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의 끝에서 공모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작가: 천가을, 작품정보)
리뷰어: 지이훈, 18년 11월, 조회 104

(휴대폰 메모장에서 쓰고 옮겨서 들여쓰기나 맞춤법이 틀린 곳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장르

여중고생이 등장하는 백합 서사에서 서로 동성 연인인 것처럼 보이던 둘이 더 큰 세상을 만나고, 매력적인 이성을 알게 되며 어느새 멀어지고 헤어지는 이야기는 흔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이야기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이 소설에서는 ‘어느새’가 아니라 어느 한 쪽의 ‘배신’으로 순식간에 관계가 흐뜨러졌다

그래서 이 소설의 장르적 핵심은 ‘배신감’이 아닐까 느꼈다. 예컨대, 연인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이 ‘나는 처음부터 널 좋아하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것과, 동성 연인이 ‘나는 처음부터 남(여)성을 좋아하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다른 효과를 지닌다. 상대의 충격도 후자가 훨씬 크리라. 전자가 서로의 관계를 부정해서 슬픔을 준다면, 후자는 그 관계의 전제가 되는 믿음을 부정해서 배신감을 준다.

이 이야기는 퀴어 소설(그 중에서도 동성애 소설)이라는 장르에서만 다룰 수 있는 배신감을 다루는 동시에, 그 배신감을 섬세하고 감성적인 방식으로 그려냈다. 그렇기에 뛰어난 장르 소설인 동시에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2. 캐릭터

둘의 다름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내성적이고 친구가 하나뿐인 유이, 외향적이고 친구가 많은 주리. 하지만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내향이냐 외향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바라는가에 있다.

주리는 친구도 많고 외향적이지만, 오로지 유이 하나만을 바라고 있다. 자신의 우주 전체를 유이로 채우고 싶어하고, 그 우주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타인의 손길로 더러워진다’고 표현한다.  유이가 새 친구를 만들면 자기도 모르게 질투한다. 성격은 바깥을 향할지라도 욕망은 한 사람을 향하는 인물이다.

반면 유이는 내향적이지만 개방적이다. 자신의 한계를 알면서도 육상 동아리에 들어가고, 더 많은 친구를 만들고 싶어한다. 마음껏 자기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성격은 아닐지라도, 항상 외부의 우주를 꿈꾸고 더 많은 관계를 욕망한다. 주리처럼 한 사람으로 자신의 우주를 전부 채우는 건 불가능한 인물이다.

만약에 둘의 성격이 똑같은 채로, 유이 역시 한 사람만으로 자신의 우주를 채울 수 있는 인물이었다면 둘은 이렇게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유이의 안에는 이미 주리가 크게 자리잡고 있었고, 유이가 거기에 만족했다면 지유는 유이의 우주에 들어오지 못했을 테니까. 비록 서로에 대한 감정이 엇갈리긴 했겠지만, 그런 거짓투성이인 채일 지라도 둘의 관계는 계속됐으리라.

둘의 성격과 욕망 사이의 모순, 그 모순에서 오는 엇갈린 관계와 애초부터 어긋난 상태에서 돌기 시작한 톱니가 결국은 삐꺽대다 멈추듯, 그렇게 끝나는 연애. 그 순간순간들이 주는 아이러니의 쾌감이 컸다.

 

3. 글

흥미로운 문체였다. 가상의 여고생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말씨를 그대로 구현한 문체. 정말 여고생인 사람은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겠지만 어쩐지 소녀 화자라면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는 내 편견을 신기할 정도로 그대로 옮긴 문체.

이 문체를 통하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큰 재미중에 하나였다. 우리 주변에 사는 여고생인 사람은 누구도 이렇게 말하지 않겠지만, 애초에 백합은 현실성과는 동떨어진 장르가 아니던가. 나에게는 이 ‘소녀스러운’ 문체가 첫 문장부터 ‘아, 이건 백합 소설이겠구나’하고 느끼게 한 지표였다. 이 정도로 백합스러운 문체를 의도적으로 쓸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이 존경스럽다.

 

4.

사소한 의문점을 풀어보자면, 유이의 리스트컷은 소설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 장치인 걸까? 작가가 상정한 비유나 의미가 있겠지만, 아쉽게도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리스트컷이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소년 등장인물의 자해 흉터가 명백한 역할이나 비중 없이 맥거핀처럼 사용되도 좋은 소재인가? 작가의 의도를 내가 오독했을 뿐일 수도 있지만, 청소년을 다룰 때 좀 더 민감하게 사용해야 하는 재료들에 대해서 해볼만한 질문이라 생각하여 여기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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