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함이 흘러넘치는 따뜻한 마음으로 작품을 임베딩합니다.
엽편이니 꼭 보고 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남자는 누군가의 명령으로 모델이 되어 화폭 앞에 섭니다.
유명한 그림이지요, 자크 루이 다비드의 훌륭한 프로파간다 <마라의 죽음>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작가님이 <마라의 죽음>에 얽힌 뒷이야기를 바탕에 얼마나 의도적으로 깔며 쓰셨는지 조금 궁금했습니다.
왜냐고요? 이 소설에서 묘사한 바에 따르면 미술 학원 선생은 참으로 멍청하기 그지없는 인간으로, 학부 미술사 시간에 D-를 받고도 간신히 졸업했을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마라의 죽음>이 어떻게 편안하고 포근한 죽음이 될 수 있습니까. 장 폴 마라는 심각한 피부병으로 욕조에 앉아 사람들을 선동하는 글을 써내려가다가 왕당파 당원이었던 젊은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여기의 어디가 편안하고 포근한 죽음입니까. 다만 그린 화가 다비드가 그것을 한껏 미화했을 뿐이지요. 선생, 당신 학생에게 기술만 가르치고 있군!
저는 참 자크 루이 다비드를 진절머리 나게 싫어하는데요. 이 사람이 권력에 충성을 바치다 못해 아주 영혼을 팔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끔찍할 정도의 무시무시한 프로파간다 생산 능력이 궁금하시다면 녹색창에 자크 루이 다비드를 쳐 보십시오. 뭐… 굳이 치지 않아도 신고전주의 양식과 이 사람은 서로 빼놓을 수 없는 결합체이기 때문에 미술사 교양 수업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강사 밑에서 안 졸고 들은 사람이라면 이 자크 루이 다비드라는 화가가 훌륭한 재능과 빛나는 실력으로 어떻게 정치적인 라인을 타고 성공가도를 달려갔는지 아실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살짝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아는 <마라의 죽음>은 이런 작품입니다.
한 정치가가 있습니다. 그는 피부병을 앓아서 욕조 생활을 했지요.
그런 그를 한 왕당파 여인이 살해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샤를로트 코르데.
여기에서 프로파간다에 특출난 재능을 지닌 화가의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갑니다. 우선 극적인 요소를 넣기 위해 배경은 꽉 막혀 있습니다. 여인은 보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마라’라는 위대한 정치가가 죽었다는 사실이니, 초점을 오로지 그곳에 맞춘 것입니다. 피부병에 걸려서 반점이 돋거나 뜯은 자국이라도 있을 피부는 창백하니 깨끗하고, 죽은 모습은 그저 살짝 눈을 감고 있는 듯 한없이 고결하고 숭고합니다. 순교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보아라! 우리의 위대한 정치가 마라가 비열한 습격으로 인해 죽었다!
그가 흘린 선혈을 보라, 그는 민중을 위해 이 피를 흘렸다!
화가는 대놓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아시다시피 다비드는 혁명 정부를 배신하고 나폴레옹에게 붙어서 대관식을 그리며 온갖 전쟁 미화를 다 하였지요.
캬! 자고로 인생 이렇게 살아야 제맛인데 말이에요. 그렇죠?
작가님이 쓴 글에서 이 그림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겠습니다.
한없이 고결하게 이상화된 죽음과 그 뒤에 숨어있는 비참하고 불편한 현실.
그리고 돈 때문에 가짜로 그렇게 이상화된 죽음을 흉내내야 하는 그 남자의 아들.
무엇을 상징하려고 하시는지 어렴풋하게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아쉬움이 큰 것입니다.
엽편 길이가 아니라면 이야기가 늘어질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야기를 보다 더 정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마라의 죽음>이라는 레퍼런스는 ‘한껏 미화되었지만 실은 외롭고 불편한 죽음’이라고만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작정하고 만들어낸 정치적 선전물입니다.
맞는 말인데 뭔가 좀 달라, 왜일까? 이것에 제가 엽편을 읽으며 느낀 첫 감상이었습니다.
아마 저와 같은 사람은 이 이야기를 읽으며 무언가 ‘일치하지 않는다’ ‘어렴풋하지만 미묘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마라의 죽음>이라는 작품이 탄생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배경이 모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모두 거세하면 남는 것은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비참한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만, 역시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배경이 너무나도 중요하니까요. 저라면 차라리 조금 덜 유명해서 분량을 잡아먹을 정도로 설명이 필요하거나 너무 많이 쓰여서 이제는 식상한 그림이더라도 다른 그림을 가져다 썼을 것입니다.
여담을 덧붙이자면, 아그책 작가님의 작품은 가끔 지나치게 개인의 문제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그게 나쁘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사람이 사회를 외치고 구조를 외치고 좋지요…. 그런데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버리면 우리는 균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문학이 사회를 위해 반드시 기여해야 한다는 말을 요만큼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록 문학만 문학이라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문학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정말 힘든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의 길을 견지하는 분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보여요.
나는 고귀한 일을 하고 있다!
고로 나는 고귀하다!!
윽.
하지만 그 반대라고 해서 크게 다릅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세상을 외면하고 개인의 내면에만 치중하는 글이 꼭 좋기만 할까요?
<포근한 죽음>은 아그책 작가님의 개인 중심적, 내면 중심적인 경향이 매우 잘 드러난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와 병원 빚이라는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욕조라는 공간 때문일까요? 저에게는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세상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굉장히 추상적인 관념으로 자리잡았을 뿐입니다.
저의 솔직한 심정이 이렇네요: 아니, 아그책 작가님 왜 이러세요! 작가님은 지금보다 더 잘 쓸 수 있잖아요! 저 현기증난단 말이에요!
작가님을 비난하기 위해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작가님의 시야가 보다 넓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극단은 좋지 않고, 사람은 교류를 통해 성장하며, 어떤 종류의 이야기는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더 효과적일 수 있으니까요.
언제나 응원합니다.
응원하겠습니다.
리뷰 내용이 고작 이런 것이 되어서 혹시 저 때문에 소설을 쓰는 기운이 꺾이진 않으실지,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 리뷰 댓글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