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객관적인 리뷰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
예, 노력만 가상합니다.
작가님의 다른 작품을 읽어본 일이 없기에 방향성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SF보다는 메르헨으로 읽었고 메르헨에 더 어울리는 작품이라 생각하기에 그쪽으로 방향성을 잡고 리뷰하겠습니다.
[ 스포일러 주의! ]
얼마 전, 아는 지인분과 SF란 무엇인가에 관해 토론한 적이 있어요. 전 그때 SF란 이미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대충 과학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에 미래 기계장치 따위가 좀 나와주면 다 SF라고요.
하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죠. 이미지는 분명 편리합니다. 작은 이미지의 편린(광선검, 타임머신) 따위만 넣어줘도 판타지-SF의 딱지를 붙일 수 있죠. 하지만 그 편리함에 취해버리면 판타지도 SF도 본연의 색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과한 이미지 사용으로 색을 잃은 장르는 대개 다른 이름으로 분류됩니다. 제 생각에 이 작품은 메르헨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처음 이 작품을 읽을 때 의식의 흐름은 이랬습니다.
1, 2화 – 귀여운 카트리나! feat. 오메가 로즈메리(애완토끼). 대사도, 묘사도, 캐릭터도 과하게 우스꽝스러워서 좋은 의미로 메르헨 같았습니다. 덕분에 이 소설이 SF라는 사실도 잊고 말았죠. 그러다 호러처럼 분위기가 급변하더니…!
이번 리뷰 작품은 ‘싼타클로스의 선물’, 토끼처럼 통통 튀는 어린 소녀, 카트리나가 매력적인 짧은 이야기입니다.
세계관&스토리텔링&캐릭터
세계가 전체적으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우스꽝스럽습니다. 처음 카트리나의 극적인 캐릭터성을 마주했을 때는 어린시절 동화를 보는 느낌이라 절로 웃음이 나왔죠. 그런데, 3화부터 나오는 이질적 존재들까지 같은 모습을 보이니 느낌이 묘했어요. SF 형사인 것 같은 장발 남자도, 끔찍하게 생긴 외계 괴물인 비헷타와 아흐륵카도 카트리나랑 다를 게 없어 보였거든요. 모두 극적입니다. 선역도 악역도 마치 80년대 디즈니 캐릭터가 쓸법한 대사를 쓰고 상황과 설정 하나하나를 구구절절 설명해줍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동화적 상황을 이해시키려는 것처럼요. 우스꽝스러운 대사와 설명을 계속 듣고 있자니 긴장감이 모조리 사라집니다.
이쯤에서 처음에 못다 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죠. 호러처럼 분위기가 급변하더니……
숨이 턱 막히는 세계관 설정
콜켄비스하메스 바다…?
부르티니레스들
욜크니(비헷타의 연인? 으로 추정, 장발 남자의 함정에 걸려 사망)
디멘타이토(시공간 뒤틀림을 지칭하는 말인 듯, 비헷타의 기계장치로 조작)
고르치페르센(아흐륵카 종족의 이름)
아흐륵카(창고 괴물)
굴뚝의 존재(비헷타)
서프날테 감옥의 가장 튼튼한 감방
후바요르가니… (욕인가 봅니다?)
퓰리반-프리폴리셋츄리언 족
이 복잡한 고유어들이 단 3화, 133매 분량에서 쏟아집니다. 앞선 1, 2화가 카트리나의 귀요미 원맨(걸?)쇼인 걸 생각하면 사실상 이 짧은 소설 전체가 고유어로 범벅되어있는 거죠. 정통 SF여도 숨이 턱 막힐 설정들이 제대로 된 설명도, 이해할 시간조차 없이 우수수 쏟아지니 긴박한 상황이 흐려집니다.
게다가 고유어가 아닌 설정들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비헷타의 기계(차원 문을 여는 구식 장치)
장발 남자(파크)
우리 문명(하는 말 들어보면 외계인인가 봅니다.)
범죄자(외계인들이 인간의 뇌를 거래하고 다님)
해킹가루(바람에도 날릴 정도로 작은 해킹 기계들을 이용한 좌표 납치… 예, 그렇답니다.)
욜크니에 대한 과거 (저 꼬마애를 데려가지 않으면 욜크니를 살려내지… 후략)
좌표
주사기(이 세계관에서 쓰는 포션인가 봅니다)
카트리나의 정체(후술 하겠지만 이 문단만 무려 16줄입니다. 한 사람의 대사로만요.)
이외에도, 비헷타, 즉 굴뚝 속의 존재는 불에 약하지만 아흐륵카는 불에 강한 모양, 입에서 노란색 끈적이는 액체로 응급처치? 가능 등등…
당연하지만 저렇게 설정이 쏟아지는 건 장편에서도 금기입니다. SF든 판타지든 설정은 양날의 검이니까요. 설정이 늘어나는 만큼 세계관은 풍부해지지만 독자의 부담도 늘어납니다. 하물며 메르헨, 그것도 단편이라면 더 하죠. 동화답게 뭉개고 넘어가야할 설정과 이야기가 논문이 돼버리니 동화적 감성에 빠질 새가 없습니다. (반대로 SF에 집중하자니 동화적 감성에 휩쓸려버리고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댓글을 들여다보니 역시나 였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님께서 구축하신 세계관 속의 작은 이야기 중 하나더군요. 말하자면 장편 속 옴니버스(였어야하는) 스토리인거죠.
하지만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자는 카트리나의 이야기가 첫 경험입니다. 따라서 작가님의 설정들도 처음 보지요. 만약 이 이야기의 장황한 설정들을 그대로 살리고 싶으시다면 분량, 플롯을 몇 배로 늘려야 합니다. 그래야 설정을 설명하고 독자들을 이해시킬 여유가 생길 테니까요. 옴니버스라면 장발남자, 파크라는 사람의 일대기를 사건별로 보여줘도 좋겠지요. (소설 전개에 필수적, 대체불가 설정이 아니라면 그냥 폐기하는 편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만)
설정만으로 이어지는 스토리텔링과 그걸 ‘설명’하는 캐릭터
이 작품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단연 카트리나입니다. 메르헨과 잘 어울리는 어린아이, 통통 튀는 성격에 독특한 정신세계(…?)까지 합쳐져 귀여움이 폭발합니다. 1, 2화는 정말 아무 내용 없는 카트리나의 일상인데도 재밌습니다. 3화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급변할 때도 캐릭터에 애정이 생긴 만큼 몰입도 되지요.
문제는 그다음부터입니다. 장발남자가 나올 때까지 제법 섬뜩하던 분위기가 굴뚝 속 존재(비헷타)가 나오자마자 다시 우스꽝스러운 동화가 돼버립니다. 여기까지도 괜찮은데 바로 다음 순간에 장황한 설정 설명들이 시작되요. 설정 설명이 태반을 차지하다보니 이야기의 흐름도 설정에 치중됩니다. 만약 이 작품이 정말 메르헨이라면 이렇게 복잡한 설정이 많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동화라면 ‘늑대의 배를 갈라서 할머니를 구출한 뒤 돌을 채워 넣었다!‘ 정도의 직감적으로 알아들을 만한 설정을 써야지요.
(SF라고 해도 설정을 좀 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킹가루 같은 설정이 한두개 있으면 참신한 조미료가 되겠지만, 이렇게 너무 많이 넣으면 요리의 본연의 맛이 흐려집니다)
이러한 설정 설명의 정점은 마지막 병원 씬입니다. 예를 들어…
“좋습니다. 여러분은 들을 자격이 있지요. 엄밀히 말해 카트리나는… (후략)”
이 문장으로 시작되는 설명이 무려 한 대사, 한 호흡에 16줄입니다. 심지어 여기에도 퓰리반 뭐시기라는 새로운 고유어가 들어갑니다. 작중에선 카트리나랑 로즈메리만 이해 못했다고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엔 독자들도 이해… 아니, 이해할 의욕이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야 맥이 빠지는 걸요. 안 그래도 해일처럼 쏟아지는 설정 설명을 받아내느라 지쳐 있었는데, 사건이 마무리되어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할 타이밍에까지 계속 이성적 이해를 요구하니까요.
못 다한 이야기
위에서부터 계속 강조했듯, 이 소설의 장점은 단연 카트리나라는 캐릭터입니다. 캐릭터의 매력만으로 2화, 54매 분량을 이끌어가지요. 반면 이 소설의 단점은 그 카트리나가 조연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톡톡 튀던 카트리나의 시점이 어느 순간 다른 캐릭터들에게 옮겨가더니 장황한 설정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는 아예 카트리나 시점에 집중하는 편이 어떨까 싶어요.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동화 속 괴물들은 정체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괴물은 괴물일 뿐이고, 산타는 산타고 장발 남자는 장발 남자입니다. 메르헨에서는 모든 사건, 설정들이 (말이 되든 안 되든) 직감적으로 이해되야 하지요. 그러니 설정 설명도 필요 없고요.
읽으면서 정말 재밌게 쓰셨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즐기면서 글을 쓸 수 있는 건 좋은 재능이지요. 하지만 한 번쯤은 …아니, 꽤 여러 번 꾹 참아야 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게 바로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정을 짜는 건 분명 재미있는 일이지만, 그걸 이해해야하는 독자 입장에선 공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이참에 한 번쯤 짜놓으신 설정들을 쭉 늘어놓고 점검 하시는 편이 어떨까 합니다. 뭘 빼고 뭘 넣어야 소설의 장점이 극대화될까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