’는 가족들이나 선미처럼 그것에게 먹혀서 ‘정화’됩니다. 자발적이라고도 보입니다. 제가 가끔 농담으로 ‘인간 없이 좀비만 살면 유토피아’라고 하는데요. 인간이 자꾸 좀비를 죽이려고 해서 그렇지 좀비만 있으면 다들 우워어…만 하고 다니니까 천국 아니냐고…정화된 세상은 감정도 공격성도 없는, 우울한 ‘나’와 같은 사람들만이 있는 세상입니다. 여기선 ‘나’에게 방관자, 관찰자라고 공격해 오는 동생 같은 사람이 없겠지요. 우울증 환자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게 힘들 때가 있는데, 그걸 이해 못하는 타인들은 매정하다느니 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후벼 파기도 하지요. 타인에게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선 더더욱 감정을 차단하고 무표정의 가면을 쓰게 되고요. 타인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확신이 없다면 확실하게 상처라도 안 받고 싶은 사람에겐 다같이 감정이 없는 세상이 ‘좀비 유토피아’겠지요.
선미를 제외하면, 이 집 식구 4명 중에 동생을 제외하고 3명이‘정화’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25%(1/4)가 완료 되었다고 하네요. 3/4, 즉 75%가 완료된 것이 아니라요. 그렇다면 사실,완료되었던 건 남은 1/4인 동생이었을까요?(성식이는 제칩시다ㅋ) 결국 ‘내’가 되고 싶었던 건 정말로는 롹음악을 듣고 함부로라도 사람들을 만나고 아버지에게 달려드는, 동생이었던 걸까요? 여전히 가족 안에 머무르는 좁은 ‘나’의 세상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