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뜨거운 동토>가 대하 드라마나 비디오 게임이 된다면?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뜨거운 동토 (작가: 샐러맨더, 작품정보)
리뷰어: OneTiger, 18년 7월, 조회 164

여기 브릿G에는 다양한 소설 비평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소설을 비평하는 행위가 무엇을 뜻할까요. 소설을 감상할 때, 우리가 무엇에 주목해야 할까요. 흔히 사람들은 소설 비평이 사건 전개나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분석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비평할 때, 우리는 왜 브론스키가 안나를 따르는지 이야기하거나, 안나가 너무 무분별하다고 나무라거나, 상류층 귀족 사회가 기만적이고 위선적이라고 질타합니다. <안나 카레니나>를 비평하는 여러 소감문들은 그런 분석들을 내놓습니다. 이런 것들은 소설을 분석하는 주된 방법들 중 하나입니다. 저 역시 이런 방법을 이용해 소설들을 감상하고요. 하지만 이게 소설을 분석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일까요. 사건 전개나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소설이 드러내는 유일한 특징이 아닙니다. 소설 이외에 다양한 문화 매체들, 만화, 연극, 애니메이션, 영화, 비디오 게임 역시 사건 전개나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포함합니다. 독자들은 소피 마르소가 주연한 <안나 카레니나>를 관람하고, (소설을 비평하는 것처럼) 브론스키를 이야기하고, 안나를 나무라고, 상류층 귀족 사회를 질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는 똑같은 문화 매체가 아닙니다.

 

소설을 비평하는 행위와 영화를 비평하는 행위는 서로 달라야 할 겁니다. 소설 비평과 영화 비평이 똑같다면, 소설과 영화가 따로 존재할 이유는 없겠죠. 영화 <안나 카레니나>를 비평할 때, 우리는 소피 마르소의 표정이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거나, 숀 빈이 근사한 제복을 뽐낸다거나, 영화 제작진이 19세기 의상이나 옷차림을 제대로 재현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영화가 드러내는 고유한 특징입니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절대 그런 요소들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레프 톨스토이가 천재적인 작가라고 해도, 소설은 배우의 발성이나 배우의 행동거지나 의상 세트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이렇게 영화에게는 영화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처럼 소설에는 소설만의 특징이 있을 겁니다. 소설에는 영화가 따라가지 못하는 고유한 특징이 있을 겁니다. (영화를 비롯해) 여타 문화 매체들과 다른 소설만의 고유한 특징이 뭘까요? 이야기? 하지만 다른 문화 매체들 역시 이야기를 포함합니다. 심지어 게임 플레이어가 선택할 때마다, <폴아웃> 같은 롤플레잉 게임은 서로 다른 곁가지들을 뻗습니다. <폴아웃>을 플레이할 때마다, 게임 플레이어는 완전히 다른 결말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이는 비선형적 게임 플레이라고 불립니다.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작가가 제시하는 선형적인 사건 전개를 일방적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폴아웃> 같은 비디오 게임은 훨씬 입체적이고 비선형적인 사건 전개를 보여줍니다. 소설은 이런 비선형적인 사건 전개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어떤 소설들은 비선형적인 사건 전개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여기 브릿G에도 그런 소설들이 있을 겁니다. 유권조 작가가 쓴 여러 소설들은 주석을 이용한 다중 결말을 유도하거나 (일방적이지 않은) 쌍방향 소통을 유도합니다. 하지만 이런 창작 방법은 다소 실험적입니다. 만약 브릿G가 인터넷 소설 플랫폼이 아니었다면, 유권조 작가는 이런 실험을 시도하지 못했겠죠. 소설 창작 세계에서 이런 다중 결말이나 쌍방향 소통은 주된 흐름이 아닙니다. 반면, 비디오 게임 세계에서 비선형적인 게임 플레이는 주된 흐름이죠. 따라서 이야기 그 자체는 소설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닙니다. 어쩌면 소설은 다른 문화 매체들보다 폐쇄적인 이야기 구조를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연극 <피터 팬>에서 아이들은 피터 팬에게 “저는 요정을 믿어요!”라고 외치곤 합니다. 관객들은 연극의 사건 전개에 직접 참가할 수 있습니다. 연극은 이런 쌍방향 전개를 보여주나, 소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야기가 고유한 특징이 아니라면, 소설이 어떤 고유한 특징을 지녔을까요.

 

그건 텍스트일 겁니다. 소설은 텍스트 매체입니다. 만화, 연극, 애니메이션, 영화, 비디오 게임과 달리, 소설은 텍스트를 자유자재로 활용합니다. 그래픽 노블이나 비디오 게임 역시 텍스트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웨이스트랜드 2> 같은 게임은 <전쟁과 평화>에 육박하는 텍스트 분량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래픽 노블이나 비디오 게임에서 텍스트는 여러 구성 요소들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반면, 소설에서 텍스트는 소설을 이루는 주된 구성 요소입니다. 소설은 텍스트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고, 다른 문화 매체들은 이런 방법을 모방하지 못합니다. 소설 <백경>은 그런 활용을 아주 잘 드러냅니다. <백경>에서 독자들은 숱한 철학 담론들과 사상 풀이들과 생태 설명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소설 곳곳에서 허먼 멜빌은 칸트 철학을 언급하거나, 하얀 색깔이 감성에 미치는 영향을 설교하거나, 어떻게 고래들을 분류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그 덕분에 여러 평론가들은 <백경>이 짜증나는 소설이라고 비판합니다.) 만화나 영화나 비디오 게임이 이런 철학, 사상, 과학을 논의할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래픽 노블이나 영화나 비디오 게임은 이런 방법을 모방하지 못합니다. 텍스트가 아니라 그림체나 동영상이나 배경 음악이 주된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죠.

 

텍스트는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풀어놓을 수 있습니다. 텍스트는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개념을 정리하고 논증할 수 있습니다. 변증법 철학을 음악이나 그림으로 해설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렇지 못할 겁니다. 음악이나 그림은 변증법 철학을 비유할 수 있으나, 그걸 직접 해설하지 못하죠. 따라서 사변적인 개념을 풀어놓기 원할 때, 길다란 연대기를 정리하기 원할 때, 추상적인 사상을 논의하기 원할 때, 소설은 창작가에게 효율적인 예술 매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아울러 텍스트 매체로서 소설은 텍스트라는 기록물들을 쉽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그런 텍스트를 이야기할 겁니다. <뜨거운 동토> 같은 소설을 볼까요. <백경>에서 허먼 멜빌이 온갖 고래 기록들을 늘어놓는 것처럼, <뜨거운 동토>는 여러 기록들을 활용합니다. ‘제1혁명 17화’에서 독자들은 <수오미 인민의 선언>을 볼 수 있습니다. <뜨거운 동토>는 <수오미 인민의 선언>을 소설 속에 그대로 집어넣었습니다. 독자들은 그저 <선언>이 무슨 내용인지 읽는 것을 넘어 핀란드 사민당이 작성한 서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핀란드 사민당이 문단들을 구분했는지, 어떻게 내용들을 배치했는지, 어떻게 날짜들과 목차들을 집어넣었는지, 독자들은 볼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는 이런 방법을 쉽게 소화하지 못할 겁니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의 주된 구성 요소가 동영상이기 때문입니다.

 

텍스트 매체로서 <뜨거운 동토>는 역사적인 텍스트를 날것으로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이런 기록물을 볼 때, 독자들은 역사 속의 한 순간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제작사가 <뜨거운 동토>를 TV 대하 드라마로 만들었다고 가정하죠. 그런 대하 드라마가 이런 기록물을 자세히 보여줄 수 있을까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 우리는 여러 시대극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진짜 역사를 기록한 시대극들이 있고, <왕좌의 게임> 같은 가상의 시대극들 역시 있습니다. 그런 시대극들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런 시대극들이 텍스트 기록들을 자세히 취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설사 TV 드라마가 텍스트 기록을 자세히 취급한다고 해도, 텍스트 기록이 미치는 영향력은 달라질 겁니다. 드라마를 볼 때, 시청자들은 배우의 연기, 배경 음악이나 음향 효과, 무대 세트 같은 요소들에 집중합니다. TV 드라마를 볼 때, 시청자들은 텍스트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TV 드라마 제작진이 텍스트를 강조하고 싶다고 해도, 그건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할 겁니다. <뜨거운 동토>가 TV 대하 드라마가 된다고 해도,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헬싱키 (2) 5화’에는 잡지 <팔벨리야타르 레흐티>의 1905년 10월호의 일부가 나옵니다. 그 부분은 가사 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고발합니다. TV 드라마는 이런 부분을 강조하지 못할 겁니다. 카메라가 잡지 <팔벨리야타르 레흐티>를 조명한다고 해도, 시청자들은 잡지 텍스트에 집중하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시청자들이 카메라를 통해 텍스트를 읽기 때문입니다. 시청자들은 텍스트를 그 자체로서 읽지 못하고, 카메라를 통해 읽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영상물들은 장문의 텍스트를 보여주는 방법을 우회하거나 회피합니다. 만약 어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가 자꾸 텍스트들을 들이댄다면, 시청자들은 짜증난다고 반응할 겁니다. 반면, 소설 <뜨거운 동토>에서 독자들은 날것으로 잡지 텍스트를 읽습니다. 소설 그 자체가 텍스트이기 때문에 작가는 얼마든지 날것으로 텍스트 기록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드라마 <사마의2: 최후의 승자>에는 <출사표>가 나옵니다. <출사표>는 제갈 공명이 작성한 문서들 중 명문으로서 유명합니다. 당연히 <사마의2: 최후의 승자> 역시 <출사표> 장면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출사표>라는 텍스트 자체에 주목하지 못합니다. 이 드라마는 <출사표>를 보여주는 동시에 다양한 동영상들을 동원하고 배경 음악을 집어넣습니다. 이런 동영상들과 배경 음악 없이 <출사표> 장면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텍스트가 그저 TV 드라마를 구성하는 일부 요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읽을 때, 우리는 원문 날것으로 <출사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역사를 좀 더 재미있고 생생하게 꾸미기 위해 소설 작가인 나관중은 원문을 날것으로 집어넣었을 겁니다. 왜 드라마가 이런 명문에 구태여 동영상들과 배경 음악을 덧붙여야 할까요? 왜 드라마를 볼 때, 우리가 <출사표> 텍스트 그 자체에 집중하지 못할까요? 만약 <사마의2: 최후의 승자>가 그냥 <출사표> 텍스트만 덜렁 내놨다면, 그건 아주 썰렁한 장면이 되었을 겁니다. 텍스트가 그저 TV 드라마를 구성하는 일부 요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소설과 드라마에서 텍스트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습니다. TV 드라마가 텍스트를 늘어놓는다고 해도, 시청자들은 텍스트 그 자체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뜨거운 동토>의 ‘헬싱키 (2) 5화’에서 작가 샐러맨더는 가사 노동자가 처한 상황을 직접 서술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다른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빌리지 않습니다. 작가는 잡지 <팔벨리야타르 레흐티>를 날것으로 집어넣습니다. 작가는 시대의 목소리를 날것으로 집어넣고, 독자들은 시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시대의 현장으로 훨씬 생생하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팔벨리야타르 레흐티>는 1905년 핀란드의 고달픈 노동자들이 읽은 잡지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텍스트를 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고달픈 민중 계급에게 밀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잡지를 읽고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키르시가 잡지 내용에 공감하는 것처럼, 1905년 핀란드 민중 계급 역시 잡지에 공감하고 안타까워했을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들과 함께 만날 수 있습니다. 역사 소설로서 이는 중요한 특징일 겁니다. 하지만 어쩌면 <팔벨리야타르 레흐티>라는 잡지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는 작가 샐러맨더가 만든 가상의 잡지일지 모릅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온갖 기록물들은 그저 작가의 허구일지 모릅니다. <팔벨리야타르 레흐티>가 정말 존재하는 잡지일까요? (요즘은 정보화 시대죠. 다들 한 번 검색해보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팔벨리야타르 레흐티>가 허구적인 잡지라고 해도, 여전히 이런 창작 방법에는 가치가 있을 겁니다. 만약 신문 기사, 일기, 편지, 전보 같은 기록물들로 소설 전체를 채운다면, 작가는 서간 소설을 쓸 수 있겠죠. 브람 스토커가 쓴 <드라큐라>는 서간 소설입니다. 아무리 프란시스 코폴라가 뛰어난 감독이라고 해도, 영화 <드라큐라>는 소설 <드라큐라>가 선보이는 편지, 기사, 일기의 생생함을 전달하지 못합니다. 이는 그저 내용에 따른 차이가 아닙니다. 이는 형식과 구조에 따른 차이입니다. 흡혈귀를 목격한 신문 기사는 허구입니다. 드라큐라는 허구입니다. (흡혈귀가 정말 존재한다고요? 아, 납량 특집입니까?) 하지만 <드라큐라>에서 신문 기사라는 텍스트는 그 자체로서 생생한 현장감을 들려줍니다. <뜨거운 동토>에 나오는 온갖 기록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설사 그것들이 그저 가짜에 불과하다고 해도, <아이슬란디아> 같은 소설처럼 <뜨거운 동토>가 가상의 나라 핀란드리아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기록물들을 전시하는 창작 기법은 생생한 현장감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텍스트는 그런 역할을 맡습니다. 게다가 <팔벨리야타르 레흐티>가 진짜라면, 역사 소설로서 독자들은 무산자 민중 계급을 외치는 시대의 뜨거운 목소리와 만날 수 있겠죠.

 

어쩌면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비디오 게임들 역시 여러 기록물들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네버윈터 나이츠> 같은 비디오 게임은 숱한 책들, 서류들, 편지들, 기록물들을 보여줍니다. 그것들을 읽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상당한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하지만 <네버윈터 나이츠>가 숱한 역사책들을 내놓는다고 해도, 그것들은 핵심적인 게임 플레이가 아닙니다. 솔직히 그것들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얼마든지 고대 파충류 종족과 싸우고 게임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포가튼 렐름에서 드루이드들이 루루에를 섬기든 말든, 타임 트러블이 심각하든 말든, 나세르가 무슨 모험을 겪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보조적인 역할입니다. 심지어 게임 플레이어들은 중요한 문서들을 마우스 좌클릭, 좌클릭, 좌클릭, 좌클릭으로 넘기곤 해요. 옛날 롤플레잉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텍스트 속에서 단서를 찾아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게임들은 느낌표를 띄우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게임을 구경해보시기 바랍니다.) 게임에서 텍스트는 그런 역할을 맡습니다.

 

하지만 <뜨거운 동토> 같은 소설에서 여러 기록물들은 보조적인 구성 요소가 아닙니다. 소설은 텍스트이고, 소설을 즐긴다는 행위는 텍스트를 읽는다는 행위입니다. 온갖 기록물들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뜨거운 동토>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소설과 기록물들 모두 텍스트이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행위는 기록물을 읽는 행위로 쉽게 전환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은 다릅니다. 우리는 비디오 게임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합니다. 반면, 우리는 소설을 플레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설을 읽습니다. 그래서 소설 속의 기록물들은 훨씬 커다란 영향력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게임 제작진이 <뜨거운 동토>를 역사 롤플레잉 게임으로 만든다고 가정하죠. 비디오 게임 <뜨거운 동토> 역시 교서나 강령이나 잡지나 신문 기사나 전보를 보여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기록물들이 전달하는 영향력은 소설과 다를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캐릭터나 유닛을 조종하거나 전투력이나 자원 비용을 계산합니다. 핵심적인 게임 플레이는 그런 것입니다.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보조적이고, 게임 플레이와 텍스트 읽기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습니다. 소설에서 그런 간격은 훨씬 좁습니다. 그래서 소설 <뜨거운 동토>는 게임 <뜨거운 동토>보다 훨씬 감동적일 겁니다.

 

우리는 그래픽 노블에도 이와 비슷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매체는 꽤나 모호한 범주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래픽 노블인지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합니다. 솔직히 그래픽 노블은 만화 판매를 위한 판촉 행위에 가까울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무엇이 그래픽 노블인지 대략적으로 감을 잡을 수 있어요. 어떤 만화 독자는 그래픽 노블에 엄청나게 많은 텍스트들이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그래픽 노블에서 그림체는 텍스트보다 우선합니다. 그래픽 노블을 읽을 때, 우리는 텍스트보다 그림체를 우선시합니다. 아무리 텍스트를 방대하게 갖춘다고 해도, 그래픽 노블은 만화에서 파생했고, 만화는 그림체를 중시하는 매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프랑스의 고대 라스코 동굴 벽화와 21세기 그래픽 노블은 별로 다르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그림이죠. 따라서 똑같이 텍스트를 활용한다고 해도, 소설과 그래픽 노블에서 텍스트는 완전히 다른 영향력을 행사할 겁니다. 어떤 만화가가 <뜨거운 동토>를 그래픽 노블로 그린다고 해도, 그래픽 노블 속에서 텍스트는 다른 역할을 맡을 겁니다. 만화가가 어떤 단어를 골랐는지, 어떻게 문단을 나눴는지, 얼마나 서술 문구를 축약했는지, 독자들은 따지지 않을 겁니다. 독자들은 컷 분할, 말 풍선의 위치와 크기, 스크린톤, 무엇보다 그림체를 따질 겁니다.

 

역사 소설로서 <뜨거운 동토>는 텍스트를 자유롭게 활용하고, 텍스트에서 감동을 이끌어냅니다. 이는 소설이 만화나 영화나 비디오 게임보다 낫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소설을 다른 매체들보다 좋아할 테고, 누군가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 게임을 소설보다 좋아할 겁니다. 그건 개인의 취향이고, 개인의 취향에 우열은 없습니다. 저는 소설이 다른 매체들보다 낫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소설이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 게임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런 차이를 분석하고 싶다면, 우리는 소설이 드러내는 고유한 특징인 텍스트에 주목해야 할 겁니다. 텍스트에는 여러 용도들이 있고, 그것들 중 하나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록물을 전시하는 행위입니다. 독자들은 소설을 읽는 동시에 기록물을 읽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기록물은 그 자체로서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글을 읽는다는 관점에서 텍스트들은 서로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단점 역시 있습니다. <뜨거운 동토>의 ‘제1혁명 17화’에서 사회민주당이 <수오미 인민의 선언>을 발표했을 때, 파업 노동자들은 핀란드어로 노동 가요 <인터내셔널>을 부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 노래를 듣지 못합니다.

 

소설은 텍스트 매체이고, 음악을 집어넣지 못합니다. 독자들은 핀란드어로 된 <인터내셔널>을 읽을 수 있으나, 그게 무슨 곡조인지 듣지 못합니다. <뜨거운 동토>를 읽는 어떤 독자들은 <인터내셔널>이 무슨 노래인지 들어본 적이 없을지 모릅니다. ‘제1혁명 17화’의 말미에서 작가 샐러맨더는 핀란드어 <인터내셔널> 동영상을 링크했습니다. <인터내셔널>이 무슨 노래인지 궁금하다면, 독자들은 그 동영상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소설 외부 요소입니다. 동영상 링크는 소설의 외부 요소입니다.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이나 <박열>에서 관객들은 노동자 병사들이나 무정부주의 독립 운동가들이 <인터내셔널>을 부르는 광경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어요. 종합 예술 매체로서 영화는 동영상과 연기, 음악 등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죠. 하지만 <뜨거운 동토>에서 작가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소설은 텍스트를 생생하게 이용할 수 있으나, 텍스트를 넘어가는 다른 요소들을 구현하지 못합니다. 누군가는 종합 예술 매체로서 영화를 좋아할 테고, 누군가는 텍스트가 전달하는 감성을 좋아할 겁니다. 그렇게 취향은 갈립니다. 저는 그런 것을 논의하고 싶습니다. (다시 강조한다면, 이 글은 만화나 영화나 비디오 게임을 무시하는 글이 아닙니다.)

 

위에서 저는 주로 역사 기록물들을 이용해 썰을 풀었습니다. (작가가 이런 역사 기록물들을 왕창 집어넣는다면, 몇 화를 날로 때울 수 있겠군요, 하하.) 하지만 소설 텍스트에는 다른 다양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역사 소설로서 <뜨거운 동토>는 역사적인 상황을 자주 설명합니다. ‘헬싱키 10화’는 군대가 노동자들에게 발포한 사건이나 폭탄 테러 행위를 설명합니다. 비단 여기만 아니라 소설 곳곳에서 독자들은 수많은 상황 설명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만약 작가가 훨씬 기나긴 연대기를 설명해야 한다면, 텍스트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될 겁니다. 역사, 연대기는 두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흐름입니다. 역사는 특정한 몇몇 장면이나 행위가 아니라 총체적인 흐름입니다. 물론 우리는 몇몇 장면이나 행위를 이용해 역사적인 전개를 함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함축은 자세한 상황을 풀어놓지 못합니다. 비가시적인 흐름을 구체적으로 풀어놓고 싶다면, 작가는 텍스트를 이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작가가 연대기들을 정리하거나 설명할 때, 소설은 유용한 예술 매체가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소설은 만화나 영화나 비디오 게임보다 훨씬 낫습니다.

 

영화 같은 종합 예술 매체 역시 연대기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대극들에는 으레 해설자가 있고, 해설자는 역사적인 상황을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설명합니다. 가상의 시대극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드리엘이 중간계 제3시대 역사를 설명하는 장면으로서 영화 <반지원정대>는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런 종합 예술 매체는 텍스트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런 설명은 꽤나 짧습니다. 소설 <반지원정대>와 영화 <반지원정대>에서 두 엘론드 회의 장면은 서로 다릅니다. 소설은 훨씬 많은 설명들을 늘어놓습니다. 영화 감독이 원한다면, 감독은 엘론드 회의 장면에 엄청난 설명들을 퍼부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영화는 짜증나는 영화가 될 겁니다. 관객들은 다량의 텍스트를 원하지 않아요. 게다가 영화는 실시간입니다. 길다란 대사가 후딱 지나간다면, 관객들은 그걸 따라잡지 못할지 모릅니다. (“젠장, 방금 전에 간달프가 골렘이라고 말한 거야, 골룸이라고 말한 거야? 여기에는 무슨 골렘이 나오지? 진흙 골렘?”) 영화는 관객들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영화는 엔딩 크레딧을 향해 줄기차게 달립니다.

 

반면, 소설은 실시간이 아닙니다. 소설은 우리를 기다려줍니다. <뜨거운 동토>의 ‘헬싱키 7화’는 핀란드의 선거권 보유자 비율을 보여줍니다. 농촌에서 선거권 보유자의 비율이 몇 %죠? 네, 4.3%입니다. 독자들은 그걸 몇 번이고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영화는 즉흥적입니다. 영화와 달리, 소설은 우리를 기다려줍니다. 그 덕분에 이런 장면을 읽을 때, 잠시 우리는 독서를 멈추고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와, 투표권 비율이 고작 4%라고? 총파업 노동자들이 정말 열심히 투쟁했구나. 그렇게 우리는 노동자들이 격렬하게 투쟁하는 시대를 살아가는구나.” 이렇게 소설에는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만화나 비디오 게임 역시 실시간 매체가 아니고, 만화 독자들과 게임 플레이어들 역시 생각을 가다듬을 여유를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생각’이라는 것은 추상적입니다. 따라서 <백경>에서 허먼 멜빌이 온갖 철학들과 사상들을 쏟아부은 것처럼, ‘생각’을 자극하고 유도하고 정리하고 싶다면, 창작가는 텍스트를 이용해야 할 겁니다. <뜨거운 동토>는 핀란드의 사회 민주주의 정당을 보여주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다양한 혁명 노선들을 소개합니다. <뜨거운 동토>는 아직 그런 혁명 노선들을 구체적으로 풀어놓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소설은 계속 그럴지 모릅니다.

 

하지만 작가가 그걸 원한다면, 사상이나 철학이나 혁명 노선을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소설 <붉은 화성>은 화성에서 과학자들이 새로운 문명을 개척하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과학자들은 어떻게 인류 문명이 흘러왔는지 열정적으로 논의합니다. 지구처럼 새로운 화성 문명이 자본주의에 얽매여야 할까요? 왜 화성 문명이 구태여 자본주의에 얽매여야 할까요?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을 부르고, 지구 생태계를 망치고, 그래서 과학자들은 화성 문명을 개척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화성 문명이 자본주의에 말려들어가야 하나요? <뜨거운 동토>에서도 작가는 이런 것들을 충분히 물어볼 수 있습니다. 비참한 노동자 민중의 생활상 역시 자본주의에서 비롯한 결과입니다. 흔히 우리는 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가들이 임금을 주지 않거나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마구 해고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본가의 개인적인 도덕을 탓할지 몰라도, 자본주의라는 사회 구조를 의심하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왜 자본가가 자본가이고, 노동자가 노동자일까요? 왜 자본가에게 그런 막대한 힘이 있을까요? 왜 자본가가 부자일까요? 자본가들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흔히 다들 그렇게 생각하나, 그건 현실을 왜곡하는 주장입니다.

 

<뜨거운 동토>가 보여주는 것처럼,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시대에 아동 노동, 성 착취, 시위대 학살, 불결한 위생 환경은 예사였습니다. 공장에서 아이들이 손가락을 잘리고 피를 철철 흘린다고 해도, 자본가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걸 항의할 때, 자본가들은 시장에 개입하지 말라고 주장했습니다. (시장에 개입하지 말라. 이는 어디에서 많이 듣던 소리입니다.) 파업 노동자들이 열심히 투쟁했기 때문에 아동 노동 같은 악습은 사라졌죠. 자본가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착취합니다. 착취 때문에 그들은 부자가 됩니다. 이는 몇몇 자본가의 악행이 아니라 자본주의 전체에 만연한 비극입니다. <뜨거운 동토>는 그런 비극들을 본격적으로 조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 곳곳에서 독자들은 그런 장면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뜨거운 동토>가 묘사하는 상황들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양쪽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양쪽은 똑같은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뜨거운 동토>에서 공장이 아이들을 착취하는 것처럼, 현실 속에서 비정규 노동자들은 착취를 당하고 심지어 죽음을 당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본주의에 매달린다면, 그건 우리 스스로 임금 노예가 되는 지름길일 겁니다. <뜨거운 동토>는 그런 내용을 아직 자세하게 다루지 않으나, 20세기 초반의 자본주의와 핀란드 사민당을 이야기합니다. 볼셰비키 전위 정당 역시 살짝 고개를 내미는군요. <뜨거운 동토>는 자본주의를 타파하는 내용을 논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1917년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대안 사회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건 이상한 일이겠죠. 물론 <뜨거운 동토>는 그런 내용을 비껴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용보다 텍스트라는 형식입니다. 만약 이런 내용을 논의한다면, 창작가에게 어떤 매체가 필요할까요? 철학적인 내용을 탐구하고 정리하고 풀어야 한다면, 작가에게 어떤 매체가 필요할까요? 저는 텍스트가 무엇보다 효과적인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사변, 연대기, 철학, 사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을 때, 텍스트는 작가에게 가장 좋은 수단이 될 겁니다. 소설은 그 어떤 매체들보다 풍부한 사상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장 폴 사르트르가 쓴 <구토> 같은 소설은 아예 소설이 아니라 사상 서적에 가깝죠. 작가가 원한다면, <뜨거운 동토> 역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구토>가 사상 서적이 된다면, 소설과 철학 서적의 차이가 뭘까요? <조크 I (Zork I)> 같은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과 소설의 차이가 뭘까요? 만약 <뜨거운 동토>가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이 된다면, 어떻게 소설 <뜨거운 동토>와 게임 <뜨거운 동토>가 달라질까요? 저는 이런 물음들을 밑도 끝도 없이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저는 다소 장황하게 소설 <뜨거운 동토>를 여러 만화, 애니메이션, 연극, 영화, 비디오 게임과 비교했습니다. 어쩌면 저는 너무 산만하게 이런저런 사례들을 갖다 붙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산만하게 갖다 붙인 이유는 소설 속에서 텍스트가 무슨 역할을 맡는지 제가 비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저는 특정한 결론을 맺지 않겠습니다. 저는 <뜨거운 동토>를 읽을 때, 독자들이 텍스트라는 형식에 한 번쯤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수오미 인민의 선언>이 무산자 민중 계급을 외치는 장면, 키르시가 잡지를 읽고 슬퍼하는 장면, 시민들이 사민당을 빨갱이라고 모욕(생각)하는 장면 등은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특징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소설 속에서 그저 텍스트가 맡은 일부 역할에 불과할 겁니다. 어떻게 작가가 텍스트라는 도구를 활용할 수 있는지 저는 더 길게 논의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논의를 더 늘린다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군요. 언젠가 나중에… 삘(?)을 좀 받는다면, 이런 썰을 다시 풀어놓을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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