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 꺼리낌 없이 부탁한다고 하셔서 꺼리낌 없이 써봅니다. 참고로 제 주관적인 의견이니 너무 깊게 받아드리지 마세요.
잭 런던의 작품 “야성의 절규”에는 납치당해 썰매개로 팔려나간 개 ‘벅’이 등장한다. 벅은 고고한 귀족가의 개였으나, 썰매개로 팔려갔을 때, 썰매를 끄는데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자신의 주머니에 뭐 하나 들어오는 것 없음에도 벅은 선두에 서기 위해 다른 개들과 경쟁하고, 주인을 위하여 무거운 짐을 얼마까지 끌 수 있는 지 내기의 대상이 된다. 벅이 그 사슬에서 풀려난 건, 노동의 고통이 두려워 도망친 게 아니라, 불가피하게 주인을 잃어버렸을 때였다.
반면, 이 소설의 주인공(엘프)은 순수하게 ‘노동의 고통’ 때문에 산타를 죽이게 된다. 그럼 그는 무엇을 계기로 노동의 고통을 느꼈는가. 그저 노동이 힘들고, 그 힘든 노동으로 주변 사람들이 죽어나가면, 노동의 고통을 인식하고 도망가게 되는가. 이 소설의 아쉬운 점은 “그가 어떻게 노동을 고통으로 인식했는가”라는 연결고리가 빠져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산타 살해”에 이어 엘프를 믿는 “아이들의 살해”를 예고하는
참고로 전태일 열사도 노동을 고통으로 인식하였고, 폐병으로 죽어가는 여공들을 보고 불쌍하여 자신의 월급을 털어 먹을 것을 쥐어줄 정도로 따뜻한 성품을 가졌으나, 그가 투쟁을 하게 된 것은 그들이 가련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 때가 아니라, ‘노동법’을 알고 나서였다.
분노는 고통보다, 배신, ‘이건 잘못 되었다.’라는 자각으로 이루어진다.
단편이라 그 부분까지 서술하기 힘들었던 것일까. 그러나 이 연결고리가 사라진 소설은 묵직하게 날릴 한방이 부족해 보여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