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깨졌습니다.
아니 침묵이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우린 그저 잘못된 방향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뿐입니다. 전파는 범우주 통신에 적합한 수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겐 중력파가 있습니다.
[위대한 침묵]의 첫 부분이다. 굉장한 선언같고 권위가 실려있는 듯하고 이어서 전개될 소설의 중요한 부분 같다. 하지만 이는 이혼과 함께 양육권을 남편에게 뺏긴 후 그럭저럭 살아가는, 다행성기업 인텍의 홍보부 직원인 ‘미후’가 작성한 대본의 일부이다. “미후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펜을 내려놓았다.”1 계속 읽어나갈수록 미후가 이 소설의 주요 소재인 중력파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 전문가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어서 미후는 산업스파이 색출이란 중요한 비밀 임무를 맡게 되고 차례로 의심인물들과 접촉한다. 왜 하필 자신인지 모르겠고 함정일 수도 겠지만, 어쨌든 미후에게는 이야기 속의 ‘탐정 역할’이 주어진다. 주인공인 것 같다. 주인공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미후에게 주어진 건, 처음 홍보부장의 대본을 대신 작성했던 것처럼 자기 말이 아닌 남의 말을 옮기거나 들어주는 역할일 뿐이다. 선배인 지아의 설명, 고위직인 크로포드의 설명, 연구가인 유민의 설명이 순서대로 이어진다. 여기까지 미후는 청자의 위치이며 독자가 알아야 할 중요한 설명을 연결해주는 징검다리일 뿐이다. 미후의 언어는 이야기에 개입하지 못한다. 미후에게는 입이 없다. 계속 듣기만 하고 침묵해야 하는 주인공이다.
하지만 3화 말미에 가면 변화가 일어나는데, 미후가 크로포드에게 보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미후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에서 정보를 발견하고는 입을 열어 자기 언어로 거래를 꾀한다. 말을 한다. 미후의 침묵이 깨진다. 미후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 그러자 본격적인 균열이 시작된다.
이 작품 전에 읽은 달바라기 작가의 소설은 [뱀을 위한 변명]과 [안녕, 아킬레우스] 두 편으로 다 재밌게 읽었다(후자를 더 재밌게 읽었다). 둘 다 모두 전문가인 주인공이 의외의 사건에 휘말리는 내용인데 공통적으로 아쉬웠던 부분은, 결말의 반전으로 가는 주인공의 동기랄까, 이 부분이 약하다는 점이었다. 시간여행을 하는 프로 직업인이 있을 정도라면 각종 상황에 대한 메뉴얼이 분명 있을것 같은데 주인공은 그런 메뉴얼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한 2-3년 전에 생긴 직업같은 느낌. [뱀을 위한 변명]에서는 더 위화감이 심했는데, 주인공이 하는 고민은 이 직업을 갖기 전에 이미 했거나 전문가가 된 초기에 했어야 하는 고민 아닌가? 반려동물 중성화 수술 반대파의 의견이랑 거의 유사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때문에 결말이 과잉으로 다가온다. 앞부분에 펼쳐진 이야기에 비해서 결말이 너무 크게 느껴지는 거다. 둘과 달리 [위대한 침묵]의 미후는 전문가가 아니고 소설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주인공도 아니다. 전작 두 편에 비해 캐릭터가 가진 위화감이 현저히 적어진다. 이 점이 [위대한 침묵]의 미덕이면서, 작가 개인을 놓고 봤을 때의 분명한 발전이라고 본다.
달바라기 작가의 장점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확연히 느낀부분이 외국 배경이 가져오는 어색함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단편에서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뭔가 입에 붙지 않고 겉도는 듯하고 어색한 느낌이 별로 없다.
또 하나 [위대한 침묵]의 장점은 대화가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가령 이 소설의 초반은 주인공이 스파이 색출을 위해 여러 사람과 인터뷰를 하는 구조이면서, 대사로 하드 SF의 여러가지 과학적 지식을 설명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구조이다. 굉장히 지루할 수 있는 위험성이 큰데 매끄럽게 돌파한다. 안 건너 뛰고 술술 다 읽었다. 은근히 대사가 많은 소설인데도 각 캐릭터들이 내뱉는 대사가 지루하지 않다. 또 이 부분은 소설 자체가 가진 미덕이기도 하면서 브릿G의 각주 시스템이 가진 장점 덕도 있다고 본다2.
*** 몇 가지 덧붙임
– 트위터에서 세미 하드 SF라고 홍보하시는 걸 봤는데, 세미 자를 붙여야 하는지 좀 의아했다(질문 아님). 사족같기도 하면서 글쎄….안 붙이는 게 더 낫다고 느꼈다.
– 다음 소설에서도 한 번 회차를 쪼개서 올려보시는 게 어떨까 싶다. 이전 두 소설에 비해서 위대한 침묵을 확연히 좋다고 느낀 부분에 회차 쪼개기로 호흡을 고를 수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뱀을 위한 변명이나 안녕 아킬레우스도 회차를 쪼개서 읽었다면 좀더 다른 인상을 받지 않았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