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을 다룬 콘텐츠는 자칫 식상할 수밖에 없다. 극한의 상황에 닥친 인간은 각자의 본성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그 본성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스토리는 생각보다 한계가 확실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라온 환경, 그리고 그곳에서 발생하는 갈등임에도 왜 우리의 상상력은 비슷할까? 사실,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겪은 일들은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고, 평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잿빛 길을 걷다>의 주인공 설정은 오히려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친구가 없고 ‘두꺼운 벽’ 안에서 살아나가는 주인공. 이런 상황일수록 독자는 주인공에게 몰입하기 쉽다. 독자들도 ‘혼자’의 삶에 은근히 익숙하기 때문이다.
매 화수를 끝내는 문장이 다음 화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점이 인상적이다. 다양한 장편 연재를 접했지만, 첫 장편 연재를 시작하는 작가의 글을 풀어내는 솜씨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글 사이 호흡도 굉장히 빠르다.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 적합하게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은 다시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호흡을 빠르게 끌어 올린다. 이와 동시에 단락을 활용한 호흡 조절이 능숙하다. 이 작가처럼 호흡을 능숙하게 조절하다 보면 글을 읽는 독자는 글자의 홍수 속에서 이미지 떠올리기가 쉽다. ㅡ물론 이 끔찍한 상상이 절로 드는 건 은근히 고역이다ㅡ
많은 소설을 접하다 보니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작가의 방식이 다른 것을 느낀다. <잿빛 길을 걷다>의 작가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시각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빛이나 불을 시작으로 색깔의 이름을 수많은 단어에 빗대며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람이 가득한 기숙사가 사람이라곤 전혀 없는 공간으로 변하는 장면을 ‘잿빛’으로 빗대고, ‘회색 하늘’이라는 문구를 통해 끔찍한 상황을 살려주고 있다.
작가의 이야기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작가는 시각적인 표현에만 힘을 쏟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 표현을 하나하나, 그리고 세밀하게 표현하려고 애쓴다. 마냥 어릴 것만 같은 학생들에게 느끼기 힘든 진지한 모습을 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풀어나간다. 앞서 말한 작품의 전개 속도에서 드러난 글의 호흡이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드러내는 데 적절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진 잿빛 세상을 살리는 작가의 풍부한 호흡과 표현력. 이 작품의 다음 이야기와 끝이 기대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는 어떤 색을 지닐지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