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가. 우리는 태어날 때 가장 약한 모습으로 태어난다. 홀로서기를 할 수 없는 세상에서 보호자를 의지하여 바깥세상을 바라본다. 나는 다스릴 수 없는 세상을 다루고 있는 보호자를 보며 꿈을 키운다. 언젠가 나도 저 세상을 내 의지대로 다루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어른이 된 뒤 마주친 세상은 내가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다. 태초에 품었던 야망을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무수한 장애물이 눈 앞에 펼쳐진다. 일기예보가 맑음이라고 되어있어도 다음날 고깃배는 폭풍우를 만나 바다에 나가지 않을 수 있고, 어제까지 함께 식사를 했던 사람이 돌연 심장마비로 쓰러져 다음날 그 가족들이 보낸 부고장을 받아 볼 수도 있다. 삶은 무수한 갈림길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외길이다. 우리는 선택하는 것 같지만,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이 전부다.
야망이 있는 캐릭터가 아름다운 건 그가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보는 세상이 내가 다스릴 수 없는 세상이라면, 어린아이가 보는 세상은 “아직 다스릴 수 없는, 그러나 언젠가 다스리고 싶은 세상”이다. 야망이 있는 사람은 무엇이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지를 잘 아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 위에 보호자를 두지 않는다. 타협도, 포기도 없다. 그들의 욕망은 또렷한 직선으로 움직인다.
이 소설의 캐릭터들이 아름다운 건 저마다 가진 어린아이다움. 그 순백의 야망 때문이다. 성의 주인이 되기 위해 체스말을 옮기듯 주도면밀하게 판을 흔드는 바레타, 검 한 자루로 겁 없이 세상의 부조리에 대항했던 울프, 착취 당하느니 차라리 감옥을 택했던 로랜과 제 주인에게 모든 것을 건 한나. 아직 내 것이 아닌 세상을 제 손아귀에 넣으려는 다양한 캐릭터들 사이로, 다스려지지 않는 제 사랑을 보며 섧게 우는 에르도안이 교차한다.
야망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지만, 필연적으로 희생을 동반한다. 세상을 다스린다는 건, 그 다스림대로 살아갈 평범한 사람들의 눈물을 전제로 하므로. 그 눈물은 남의 눈물일 수도 있고, 자신의 눈물일 수도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야망이 누구에게 칼날을 겨누게 될지는 아직 연재중이므로 알 수 없으나, 아무쪼록 그 순수한 야망이 이끄는 대로 모든 캐릭터가 길을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