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란 감정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에는 죽음을 앞둔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순수한 소년이 나온다. 여주인공이 소년에게 “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자, 소년은 답한다.
“어린아이에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세요. 꽃한테 왜 피어 있는지를 물어보세요. 태양에게 왜 빛나고 있냐고 물어보세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이 소설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건 사랑은 우리의 ‘본능’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다. 그것이 사람을 이루는 본질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절대선이다.
위 문구와 대비하여 이 소설은 ‘혐오’는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내놓고 있다.
바로, ‘사랑의 결핍’이다.
자식의 성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 외로운 나를 받아 드려주지 않는 여자, 가엾은 내 동생을 용서하지 않는 피의자 가족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는 대신 법으로 결과를 판단하는 세상.
사랑받고자 했던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주인공은 자해를 하거나, 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죽인다. 이는 결핍된 사랑을 메우고 싶다는 표현이 아니다. “나는 사랑받지 않아도 되는 존재”, “너의 사랑이 필요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빙하기 위함이다. 사랑이 사람의 본능이라면, 그는 좌절된 욕망 속에서 계속 괴로워 해야한다. 그러나 그것을 끊어버리면 그는 자신이 갈망했던 ‘사랑’에서 해방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존재들을 불편하게 여긴다. 이는 사랑을 포기한 존재들이, 사랑을 본능으로 삼아 세워진 이 땅에서, ‘죽음’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적으로 처단해야 할 ‘악’이 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사랑이 ‘본능’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것은 오히려 후천적인 것이다.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별도로, “나는 사랑 받아야하는 존재인지” 여부가 ‘사랑이 있는 자’와 ‘결핍된 자’를 가른다. 흔히 “관종”이라는 표현이 있다. 타인의 관심을 바라는 이들을 조롱하는 단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보면 관종은 오히려 건전하다. 진짜 괴물은 관종을 포기한 이들이다.
예수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으며, 그렇게 죽은 피해자들의 희생을 순교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천국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사랑을 추구해도, 희생을 당해 줄 여유는 없다. 이런 세계의 사랑은 숭고하지 않지만 합리적이다. 시민혁명 이후 백성이 권력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듯, 사랑에 희생하는 것도, 또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다. 희생은 오로지 그 사람의 자유의지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소설 주인공이 불편한 것은 그가 일반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사랑을 갈망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이란 얄팍한 포장 뒤에 숨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희생할 수 없다.”는 필자의 의지와 맞부딪치는 순간 “혐오감”을 자아낸다.
그래서 필자는 주인공을 이해하면서도 동정하지 않는다. 사랑의 결핍. 그것은 필자 또한 가지고 있음으로.
필자는 주인공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느니, 희생당하지 않는 존재이고 싶다.
그것이 필자가 이 소설의 주인공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다.
P.S: 어쩌다보니 감상 위주의 리뷰가 되었네요.
소설을 잘썼네 아니네를 떠나 그냥 읽고 느낀 점을 분석해봤습니다.
이 소설은 혐오에 대한 숙고를 원하시는 분께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