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품을 읽을 수 있게 해주신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글을 처음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당혹스러움에 가까운 감각이었습니다. 분명 읽으면서 웃고 있는데 왜 웃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제 정신에 남긴 인상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작품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 기뻤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작품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본 견해를 개진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왜 웃었는지에 대해 처음 의문을 가지게 된 후 한 동안(두 달)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2006년부터 개그콘서트에서 방영했던 골목대장 마빡이었습니다. 저는 14년 전, 마빡이의 첫 화를 보았을 때의 기억을 상기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 소설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와 흡사한 느낌을 받았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웃고 있으면서도 내가 왜 웃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당혹스러운 기분 말입니다.
물론 단순히 작품에서 받았던 인상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둘을 동치 관계로 묶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글은 편의상 단정적인 어조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오로지 객관적이지 못한 사견만을 담고 있을 뿐입니다.
자세히 살펴보았을 때 이 작품은 어두운 설정으로 가득합니다. 일단 주인공부터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에 모종의 시술을 가하면서도 제대로 된 설명도 해주지 않는 수상한 아르바이트에 자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르바이트라는 것의 실체가 드러나면서부터는 상황이 더 암울해집니다. 수술의 결과로 주인공은 평창올림픽의 이상을 전파하려는 일종의 본능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신체활동을 통해서 말입니다. 문제는 더욱 악화되어서 작품의 말미에는 주인공의 자아상이 무너지고 평창올림픽의 이상을 반영하는 일종의 신념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릅니다. 이 전면적인 정신적 변조가 이루어진 후로 주인공이 행하는 모든 행동은 오로지 한가지 인지도식에 기반하여 이루어집니다. 주인공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 혼자는 너무 외롭고 둘은 하나이며 당신은 평창이니까. 끔찍한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요? 답을 내리기 전에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랜 고구 끝에 저는 앞서 언급한 골목대장 마빡이로부터 세 가지 핵심적인 요소를 추출할 수 있었습니다. (1) 무해한 존재, (2) 바보스러운 행동, (3) 그 배경에 깔려 있는 기괴하지만 촘촘하게 짜인 거대한 사상적 체계.
골목대장 마빡이는 기본적으로 무해한 존재들이 나와 바보스러운 행동을 하는 코미디입니다. 이렇게 보면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무해함과 바보 같은 존재는 오래 전부터 코미디의 핵심적인 소재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두 요소를 모두 다루고 있는 코미디는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대다수의 코미디들로부터 골목대장 마빡이를 변별해주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무해한 존재가 바보스러운 행동을 하게 만드는 배경에 깔려 있는, 기괴하지만 촘촘하게 짜인 거대한 사상적 체계에 대한 암시라는 견해를 제안해보려 합니다.
여타의 코미디에서 무해한 존재의 바보스러운 행동은 단발적이며, 그 행동이 이루어지는 논리 자체도 대부분 해당 존재의 ‘생각이 짧다’는 전제를 시발점으로 하여 두세 단계, 혹은 한두 문장 정도로 함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골목대장 마빡이에서 제시되는 무해한 존재의 바보스러운 행동은 그런 방식으로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최종적으로 머리를 쉴새 없이 두드리며 ‘나 무섭지!’라고 말하는 행동이 도출되게 만든 총체적인 논리구조를 그저 ‘생각이 짧아서’라는 명제를 시점으로 잡고 소급해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가능은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의 기점과 최종적인 행동 사이에 놓인 관념의 간격은 일견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 보입니다.
문제는 마빡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빡이 뒤로 얼빡이, 대빡이, 갈빡이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등장하는 순서는 종교적인 제례와 같이 정교하게 짜여있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각 캐릭터마다 머리를 치는 동작도 세세하게 다릅니다. 대체 왜 저러고 있는가? 왜 저렇게 힘들어하면서 다양한 동작으로 머리를 때리고 있는 것일까? 이 쓸데없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교적인 행동의 배후에 도사린 것은 대체 무엇일까? 명시적으로 이야기해주지 않으니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행동하기 위해 의지하고 있는 신념들이 매우 괴이하며, 그러한 것들이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만들어진 사상의 총체가 생각보다 거대한 것 같다는 인상만을 희미하게 감지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표면적인 행동의 뒤편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하고 불가해한 존재의 흔적을 느꼈을 때, 저는 웃었던 것 같습니다. 왜 웃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 ‘당신이 평창입니다’에서도 저는 앞서 소개한 것과 비슷한 과정을 통해 비슷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었습니다. 일단 무해한 존재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개조되기 전에도, 개조된 후에도 나서서 남에게 유해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개조된 후 바보스러운 행동을, 합리적이지 못한 행동을 합니다. 초면인 사람에게 맥락에 맞지 않게 평창올림픽을 선전하고, 발작하듯이 캐치프레이즈를 내뱉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왕돈까스 위에 평창이라는 글자를 새깁니다.
이렇게 앞에서 언급한 세가지 요소 중 처음 두 개의 요소는 갖춰진 셈입니다. 이 시점에서, 만약 주인공으로부터 세 번째 요소에 상응하는 사상적 총체(본 작품에서 ‘평창’이라고 표현된)를 제거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생각이 짧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평창을 광고하기 위해 그러한 바보스러운 행동을 하는 내용이었다면 과연 지금만큼 웃겼을까를 고민해보면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골목대장 마빡이를 접했을 때의 기억을 단서로, 본 작품에서 주인공이 행하는 괴기스러운 행동이 최종적으로 웃음을 유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일련의 행동들이 이루어지는 배후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합리적이지만 논리적으로 정교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사상적 체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명시적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마빡이 패거리들이 가진 ‘타인을 무섭게 만들기’라는 목적처럼 ‘평창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라는 목적을 위해 ‘혼자는 너무 외롭고 둘은 하나이며 당신은 평창이니까’라는 이해할 수 없는 최초의 명제를 기반으로 쌓아 올려진 거대하지만 불합리해 보이고, 그러면서도 쓸데없이 정교하다는 인상을 주는, 수없이 많은 괴이한 신념들(e.g. 혼자서 평창을 말하면 외롭지만 둘이 말하면 하나된 열정이니까)로 구성된 관념의 미로가 말입니다.
결국 이러한 단계들을 거침으로써 저는 이 세가지 요소가 모두 적절하게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본 작품을 읽으며 웃을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확신은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어 보았는데 역시 재미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참으로 신기한 경험을 하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p.s. 사실 이 소설은 골목대장 마빡이와 한가지 점에서 크게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저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될지 모른다’는 현실적인 공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 소설은 어쩌면 골목대장 마빡이보다는 현재도 종종 유머소재로 사용되는 유명한 영상인 ‘대홍단 감자’와 더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