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을 위한 리뷰- 부정신학과 긍정신학의 충돌 공모(감상)

대상작품: 가짜 예수를 믿었던 악마 (작가: 박부용 v2,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13시간 전, 조회 13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여,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마태복음 21장 28–31절>

 

 

누가 자꾸 이교도 마녀에게 기독교 성경을 들이미는가아아아아아 저번엔 요한계시록이더니만

(그렇다고 기독교에 반감이 있는 건 아닙니다. 기독교를 잘못이해한 이상한 기독교인들에게 반감이 있는거지.)

 

 

[부제: 대충 교회 안나가는 신자들(일명 가나안)을 위한 리뷰]

뭐, 비종교인이 읽어도 상관없고…

 

 

기독교 신학에는 두 개의 오래된 길이 있다. 긍정신학via positiva은 신을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신은 선하다, 신은 사랑이다, 신은 전능하다. 기타등등. 반대로 부정신학via negativa은 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신은 선하다고 할 수 없고, 사랑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어떤 언어도 신의 본질을 담을 수 없다. 신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신은 오직 ‘아닌 것’을 지워가는 방식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

소설은 이 두 신학의 충돌을 배경으로 삼는다. 그런데 작가는 이 충돌을 신학적 논쟁으로 다루지 않는다. 사실은 기독교 자체를 다루지도 않는다. 작가님은 비종교인이라고 하셔따. 대신 두 입장을 각각 살아내는 인물들을 만들고, 그들이 서로 부딪히고 무너지고 뒤바뀌는 과정을 통해, 신앙의 언어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동시에 얼마나 필사적인 것인지를 보여준다.

 

솔로몬-긍정신학의 실천자

솔로몬은 긍정신학을 상징하는 캐릭터이다. 그녀는 신을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성경을 읽고, 구절을 외우고, 기도하고, 말씀을 전파한다. 신은 선하며, 베풂은 옳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따라야 한다. 그녀의 신앙은 성경의 언어와 선한 행동으로 구성된다. 신에 대해 말하고, 그 말대로 살려고 한다.

“그래서 집안이 기독교도가 된 거요?”

그가 묻는다.

솔로몬은 그를 쳐다보다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솔로몬의 긍정신학은 처음부터 균열을 안고 있다. 따지자면 모태신앙이다. 스스로 택한 신앙이 아니다. 그녀의 신앙이 세워진 기반은 어머니 아하시야의 거짓 연출이었다. 천사가 내려와 교회를 축복했다는 이야기는 아하시야가 꾸민 것이었고, 솔로몬은 그것을 알고나서도 그 위에서 신앙을 이어간다. 긍정신학의 언어들, 즉 ‘신은 이러하다’는 모든 진술이, 처음부터 거짓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렇다고 솔로몬의 신앙이 공허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설은 거짓 위에서 진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차가수진(借假修眞))
솔로몬은 벤엘을 숨겨줄 때 성경 구절 앞에서 멈춘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되다.’ 그녀는 그 말에 붙들려 행동한다. 긍정신학의 언어가 그녀를 움직이는 것이다. 그 언어가 거짓 위에 세워졌어도, 결국 그것이 그녀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긍정신학의 본질적 한계는 소설 중반에 드러난다. 솔로몬은 마냐나가 죽고 벤엘이 무너지는 장면에서, 자신의 믿음에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누구를 향한 배신감도 아닌, 그리스도와 자신의 믿음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신을 말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가, 말도 기도도 통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무너지는 순간이다. 긍정신학은 현실의 고통 앞에서 언제나 취약하다. 신은 선하다고 말했는데, 선량한 자가 죽었다. 왜 아픈지, 왜 죽었는지, 왜 데려가야 했는지, 그 간격을 언어로 메울 수 없을 때, 긍정신학은 침묵한다.

 

벤엘-부정신학의 화신

“신앙이란 것 말이오. 방패막이로 쓰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도구에 불과하오. 짧은 지식을 감추고, 미개한 성질을 무모한 의지로 밀어붙여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이지.”

벤엘은 부정신학의 인물이다. 그는 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다. 아니, 더 정확히는, 신에 대해 말하는 모든 언어가 거짓이라고 믿는다. 성경은 희생만 요구하는 불쏘시개이고, 신앙은 방패막이에 불과하며, 신은 아무도 돕지 않는다. 그는 긍정신학의 모든 진술을 하나씩 부정한다.

부정신학은 전통적으로 신의 초월성을 보호하기 위한 신학이다. 신은 인간의 언어로 담을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경외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벤엘의 부정은 경외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절망에서 나온다. 천국의 전쟁을 목격했고, 선한 자들이 아무 이유 없이 죽는 것을 보았으며,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이 결국 권력과 배신으로 귀결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의 부정신학은 신학적 성찰이 아니라 절박한 생존을 통한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부정신학에는 역설적인 힘이 있다. 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할 때, 그 침묵 안에서 오히려 신의 흔적이 남는다. 벤엘이 끝까지 부정한 것들을 보면, 그가 무엇을 원했는지가 보인다. 신은 아무도 돕지 않는다고 말한 자가, 정작 누군가를 돕기 위해 죽었다. 신앙은 방패막이에 불과하다고 말한 자가, 교회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정말로 의도한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부정은 결국 그가 가장 원했던 것의 이면이었다. 말할 수 없다고 했지만, 행동으로는 말했다.

아하시야의 유언이 이 역설을 완성한다. 그녀는 ‘진짜 예수’를 기다렸다. 천국에 매달리지 않고, 낮은 곳의 악마들을 직접 끌어올리는 자. 부정신학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 즉 모든 언어를 지운 자리에 나타나는 진짜, 그것이 벤엘이었다. 가짜를 부정하고 부정하다가 남은 것이 벤엘이었고, 그는 자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끝내 알지 못했다.

 

아하시야-두 신학 사이에서 길을 잃은 자

아하시야는 긍정신학으로 시작해서 부정신학으로 끝난 인물이다. 그녀는 처음에 기독교-긍정신학을 생존전략으로 선택했다. 신은 이 교회를 보호한다, 천사가 우리를 축복했다. 그러나 그 말들은 그저 도구였기에, 그것이 거짓임을 그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긍정신학의 언어를 거짓으로 사용한 자의 말로는 필연적이다. 언어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언어를 스스로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아하시야는 말년에 예수는 가짜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부정신학으로의 전환처럼 보이지만, 진짜 부정신학이 아니다. 그녀는 가짜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진짜를 요청한다. ‘진짜 주님을 따라라.’ 부정신학은 진짜조차 말할 수 없다고 하지만, 아하시야는 진짜가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두 신학 사이 어딘가에서,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길을 잃었다.

그러나 그 착란 속에서 그녀가 남긴 말은 예언이 되었다. 긍정신학의 언어로도, 부정신학의 침묵으로도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정신이 무너진 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대신했다. 신의 말은 어디서 오는가. 가장 올바른 자의 입에서인가, 아니면 가장 무너진 자의 입에서인가. 가장 올바로 사는 자에겐 신이 필요 없다.

 

가짜 선지자라는 말을 듣는, PTSD가 온 쓸모없는 탈영병

“당신도 어쩔 수 없는 거지. 어쩔 수 없는 거요, 안 그렇소? 아무리 성서를 끼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일러도…… 모든 기독교도들이 다 그렇소. 그들의 원수가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던 걸 비난하고 원망하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가엾은 환자 한 명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오. 참 그렇지 않소?…… 당신은 그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지.”

이 대사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잔인한 대목이다. 벤엘은 솔로몬을 공격하고 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공격한다. 자조와 적의가 구분 불가능하게 뒤섞인 이 말은, 그가 마냐나의 죽음에 대해 스스로 얼마나 깊이 죄책감을 느끼는지, 그리고 그 책임을 아무에게도 떠넘길 수 없어서 솔로몬에게까지 쏟아붓는지를 한꺼번에 드러낸다. “당신도 어쩔 수 없는 거지”라는 말 안에는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이 숨어 있다. 스스로에게 해야 할 말을 남에게 하는 자의, 절망적인 자기 용서의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시도에 불과하지만.

“나처럼 쓸모없는 인물에게 시키고 싶은 일이 있으셨을 줄 미처 몰랐군!”
“쓸모없는 인물이라니?”
솔로몬이 그 말투의 기막힘에 놀라서 벙어리가 된다. 벤엘이 공격적으로 들썩인다.
“그놈의 천사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 ‘남부끄러운 인물, 유용한 짓은 하등 안 하는 놈, 논리와 관심에 정신 팔려서 겉보기만 그럴듯한 짓에 몰두하는 가짜 선지자!’……”

벤엘은 자기가 쓸모없다고 믿는다. 가짜 선지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반박하지 못했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리고 지옥에 와서도 그 말들을 끌고 다닌다. 골고다의 예수가 십자가를 끌고 간 것처럼.

이 자기비하의 심리는 그가 스스로 붙인 가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가 택한 가명인 ‘반달vandal’은 공공의 재산이나 사유 재산을 고의적으로 파괴하거나 해를 끼치는 사람을 뜻한다. 처음부터 자신을 파괴자로 규정하고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씁쓸한 역사적 아이러니가 겹쳐 있다. 반달족은 실제로는 바로 그 ‘반달리즘’의 피해자였다. 로마를 침략한 그들의 행위가 과장되고 왜곡되어 ‘파괴자’의 상징이 되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오랜 이동과 전쟁 끝에 멸망했다. 타인이 붙인 낙인을 자기 이름으로 삼는 것, 그것이 벤엘이 하는 짓이다. 천국에서 ‘가짜 선지자’라 불린 자가 지옥에서는 스스로를 ‘반달’이라 부른다. 그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이미 내면화했고, 그것에 저항하는 대신 먼저 자신을 그 자리에 갖다 놓는다. 선제적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방어하는 것이다. “그래 내가 죽일놈이다!” 같은 식.

‘가짜 선지자’라는 표현은 소설의 제목과도 직접 통한다. 가짜예수를 믿은 악마에서 ‘가짜’는 솔로몬의 어머니나 솔로몬만을 향한 말이 아니다. 아하시야가 외치던, 성경의 그 ‘가짜예수’만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벤엘 자신도 가짜라는 낙인을 안고 있다. 천국에서 쫓겨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논리와 관심에 정신 팔린다는 비난, 즉 실천 없는 지식인이라는 비난. 그런데 소설의 끝에서 그가 남긴 것은 약초 도감이었다. 평생 지식에 몰두한다고 비웃음 받던 자가, 마지막에 그 지식을 타인을 위해 썼다.

이 장면은 그래서 단순한 분노의 폭발이 아니다. 벤엘이 왜 지옥에서도 끝내 자신을 증명하려 했는지, 왜 마냐나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무너졌는지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그는 천국에서 이미 ‘쓸모없는 자’로 규정당했고, 그 말이 맞다고 하면서도 그걸 반박할 기회를 평생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끝내 오지 않았을 때, 그가 선택한 마지막 방식이 자결이었다.
타인이 내린 정의가 한 존재의 삶 전체를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이 짧은 대목은 가장 날것의 형태로 보여준다. 벤엘은 그 말들로부터 도망쳤지만, 결국 그 말들이 옳지 않음을 증명하려다 죽었다.

 

정신착란자가 예언한 진짜 구세주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가장 비틀린 방식으로 완성하는 것이 아하시야의 유언 같은 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수는 가짜다. 가짜 예수가 그동안 내 눈을 어지럽혀 왔다. 그러나 이제는 보인다, 세상의 모든 왕들이 일어나고, 통치자들이 함께 모여 이자의 뜻을 논의하고 있구나. 그들만의 하나님 나라를 쫓느라 그들 백성은 돌보지 아니하고, 고작 세 치 혓바닥으로 서로를 기름칠하고 있다. (…중략…) 너는 이 지옥을 구할 새로운 구세주를 맞아들여라. 그분이 진정 외면당한 지옥을 다시 일으키는 자, 천국에 매달리는 일 없이 우리 낮은 곳의 악마들을 직접 끌어올려 주실 분이다. 가짜를 좇지 말고 진짜 주님을 따라라!”

말년에 정신이 흐려진 아하시야가 남긴 이 말은 착란처럼 읽힌다. 그러나 소설 전체를 다 읽고 나서 되돌아보면, 이것은 예언이었다. 그녀가 말한 ‘진짜 주님’의 조건을 하나씩 대입해 보면 정확히 한 인물에게 닿는다. 천국에 매달리지 않는 자, 낮은 곳의 악마들을 직접 끌어올리는 자, 외면당한 지옥을 다시 일으키는 자. 그리고 백성은 돌보지 않고 혓바닥으로 기름칠하는 자들, 즉 바알과 벨리알의 군대를 이 땅에서 몰아낸 자.

그것은 벤엘이었다.

아하시야는 평생 가짜를 믿다가 진짜를 기다리며 죽었다. 그런데 그녀가 기다린 진짜 구세주는, 그리스도를 경멸하고, 지옥에서 굶주리고, 자신을 반달이라 부르며, 끝내 모두가 외면하여 죽어간 천사였다. 구세주는 왔다. 다만 본인을 포함해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으로.

소설의 제목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여기서다. 가짜예수를 믿은 악마들의 교회에, 진짜 구세주가 거지의 모습으로 찾아왔다(신들은 매번 이런 식이다). 그리고 그 구세주 자신은 끝까지 자신이 쓸모없는 파괴자라고 믿었다. 믿지 않는 자가 구원했고, 기다린 자는 알아보지 못했으며, 구원받은 자는 그것이 구원인 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 구세주를 자기 손으로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는 것도. 이 소설이 선악도, 신앙도, 구원도 그 어떤 것도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방식이다.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과 벤엘의 난동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모두에 기록된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몰아낸 사건이다. 성전 안에서 제물용 동물을 팔고 돈을 바꾸는 장사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예수는 채찍을 들어 그들을 내쫓으며 외쳤다. “내 아버지의 집을 시장통으로 만들지 말라.” 이 사건은 단순한 분노의 폭발이 아니었다. 성전이 본래의 기능, 즉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를 위한 기도의 장소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소설 안에서 벤엘이 교회의 싸움판에 뛰어드는 장면이 있다. 바알군 출신 악마와 벨리알군 출신 악마가 전쟁의 원한을 들먹이며 칼을 빼들고 는 순간, 벤엘이 접시를 두 악마 사이로 집어던지며 뛰어든다. 그리고 외친다.

“다들 뭐하는 짓인가! 서로 돕고 양보하지 못할망정, 한 가족끼리 칼을 빼들고 오히려 죽일 듯이 굴다니!”
(악마가 양보요? 천사도 안하는데?)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바알이니 벨리알이니 하는 이름에 도취되어 의미도 목적도 없는 싸움을 부추긴 자들이 이 땅을 파괴했다고, 그 싸움을 교회 안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 부끄러운 짓이라고, 성서의 말씀을 단 한 번이라도 똑바로 마주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외친다. 그리고 직접 칼을 빼앗아 싸움을 끝낸다.

예수가 몰아낸 것은 단순한 상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전 제사 제도와 결탁한 종교 권력의 일부였다. 성전에서 장사할 수 있는 허가 자체가 권력의 산물이었다. 예수의 분노는 그 구조 전체를 향한 것이었다. 벤엘도 마찬가지다. 그는 두 악마들 개인을 향해 분노하지 않는다. 바알과 벨리알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전쟁의 구조, 젊은이들을 도살장으로 보내고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다시 그 구조를 재생산하는 악순환 전체를 향해 외친다.

“……자, 봐라! 여기 전부 다 자네와 같은 아비 어미들이다. 자식들을 전쟁터에 휘말리게 한 세대다. 오! 그렇지. 누구 여기에 좋아서 피 흘리는 자 있나? 응?”

 

“젊은이들을 봐라! 그들은 모조리 도살장으로 향하는 양처럼 군대로 끌려가고 있고, 끌려가면서 유순한 어린양처럼 입도 한 번 벙긋 안 하고 있다. 누군가 그들을 팔았다. 누가 그들을 팔았지? 바로 너희들이다. 누가 이런 사악한 세상을 만들었지? 바로 너희 부모들이, 바알이니 벨리알이니 하는 같잖은 이름에 도취되어, 하등 의미도 목적도 없는 싸움을 부추긴 게 아니냐!”

예수가 매질로 상인들을 몰아냈다면, 벤엘은 말로 악마들을 무너뜨린다. 둘 다 그 자리에 있는 자들이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정면으로 들이민다.

벤엘은 PTSD로 인해 전쟁터에서 도망친 패잔병이다. 벤엘의 고함은 사실 교회나 악마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천국의 전쟁을 향한 것이었다. 그가 도망쳐 나온 것, 그를 가짜 선지자라 불렀던 것, 의미 없는 싸움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에 대한 오래된 분노와 비탄이 터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차이가 있다. 예수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했다. 성전 정화는 의도된 행위였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수는 알고 있었다. 반면 벤엘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그는 교회를 지키려는 의식적 의도로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 천국에서의 기억과 자신의 분노에 이끌려, 말하고 싶었던 것을 충동적으로 내질렀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 행동이 교회를 지켰지만, 그것은 벤엘이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이 차이가 소설 전체의 신학적 대립과 연결된다. 예수의 성전 정화는 긍정신학의 언어로 읽힌다. 신의 뜻을 알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한다. 벤엘의 난동은 부정신학의 언어로 읽힌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그럼에도 가장 필요한 것을 한다. 알고 한 행위와 모르고 한 행위가 같은 결과에 도달할 때, 소설은 묻는다. 그렇다면 의도와 신앙심은 행위의 필수조건인가.

예수의 성전 정화는 메시아가 한 일이었다. 벤엘의 난동은 스스로를 반달이라 부르는, 천국에서 가짜 선지자라 불린 자가 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같았다. 성소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벤엘은 ‘가짜 선지자’이자 ‘진짜 주님’이었다.

 

두 신학의 충돌결과-행위만이 남는다

아하시야는 성서의 예수를 가짜라 부정하고 진짜 예수를 기다렸다. 그 ‘진짜’인 ‘가짜’ 예수가 성전을 정화하러 왔을 때, 그는 수건으로 금빛 머리를 가리고, 진흙을 뒤집어쓰고, 접시를 집어던지는 모습으로 왔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본인조차도.

두 신학의 충돌이 소설 전체에 걸쳐 진행된 뒤 남는 것은 행위다. 솔로몬의 긍정신학은 그녀를 움직였지만, 그 언어들이 현실의 고통을 설명하지는 못했다. 마냐나는 죽었다. 교회는 바알군과 벨리알군에 의해 파괴될 뻔 했다. 벤엘의 부정신학은 모든 언어를 부정하고 지웠지만, 그 안에서 그는 가장 큰 행위를 했다. 결국 아하시야의 착란은 예언이 되었다.

솔로몬이 벤엘을 숨겨준 것은 신학적 결론 때문이 아니라 성경 구절 하나 때문이었고, 벤엘이 죽은 것은 신학적 확신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긍정도 부정도, 결국 행위 앞에서는 수단이었다. 신을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실제 삶 앞에서 부차적이다. 솔로몬은 말하면서 살았고, 벤엘은 침묵하면서 행했다. 그리고 둘 다, 같은 자리에 도달했다. 교회는 살아남았고, 가난한 자들은 돌봄을 받았으며, 죽은 자들은 기억되었다.

언젠가 스스로 다짐해 버린 말과 꼭 같은 꼴이 되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영원히 이 교회를 지킬 운명인 것이다. 성서의 말씀과 새벽 기도를, 거실에 깔리는 돗자리와 시장에 끌고 나가는 수레를, 경건한 악마들의 기도회를, 기독교적 믿음에 충실한 생활을…….

솔로몬은 벤엘이 최후에 상상한 그녀의 삶을,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서 받아들인다.

그것이 비록 고통스러운 삶일지라도 말이다. 솔로몬은 교회로 돌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평생 동안 가난한 자들을 돌보면서 살았다.

신학의 언어가, 천사들과 악마들이 옳고 그름을 다투는 동안, 나머지 존재들의 삶은 그 논쟁과 무관하게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삶을 지탱한 것은, 어느 신학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무언가였다. 이 소설은 그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존재했다는 것을, 솔로몬이 평생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로 증명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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