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끝. 2부 1화까지 읽었습니다.
1. 개괄적인 평가
단도직입적으로 브릿g에서 읽은 작품들 중에선 오버 더 초이스 다음으로 좋았습니다. 하지만 브릿g에서 제가 많은 작품을 읽지 않긴 했네요. 그러니 보다 구체적인 지표로 말하자면, 돈을 주고 종이책을 샀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재밌었습니다. 돈주고 사서 보니 아까워 죽겠는 작품이 많은 요즘 시대에 이 정도면 정말 훌륭하지요. 매 화마다 흥미진진한 전개를 보여줘야 하는 웹소설로써도 훌륭하고, 분량이나 구성 면에서도 깔끔하게 1권(1부) 분량을 뽑아낸 것도 정말 좋았네요.
그래도 냉정하게 보면 재밌는 판타지 소설 정도에서 멈추는 것 같아요. 돈 주고 사볼 정도로는 훌륭하지만, 그 이상은 아닌 듯한. 마스터피스가 아닌 웰메이드. 좋은 점도 많고, 아쉬운 점도 많고, 평가가 갈릴 법한 부분도 많으니 하나씩 보죠.
2. 단순한 개요. 복잡한 플롯
개인적으로는 이게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전설의 마녀가 공주를 납치해서 그녀를 구해야 한다. 라는 메인 플롯. 그러나 이야기는 그것 하나만을 맹목적으로 보여주지도, 따라가지도 않습니다. 각각의 인물들이 제각기 움직이며 서로 상호작용하는 서브 플롯들이 모여서 궁극적으로 그 이야기를 만들죠. 모든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동기가 있으며, 서로 다른 영역에서 움직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정말 훌륭한 점은 그렇게 수많은 인물들이 움직이는데 글이 전혀 난잡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일단 이야기의 전개속도가 빠르고 분량도 적절하다는 점도 큽니다만, 어떻게 설명해야할까요. ‘캐릭터를 소개하기 위해 억지로 만든 장면’이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투입된 캐릭터’ 같은 것이 없었다고 할까요? 인물과 장면에 대해서는 좀 더 칭찬하고 싶네요.
3. 살아있는 인물
전 이 작품에 나온 모든 캐릭터들을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캐릭터가 중요하거나 인상적인 장면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일상적인 장면에서도 그 캐릭터의 특징과 의의를 전부 보여줬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캐릭터들이 장면 하나만 받은 게 아니라 적어도 두세장면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계속 부각합니다. 얘는 그냥 급조된 엑스트라가 아니라, 실제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이 자리에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나온 장면이 얼마 되지도 않는 캐릭터들인데도 어떻게 살아가며 무엇을 할 것이고, 어떤 난처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가 다 정해져 있고, 독자 머릿속에서도 그려집니다.
인물들이 살아있다는 점이 정말 매력적이에요. 역할이 겹치는 캐릭터도 없고, 특정 캐릭터 하나하고만 관계되어서 ‘종속’되거나 아니면 연결고리가 너무 약해서 ‘고립된’ 캐릭터가 전혀 없죠. 기사는 그냥 강한 기사가 아니라 공주의 연인이고 전설의 영웅을 찾는 이이며 부하에게 신임받는 대상이고 밀정의 암살 대상입니다. 밀정은 그냥 밀정이 아니라 은퇴한 군인이자 마법사의 친구고 전설의 영웅에게 의미를 가진 지인이고 누명을 쓴 성범죄자이자 죄수병들의 리더이고……. 캐릭터 하나하나의 요소가 정말 많은데도, 그걸 다 기억합니다. 왜냐면 필요없는 것들이 없거든요. 사소한 인물들에게도 이렇게 거미줄 같이 요소가 얽혀 있으니 글이 정말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보통 인물들이 많고 그들이 할 것도 많으면 “쓸데없는 소리로 난잡하게 하지 말고 그냥 스토리나 진행하지?”라고 작가한테 쏘아붙이고 싶어지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네요. 아직 의의를 잘 모르겠는 캐릭터는 나중에 의의가 생길 것이라고 ‘기대’를 하게 되고요. 뜬금없이 자기 과거사를 늘어놓으며 스토리를 부풀리는 캐릭터조차 전쟁 장면을 확 살게 해주는 좋은 캐릭터로 보여집니다. 이걸 하지 못하는 작품들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진짜로 감동이네요.
가장 좋은 건 인물이지만, 설정과 스토리도 흥미진진합니다.
4. 흥미진진한 플롯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순 없죠. 설령 군상극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에요. 그렇다면 각자의 결말이 중요해집니다. 누구는 실패할 것이고, 누구는 성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 부분에 대해서도 기대감을 심어주는데 성공했어요. 등장인물들의 행동원리와는 아무 관계 없이 움직이는 흑막. 그리고 음모. 캐릭터의 이야기가 그 자신이 바라지 않는 대로 흘러갈 것이 눈에 너무나도 선합니다. 그래서 기대돼요. 그래서 뒷이야기가 너무나도 궁금합니다. 마녀가 바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고 공주는 어떻게 되었는지, 밀정의 암살 임무는 어떻게 될 것인지. 무능한 왕자는 처절한 응징을 맞을 것인지 아니면 초라한 퇴장을 맞을 것인지. 등등.
이 부분에서도 그저 ‘장면을 만들기 위한 설정’ 이나 ‘설정을 넣기 위한 장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좋네요. 캐릭터들도 세계도 진짜로 그냥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하니까’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럽고 좋습니다.
이처럼 스토리와 인물들, 그 구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만, 제 불만은 정말로 뜬금없는 곳에서 나옵니다.
5. 스테레오 타입 설정
기왕 이렇게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인물들을 만들었다면 세계관에도 그와 비슷한 노력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 작품의 ‘마법’이라던가 등장하는 ‘괴물’은 기존의 dnd에서 영향받은 드래곤 라자에 영향받은 양산형 판타지에 영향받은 만화와 게임에 영향받은 요즘 웹소설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뭔가 이능배 작품에서 본 것 같은 연출. 마법의 신비함보다는 그 ‘힘’과 ‘효능’에 집중하는 설정. 흔하디 흔해서 별다른 설명도 필요 없이 ‘고블린’ ‘오크’ ‘오거’ 정도면 끝나는 괴물들 묘사. 영…… 정말 아쉬워요. 괴물과 마법에도 공을 들였다면 마스터피스로 거듭났을 것 같은데요.
시간 마법과 연관된 굉장한 연출이 있긴 했습니다만, 글쎄요. 오히려 그것도 이질적으로 보였습니다. 작품이 뜬금없이 군상극 판타지에서 이능력자 배틀물처럼 변한 것 같았거든요. “판타지에는 신비함이 있어야 한다!” 라고, 판타지의 장르적 문법이 체계화된 현 시점에서 전혀 맞지 않는 소리를 하지는 않겠지만, 그냥 아쉽네요.
6. 총평
어쨌든 좋고, 재밌는 작품입니다! 앞으로도 후속편이 연재되는 걸 기대하며 지켜볼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