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실험소설에 가까운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어느 소녀의 하루 1999 (작가: 니그라토, 작품정보)
리뷰어: bard, 18년 7월, 조회 124

*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 작품을 다 읽었을 때, 제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이랬습니다.

“맙소사. 이게 뭐지?”

그러자 눈에 들어온 마지막 문장이 돌연 의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 8월 27일 씀” 그렇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으로 유명한 세기말입니다. 연도의 숫자가 99에서 00으로 바뀌면서 모든 컴퓨터가 동작을 멈추거나, 이상하게 동작할 것이라고 모두가 걱정하였던 Y2K 문제가 있었고, 그 밖에도 휴거 소동이니 뭐니 하면서 전 세계가 들썩거렸습니다. 쓰나미로 인해 원자력 발전소가 터지고 중동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2018년의 시점에서 보자면 정말 평화로웠던 시대구나 싶지만, 당시만 해도 세기말이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들을 절대적인 절망의 매혹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고 이 단편을 읽게 되면, 마치 하버드 대학에서 토마스 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읽다가 창문 밖을 내다보았을 때 모든 자연이 자연학에 쓰인 말대로 다시 조립되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문장들의 연결이 돌연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다시 축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족 간 성관계(근친상간), “살해가 사망의 제1요인이던 시대를 향해 여행”, 그리고 “고위 관리로부터 핸드폰”으로 건 최면 해제의 주문까지, 이 모든 요소들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예람이 스쿠터를 타다가 트럭에 치여 사망하더라도, 세기말이라는 배경을 생각하면 모든 내용을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니그라토 씨의 팬이라면 잘 알겠지만 작가님이 약 20년간 전혀 스탠스를 바꾸지 않고 글을 써 왔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래의 구절을 보세요.

“만으로 열여섯. 시대, 공간, 상황에 따라 공식적으로조차 너무나 대접이 다른 나이. 원시 시대였다면 어머니가 되었을 것이고, 로마 제국의 귀족이었다면 외롭지만 당당한 안주인이었겠지. 조선 후기였다면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당당함은 어떤 계층이었더라도 얻기 어려웠겠지만.”

말 그대로입니다. 작가님은 언제나 세계사에 내던져진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설령 그게 미래 사회의 우주일지라도, 관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당당한 주인공이 있고, 주인공이 겪는 시련은 어느 경우에서는 부자들의 음모였다가, 다른 경우에서는 죽고 죽이는 야만적인 문명 탓입니다. 제가 니그라토 씨의 단편을 가끔씩 찾아서 읽는 이유는 바로, 그가 전혀 변하지 않고 뭔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듀나의 말을 빌리자면, “니그라토님의 미래 문명은 참 진취적이고 긍정적이에요. 이렇게 씩씩한 세계를 살면서 왜 불평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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