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메티스와 정을 통한 제우스에게, 가이아는 메티스가 아버지보다 지혜로운 아이를 낳으리라 예언한다.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타르타로스에 던져넣었던 제우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예언이 아닐 수 없었다. 두려웠던 제우스는 (이미 임신중이었던)메티스를 삼켜버린다. 몇 달 후 제우스는 참을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고, 프로메테우스로 하여금 자신의 두개골을 도끼로 쪼개버리라 명한다. 선지자의 도끼질이 끝나고, 제우스의 머리 속(물리)에서 무장한 아테나가 뛰쳐나온다.
장르문학 텍스트는 제우스의 두개골을 쪼개고 태어나는 아테나와 같다. 모든 장르문학 텍스트는 장르를 파괴함으로써 탄생하기 때문이다. 장르란 지금껏 축적된 장르문학 텍스트의 총체에서 기원한 일종의 인식틀이다. 그러나 새로 쓰여진 장르문학 텍스트는 그것이 이미 발표된 텍스트의 필사가 아닌 이상 태생적으로 ‘축적된 텍스트의 총체’에서 벗어나 있을 수밖에 없다. 요컨대 계속해서 새로운 장르문학 텍스트가 출현하는 한 장르라는 고정된 개념은 불가능하다.
장르라는 지평이 무너진 곳에서 장르문학 텍스트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아테나의 산파 역할을 맡은 존재가 선지자 프로메테우스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프로메테우스는 아테나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지만, 아테나의 출생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탄생과 무관하면서 출생을 관장하는 존재. 그는 독자이다. 독자는 장르라는 구성적 개념이 가지는 근본적인 모순을 깨부수고 새로운 텍스트를 받아낸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텍스트에 관한 어떠한 태생적이고 위계적인 권위나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 독자는 대리석 속에서 형상을 찾아내는 미켈란젤로처럼, 직조된 의미의 그물(text) 속에서 텍스트의 다층적인 면면을 비추어야 한다.
요컨대 읽는 사람 읽기 나름이라는 뜻이다.
2.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를 일컫는 수식어는 많다. 코즈믹 판교 호러, 코딩즈믹 호러, 코즈믹 호러그래밍…… 윤수현의 방을 나선 송현희는 인간의 인지를 넘어선 힘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는다. 지금까지 ‘윤수현’이 그래 왔던 것처럼 다른 별의 ‘코즈믹 프로그래머’가 인류를 일소시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쩌면 당장 1초 후에 전 인류는 사라지고, 어느 외계인 프로그래머의 방에 팔랑거리는 사진 조각으로만 남게 될 수도 있다. 큰 힘에는 큰 책임과 함께 큰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우주의 관리자 권한에는 우리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험이 따를 것이다. ‘코즈믹 호러’라는 장르적 수식어가 따라붙기에 부족함이 없다.
진짜로?
나는 이 글에서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에 SF나 코즈믹 호러의 독법을 적용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텍스트를 향한 다층적인 해석이 텍스트를 보다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만들어 준다는 당위적 변명은 뒤로 하자. 어쨌든 재밌게 읽으면 그만. 공언하건대,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는 ‘송현희’가 미쳐가는 모습을 담은 심리 스릴러 소설이다.
3.
윤수현의 주장을 사실이라 치자. 이 넓은 우주에 윤수현 말고 관리자 권한에 접근한 존재가 없을까? “젤리 좀 먹었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꼬라지가 일어나는 세상에서 다른 버그가 없을까? 그런 선을 넘어 권한을 얻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일까?” 충분히 그럴 듯하게 공포스럽다. 우주에서까지 찾을 필요도 없다. 관리자 권한을 가진 또 다른 인간, 혹은 인간’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인류는 멀쩡히 존속해 온 걸까? 다른 별과 이 별의 프로그래머들이 우주적 시스템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동안, 이 시뮬레이션 속에서 인류라는 생물종이 살아남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 확률을 뚫고 인류가 존속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송현희의 의문처럼, 젤리를 먹은 횟수를 저장하는 메모리의 오버플로우로 하필이면 관리자 접근 권한을 얻게 될 확률은? 아무리 “보안취약점이라는 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데서 나오는 거”라고 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정말로 윤수현의 말이 사실이긴 한 걸까? 어쩌면 이게 다 거짓부렁이라면? 윤수현이 정말로 미친 거라면? 그러나 윤수현은 초능력을 보여주지 않았나. 안이 바깥보다 넓은 방,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는 방문,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살갗.
코를 벌름댔다. 대마 스틱의 향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환각제인가? LSD를 빨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더니, 진짜 지금 그것 때문에 전혀 다른 색을 보고 있는 건가? 수현은 그대로 서 있었다. 조금씩 그의 몸에서 발하는 빛이 둔해졌다. 곧 그는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집 전체에 강렬한 풀 냄새를 풍길 정도로 피워 대는 향이 환각제일 확률과, 젤리를 65,536개 먹어서 신의 권능을 손에 넣을 확률 중 어느 것이 더 높을까? 상식적인 추론과 윤수현의 말 중 무엇이 진실일까? 엄밀히 말해 우리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다.
윤수현의 말이 미친 소리고, 그의 권능이 환각 효과라고 생각한다면 의심할 거리는 많아진다. 신적인 권능이라고 감쪽같이 믿었던 그 기이한 현상들이 정말로 그의 전능함을 보장할 수 있을까? ‘모순된 현상이 실제로 발생한다’는 전제로부터 ‘윤수현이 우주의 생물종들을 삭제했다’로 이어지는 논증은 비약이 아닐까? 정말 그가 외계인을 소멸시켰다는 증거는? 그의 그림들이 계란말이나 셰이빙폼을 보고 그려낸 작품이 아니라 진짜 외계인이라는 증거는(예술가들이 환각제를 통해 예술적 영감을 얻은 사례는 많다!)? 윤수현의 증언을 제외하면 그런 증거는 없다. 그게 우리가 확신할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팩트다.
4.
이제 이런 의문이 생긴다. 송현희는 왜 (증거도 없이) 윤수현의 말을 믿었을까? 그의 주장을 합리화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논리적 비약을 순순히 받아들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초반이다.
어릴 적부터 내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학창 시절 내내 게임에 미쳐 살았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도 크면 재미있는 게임을 꼭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게임을 만드는 것은 작은 세상의 신이 되는 일이라는 거창한 철학도 있었다. 민망하지만 그때는 가상 세계를 만들 거라는 희망이 커다랬다. 내가 창조한 인물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면 나는 내 자신보다 더 확장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송현희가 게임 제작에 뛰어든 이유는 낭만적이다. 그것이 오랜 꿈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업종에 종사하여 그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기. 누구나 바랄 만한 일이 아닐까. 송현희는 이를 해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하도 야근을 하다 보니, 나도 회사에 대해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 같은 것이 발했다. 일주일에 최소 65시간 일하면서 채팅 서버를 구현하던 나는 우리 프로젝트를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참여한 게임 프로젝트가 올해의 가장 인기있는 어플리케이션 상을 차지하고, 순수익을 한 300억쯤 내지 않을까 생각했다. (…) 여기까지 허망한 이야기였다. 본격 우주선장 액션 전술 게임은 앱스토어에 올라오지도 못하고 망했다. 10개월 정도가 지나 게임의 얼개가 다 갖춰지고 나서, 유저를 상대로 한 첫 번째 테스트에 참여한 사람들의 평가가 개판이었다.
송현희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일에서 좌절을 맛본다. 그가 맡은 건 세계 창조 같은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메신저 만드는 일에 가까운” 채팅 시스템 구축이었다. 경험을 쌓는 중이라는 자기최면으로 허탈함을 속여넘기는 날의 연속. 뿐만 아니라 살인적인 노동강도까지. 꿈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송현희는 “후려치기 좋은 땔감”이 되어 버렸다. 고통을 잊게 해 줄 독주(毒酒)같은 자기최면은 스톡홀름 신드롬에 비견될 자기기만의 경지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술이 현실을 바꿔 주진 못하는 것처럼, 결국 송현희의 프로젝트는 폐지되고 팀은 공중분해되었다.
이제 송현희는 대학을 갓 졸업했을 무렵의 새파란 청춘이 아니다. 판교에서 보낸 1년이 그를 시퍼렇게 만들었다. 좋게 말하면 어른이 되었고, 나쁘게 말하면 어른이 되었다. 이제 송현희를 움직이는 동력은 꿈이나 열정 따위가 아니다. ‘스타더스트 스튜디오’의 체계없음에 경악하면서도 구직활동을 하지 않으면 실업급여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을 들인다. 최신형 맥북 프로와 월세를 지원해준다는 복지조항이 있다는 이유로, 버그 발생 시 신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독소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근로계약서에 서명한다. 그의 동력은 이제 이해타산이다.
그러나 송현희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어른이 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송현희는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꿈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서버 다운이라는 문제에 대처하는 자세가 이를 보여준다. “주석은 개판이었지만, 서버 설계는 굉장히 뛰어났다. 천 명 넘는 실제 사용자가 있는 게임의 서버를 갑자기 도맡게 되니 어릴 때 꿈을 이룬 느낌도 괜히 들었다. 내가 구현한 건 아직 하나도 없지만서도. 점프를 많이 하면 서버가 작동을 중지하는 문제는 어떻게든 빨리 풀어보고 싶었다.” 그의 아무말 역시 주목하자. “(…)왜, 일은 사실, 자아 실현의 수단이라고도 하고요.” 말실수나 헛소리가 무의식의 솔직한 반영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되새겨본다면, 칙칙하고 생기 없는 개발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송현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세계 창조의 실낱같은 꿈을 놓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거기서 윤수현이 등장한다. 그는 송현희와 같은 프로그래머고, 스타더스트 스튜디오의 서버 개발자였다. 다시 말해 ‘스타더스트 월드’라는 가상 세계의 관리자이자, 송현희가 꾸던 꿈을 이룬 사람. 다시 생각해보면, 스타더스트 스튜디오에 입사한 송현희가 관심을 보이는 건 서버 개발이 아니라 윤수현이다.
“그게, 음, 그 점프 버그가 굉장히 이상해서요. 버그가 있으면 원래 어떤 기능을 구현하려다가 잘못 만든 거잖아요. 그런데 이건 좀, 게임이랑 아무 관련이 없는 기능을 만들려던 것 같아서. 그 분이랑 무슨 일 있었는지 알면 도움이 될 거 같기도 해서요. 뭐 특이한 행동이나 말을 했다든지.”
‘윤수현이 불필요한 코드를 짰다’라는 사실에서 ‘윤수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라는 의문으로 이어지는 게 필연적인 결과일까? 기획자 김태흔처럼 “그냥 뒤늦게 오타쿠 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는 일을, 송현희는 윤수현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시킨다. 그것이 기획자와 개발자라는 부류의 일반적인 성향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송현희는 윤수현에게 관심이 쏠려 있다. 윤수현이 붙여대기 시작했다는 이상한 그림들을 인터넷에 검색할 뿐만 아니라 그 그림이 마음에 걸린다는 이유로 밤 열 시 반에 회사로 나선다.
회사로 나선 송현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윤수현이 심어 둔 버그들이다. 의도성 짙은 버그들의 향연 앞에서 송현희는 윤수현을 의심한다. 중국의 경쟁사에서 큰 돈을 약속받았을 거라는 의심. 세계 창조에 성공한 것 같아 보이는 당신도 결국 이해타산에 의해 움직이는 ‘어른’일 뿐이지 않느냐고. 꿈과 이해타산의 갈림길에서 후자를 택한 송현희는 그런 의심으로라도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닐까? 그러나 윤수현이 남겨 놓은 메모는 그러한 의심을 비웃는 것 같다.
[//20181009, 게임을 만들 때가 사람이 신과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
[//20181011, 지금은 꽤 먼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언젠가 게임 내의 캐릭터들에게도 고급 인공지능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세상의 작은 캐릭터들 하나하나는 내 세상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이 된다.]
[//20181015, 우리 세상도 마찬가지라니까.]
[//20181016, 안 쓰는 코드는 무조건 지워야 한다.]
[//20181017, 나도 좀만 더 파고들면]
[//20181018, 이제 알 것 같아]
[//20181019, 취약점이 참 많다]
[//20181022, 사람이 더 필요해]
송현희는 윤수현이 남겨 놓은 주석을 통해 그가 자신과 같은 꿈, 게임을 통해 가상 세계를 창조하고 싶다는 꿈을 꾸는 사람임을 확인한다. 동시에 나머지 주석들은 그의 동력이 금전적 이해타산 따위가 아님을 증언한다. 송현희는 정말로 그가 미쳤다고 생각해서 경악한 것일까?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쳐버린 전임자를 직접 찾아갈 이유가 있었을까? 어쩌면 송현희는 윤수현이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꿈을 이루어냈음을 직감한 게 아닐까? 그것이 꼭 ‘윤수현이 이 세상의 관리자 권한에 접근했다’는 사실의 직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송현희의 직감 속에서 윤수현은, 획기적인 기술적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수도 있고, 그가 틀어박힌 방 안에서 독자적인 서버를 구축하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미쳤지만 그 자신의 머리 속에서는 세계를 창조했을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지, 중요한 것은 윤수현이 꿈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이해타산에 의해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송현희가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송현희가 굳이 몸소 윤수현을 찾아가려는 이유는 그래서다. 송현희는 꿈과 이해타산 사이에서 이해타산을 선택했다. 그러나 윤수현은 이해타산을 선택하지 않았고, 정황상 꿈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세파에 휩쓸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거리가 있다고는 해도 충격적인 일이다. 윤수현의 메모를 보면서, 서술 이면의 송현희는 무엇을 느꼈을까? 윤수현 정말 꿈을 선택한 게 맞을까? 정말 그렇다면 내게도 다른 길이 있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나도 이해타산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꿈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닿는다면 답은 하나다. 윤수현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가 정말로 꿈을 향해 나아가는지, 아니면 그저 미친 사람인지.
5.
윤수현의 집에 도착한 송현희는 대마 스틱(이라고 추정되는 무언가)의 향을 흡입했고, 그 후 환각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윤수현의 말을 믿는다. 이 때 그것이 정말 환각이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송현희의 말마따나, “현실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엇인가를 디자인하는 것은 쉽지 않다.” 환각도 마찬가지다. 꿈을 비롯한 환각은 모두 무의식의 반영이다. 그러나 송현희는 윤수현에 대해 아무런 사전 인식도 없지 않았나.
사실 있었다. 윤수현의 메모, 윤수현에 대한 동료들의 증언, 그리고 결정적으로 윤수현이 가져왔다는 그림들. 기획자 김태흔과 원화가 강영원은 그것을 ‘외계인 사진’이라고 콕 찝어 말하기까지 한다! 암시는 충분했던 셈이다. 집안과 방안의 초현실적인 인테리어는 송현희의 내부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을 암시를 폭발시킬 기폭제였을 뿐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어째서 송현희가 윤수현의 말을 믿게 되었냐는 의문이다. 앞서 말했듯 ‘모순된 현상이 발생한다’는 전제로부터 ‘윤수현이 우주의 생물종들을 삭제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논증은 비약이다. ‘윤수현이 세계의 관리자 권한에 접근했다’는 결론도 비약이다. 그러한 비약을 가능하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의 가장 큰 공포가 무지에서 오는 공포이기 때문이다. 즉 송현희의 가장 큰 공포는 틀린 선택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 틀렸는지 맞았는지도 모르는 채 남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송현희에게 윤수현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알려 줄 동앗줄이다. 그래서 송현희는 윤수현을 찾아갔다. 만약 그가 정말로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송현희의 선택은 틀린 것으로 판명나겠지만, 새로운 길을 찾아가면 된다. 윤수현처럼 말이다. 만약 윤수현이 정말 미친 사람이었을 뿐이라면, 자신의 선택은 옳은 것으로 판명날 것이고 그러면 그것대로 안심될 일이다. 요컨대 송현희의 무의식에서 윤수현은 그 정체를 파악하기 전부터 신이자 반신(反神)이고, 송현희의 과거를 평가할 심판자이면서 미래를 점지할 예언자다. 윤수현의 주장 역시 기폭제였을 뿐이다. 그런 암시를 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다. 송현희의 삶이 그랬을 뿐이다.
그래서 송현희는 윤수현을 믿기로 했다. 풀풀 풍기는 풀냄새 속에서.
6.
법정을 나선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정말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을까? 그랬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갈릴레이가 그렇게 말했다고 믿는다. 연예인들에 대한 찌라시를 상상해보자. “연예인 XX와 OO 충격 열애!”이라는 찌라시가 있을 때, 사람들은 믿을까, 믿지 않을까. 언론사 웹페이지에서 “이것 먹고 20kg 폭풍감량!”, “이것 쓰고 났더니 영어가 술술…” 같은 허풍 섞인 광고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자극적인 가짜뉴스는 그렇게 빨리 퍼질까. 왜 유튜브와 인터넷 방송이 장/노년층의 미디어생활에까지 빠르게 침투했을까.
우리는 진실보다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믿고 있다. 필요한 것은 약간의 정황 증거 뿐이다. 기폭제만 있다면 의혹은 신념이 되며 이윽고 진실을 장악한다. 마치 송현희가 그랬던 것처럼.
윤수현의 그 기이한 방에서 나오기도 전에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내게 접근 권한을 부여할 것이다. 나도 자유롭게 공간을 왜곡시키고, 내가 결코 본 적 없는 색깔로 빝나고, 프로그램을 꺼뜨리지 않고 유지하는 데 총력을 다할 것이다. 그게 내가 하던 일이었으니까. 어쩌면 윤수현의 그 개똥철학이 틀리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송현희는 지쳐 있었다. 자신의 열정이 좌절되고 바람이 부정당한다. 그가 윤수현의 광증에 동참하게 된 건 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현실이 너무 각박하고 삶이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꿈보다 이해타산의 논리에 엎드려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놓고 있지 않았다. 송현희가 환각 속에서 믿게 된 것은 어쩌면 윤수현의 말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송현희 내부에 내장되어 있던 ‘꿈을 선택해도 괜찮다’는(혹은 그러고 싶었다는) 소망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송현희와 비슷하지 않을까?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놓쳐버렸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갑자기 소설이 한층 더 호러틱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까. 우리 역시 송현희와 비슷하니까. 우리를 광증에 빠뜨릴 가장 큰 위협이 약물이나 세뇌 전파 혹은 고대의 문어 괴물일 거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우리 정신의 명민함은 의식의 어설픔을 파고드는 몇 개의 기폭제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