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종교인을 위한 리뷰-종교얘기를 걷어내도 선명한 소설 공모(감상)

대상작품: 가짜 예수를 믿었던 악마 (작가: 박부용 v2,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2시간 전, 조회 11

대학원으로 돌아가신대서 리뷰를 두개나 써 드리는 건 아니고… (아 물론 군대 가시는 분 계시면 3개도 써드림)
뭐… 아마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것으로… 연재물… 피곤하다… 심지어 종교얘기…

소설의 소재와 내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종교와 비종교로 나눴을 뿐이다(…)

(근데 종교인을 위한 리뷰에 너무 공을 들였더니… 힘이 빠져서…)


 

제목에 예수가 있고, 첫 페이지에 성경 구절이 있으며, 주인공은 교회를 지키는 악마다. 근데 또 이름은 솔로몬(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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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뒤로가기를 누를 이유가 없다. 이 소설에서 종교는 그냥 배경이다. 중세 유럽 얘기 하면서 종교얘기를 뺄 수 있는가? 이건 그런 거다. 진짜 내용은 전쟁이 끝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타인이 붙인 낙인을 평생 안고 사는 자의 이야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방식으로 누군가를 지키다 사라지는 자의 이야기이다.

 

‘지옥’은 그냥 우리가 사는 곳이다

이 소설의 지옥에는 유황불도(유황연기가 많이 나서 위험한 곳은 있는데 위험해서 악마들도 안간다), 고문도, 영원한 형벌도 없다. 대신에 끝날 기미가 없는 전쟁, 그 전쟁 때문에 집을 잃은 사람들, 배를 곯는 아이들, 아픈 어머니를 돌볼 약이 없는 현실, 그 전쟁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는 평범하고 힘없는 존재들이 있다. 눈이 내리고, 시장이 있고, 염소를 팔고, 경계병들이 기웃거린다.

바알군과 벨리알군은 왜 싸우는가에 대해 소설은 살짝 언급만 하고 지나간다(“이런 자가 벨리알의 반역에 찬동한 놈들입니다. 그 때문에 온 지옥이 절단이 났단 말입니다.”). 실상 그냥 싸운다. 오래전부터 싸워왔고,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정작 싸움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는 것은 이름 없는 자들이다. 천사들도 다르지 않다. 천국에서도 교리 해석 때문에 내전이 벌어지고, 명분을 앞세운 폭력이 작동한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천사나 악마나 다 똑같은 놈들이다.

 

솔로몬-물려받은 삶을 진짜로 만드는 자

솔로몬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어머니가 세운 교회, 어머니가 만든 신앙, 어머니가 남긴 이름… 그녀는 그냥 물려받았을 뿐이다. 게다가 그 기반이 거짓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어머니의 신앙은 생존을 위한 연출이었다. 솔로몬의 신앙은 아름답지 않다. 성경의 말씀을 실천할 때도 그것이 자연스럽거나 숭고하지 않다. 분노하고, 흔들리고, 망설이고, 거절하기도 한다. 지극히 평범하고 흔한 일반적인 ‘신자’일 뿐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거짓 위에서 진짜를 만들어간다. 그녀가 특별히 강인하거나 숭고해서가 아니다. 그녀도 화를 내고, 지치고, 미워하고, 한계에 부딪힌다. 무례하고 예민하고 모순적인 짐덩어리 벤엘에게 진심으로 분노하고, 자신의 신념에 배신감을 느끼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에 멈춰 선다. 그러면서도 다음 날 아침 다시 문을 열고, 기도회를 열고, 다른 악마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

물려받은 것들, 선택하지 않은 조건들, 그 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버릴 것인가, 지킬 것인가. 이것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질문이다.

 

벤엘-자기가 경멸하던 것을 위해 죽은 자

벤엘은 이 소설에서 가장 불편하고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며 진짜 주인공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냉소적이고, 무례하고, 자기파괴적이다. 도움을 받으면서 도움을 준 사람을 공격하고, 믿음을 비웃으면서 그 믿음에 기댄다. 타인이 붙인 낙인을 스스로 자기 이름으로 삼는다. 반달, 가짜 선지자.

그는 자신이 평생 쓸모없다고, 가짜라고, 아무것도 못 한다고 믿었고, 그런 말들을 들었다. 그러나 죽으면서 약초 도감을 남겼다. 지식에 몰두한다고 비웃음 받던 자가, 그 지식을 타인을 위해 썼다. 자신이 경멸하던 교회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벤엘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죽었는지 소설은 말하지 않는다.

주변에 가끔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하기 싫다, 그런거 다 쓸데없다고 말하면서, 정작 안 보는 사이 가장 믿음직하게 행동하는 사람. 자기를 가장 혹독하게 평가하면서, 타인에게는 조용히 뭔가를 남기는 사람. 벤엘은 그런 사람이다.

그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죽으면서 교회를 살렸고, 자신이 평생 해주지 못한 일을 글로 남겼다. 그것이 희생인지 이기심인지, 아가페인지 속죄인지, 소설은 규정하지 않는다. 다만 솔로몬은 그 안에서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

 

탄자-용서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할 것을 아는 아이

탄자는 독자가 가장 쉽게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옳고 그름이 분명하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나쁜 자다. 상처를 준 자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탓할 대상이 필요하다.

이 논리 or 도덕적 잣대들은 틀리지 않다. 소설도 그것을 맞다 틀리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솔로몬이 조용히 탄자에게 벤엘의 약초 도감을 건네는 마지막 장면에서, 용서는 결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탄자는 그 책을 받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솔로몬을 위해서’ 결국 가지고 간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펼쳐볼 것이다.

 

이 소설이 진짜 하는 이야기

종교적인 표면을 걷어내면 이 소설은 세 가지를 묻는다.

첫째는 타인이 붙인 정의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어떻게 좌우하는가.
벤엘은 천국에서 쓸모없는 자, 가짜 선지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 말을 반박하지 못했고, 도망쳤고, 그럼에도 그것을 스스로 끌고 다니다 죽었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그 말들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두번째는 의미 없는 싸움이 만들어낸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벨리알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언급이 나오지만, 그건 바알 쪽의 이야기 뿐이니까. 이유가 어떻든 나머지 존재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중한 가족들과 자식들이 죽어나가는 전쟁이다. 그 싸움의 잔해 위에서 솔로몬의 교회가 존재한다. 거창한 명분 없이, 그냥 찾아오는 자들을 받아주는 것.

마지막으로 물려받은 삶과 선택한 삶의 경계는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솔로몬은 물려받은 삶을 살지만, 그것을 결국 자기 삶으로 만든다. 벤엘은 자신의 삶을 선택하려 했지만, 결국 타인을 위한 삶을 선택하고 끝난다. 내가 선택했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내가 살아가며 걸어온 것 사이의 간격은 이만큼이나 크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솔로몬은 교회로 돌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평생 동안 가난한 자들을 돌보면서 살았다.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러나 배드엔딩도 아니다. 그냥, 계속 살아간다. 그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어차피 삶은 고통이니까.

화려한 구원도 없고, 깔끔한 결말도 없으며, 누구 하나 완전히 좋은 사람이 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상하게 오래 남을 것이라 자신한다. 벤엘이 무슨 생각으로 죽었는지, 탄자가 그 책을 언제 펼쳐볼지, 솔로몬이 교회 뒷마당의 묘지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 소설은 종교 소설이 아니다. 선악에 대한 소설도 아니다. 표면에는 기독교와 천사와 악마가 있지만, 핵심은 단 하나다. 의미 없는 싸움이 세계를 파괴하고, 그 잔해 위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정해진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무너진 잔해 위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예기치 못한 위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틀거리면서도 걸어가는 이야기다. 벤엘처럼 내내 냉소하면서도 결국 남을 위한 일에 마지막을 쏟은 적 있는 사람, 솔로몬처럼 믿음이 흔들리는데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 탄자처럼 용서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하게 될 것임을 본인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 힘들었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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