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사회민주당으로 가는 소속감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뜨거운 동토 (작가: 샐러맨더, 작품정보)
리뷰어: OneTiger, 18년 7월, 조회 144

연대.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 단어가 따스하다고 느낄 겁니다. 가혹하고 험난한 상황에서 연대라는 두 글자는 따스한 모닥불 같습니다. 현대 인류 문명이 파편적인 지옥으로 다가갈수록 많은 사람들은 연대라는 두 글자를 외칩니다. 연대가 널리 퍼지는 이유는 그렇게 인생살이가 힘들다는 반증일지 모르죠. 그래서 암울하고 어려운 상황을 묘사하는 창작물들은 이런 연대 의식을 강조하곤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혼자 연대하지 못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손을 잡을 때, 마침내 연대라는 단어는 온기를 퍼뜨릴 수 있습니다. 연대는 여러 사람들을 상정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모인다면, 그들은 특정한 단체나 집단을 이룰 수 있겠죠. 단체나 집단에 속한 사람은 그 단체나 집단에게서 소속감을 느낄 겁니다. 그건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이 그들에게 기댈 수 있다는 안정감이죠. 따라서 연대라는 단어는 소속감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연대는 소속감보다 평등을 강조하는 단어이나, 실과 바늘처럼 연대와 소속감은 잘 어울리는 짝꿍이 될 수 있어요. 만약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과 연대한다면, 그들은 함께 뭉쳐야 할 테고, 자연스럽게 다들 소속감을 느낄 겁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이런 정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따라서 공동체에서 인간은 소속감과 안정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진화 심리학자들은 인간에게 공동체 소속 본능이 있다고 말합니다. 호랑이 같은 동물과 달리, 생존하기 위해 인류는 집단을 이뤘습니다. 호랑이는 혼자 사냥하고 혼자 생존할 수 있으나, 인류는 집단을 이뤄야 했고, 그래서 공동체에 속하고 싶다는 본능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이론이 정말 옳은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공동체들에 속하고, 그런 공동체들에서 어떤 연대 의식과 안정과 행복을 느낍니다. 어렵고 힘들 때, 우리는 공동체에 기대고 위안을 받을 수 있어요.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소속감을 한 번쯤 느꼈을 겁니다. 거대한 국가부터 온라인 게임 친목 길드까지, 이 세상에는 수많은 공동체들이 존재하고, 다양한 소속감들이 존재합니다. 때때로 이런 소속감은 삐뚤어진 애국심 같은 부정적인 측면으로 나타날 수 있어요. 삐뚤어진 애국심은 인종 차별 같은 심각한 문제를 부를 수 있고요. 그렇다고 해도 일반적으로 연대나 소속감은 긍정적인 어감을 풍깁니다.

 

종종 소설 작가들은 이런 소속감을 중요하게 묘사합니다. 특히, 소설들이 특정한 단체나 집단을 묘사하고 싶다면, 이런 소속감은 소설을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외롭고 힘든 소설 주인공에게는 기댈 곳이 없을 테고, 이런 주인공이 어떤 단체나 집단에 들어간다면, 주인공은 안정과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친구 하나 없는 사람이 수많은 우호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그 사람은 꽤나 든든하다고 느끼겠죠. 그런 안정과 행복은 특정한 단체나 집단을 멋지게 꾸미는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소설 작가는 그런 디딤돌을 이용해 단체나 집단의 내부를 파고드는 길을 열 수 있겠죠. 특히, 소설 주인공이 고아라면, 작가는 소설 주인공이 느끼는 외로움을 더욱 사무치게 강조할 수 있을 테고, 어떤 집단에 속했다는 소속감을 강하게 드러낼 수 있겠죠.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고전적인 사례가 증명하는 것처럼, 고아는 힘들고 외로운 삶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수단입니다. 그런 힘들고 외로운 등장인물이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다면, 소설 곳곳에서 작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충만하게 집어넣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독자의 시선을 잡아당길 테고, 독자는 안정을 느끼는 주인공과 함께 단체나 집단의 내부로 진입할 수 있겠죠.

 

주류 문학부터 SF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까지, 다양한 소설들에서 우리는 이런 묘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앤 롤링이 쓴 <해리 포터> 시리즈는 아주 전형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해리 포터>는 외로운 소설 주인공이 특정 집단에 들어가고 안정을 느끼는 전형적인 과정입니다. 우선 해리 포터는 고아입니다. 게다가 해리는 친척에게 빌붙는 입장이고, 엄청나게 구박을 받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짜잔~♪ 해리는 호그와트(의 그리핀도르)라는 화려하고 환상적인 집단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호르와트 역시 무시무시한 위험과 음모를 간직한 장소이나, 해리는 자신을 도와주는 수많은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동지들을 만납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서두에서 해리가 구박을 받는 장면들을 자주 보여주고, 이런 장면들은 호그와트 입성 장면과 커다란 대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독자는 호그와트를 좀 더 이상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죠. 마가렛 앳우드가 쓴 <홍수>는 어떨까요. <홍수>에는 신의 정원사들이라는 생태 종교 집단이 등장합니다. <홍수>는 어떻게 신의 정원사들이 살아가는지 열심히 묘사하나, 소설 주인공은 정원사 일원이 아니라 외부인 토비입니다. 토비 역시 고아죠. 토비는 비단 고아일 뿐만 아니라 끔찍한 자본주의 디스토피아 속의 약자입니다. 덕분에 신의 정원사들이 토비를 구해주고 잠자리와 일터와 우정을 제공할 때, 마가렛 앳우드는 독자의 시선을 좀 더 제대로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종종 작가는 이런 소속감을 거꾸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브게니 자먀찐이 쓴 <우리들>에서 소설 주인공은 고아와 비슷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진짜 생물학적인 고아가 아니나, 획일화된 사회를 혼자 거부하는 등장인물입니다. 따라서 소설 주인공은 사상적인 고아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자신과 뜻이 맞는 저항군 단체 메피에 들어가나, 과연 이게 올바른 행동인지 의문을 품습니다. <우리들>에서 소설 주인공은 자신이 올바른 단체에 속했는지 계속 의구심을 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꽤나 혼란스럽고 산만합니다. 이는 소속감이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사례일 겁니다. 이런 의심스러운 소속감 덕분에 <우리들>은 <1984>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보다 훨씬 입체적이죠. 하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런 소속감은 소설 주인공(과 독자들)을 특정한 단체나 집단 내부로 안내하는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이는 비단 소설들만 아니라 <원티드>나 <킹스맨>이나 <어벤저스>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 역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특정한 단체를 강조하기 위해 <어벤저스>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고아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캡틴 아메리카 스티븐 로저스는 그야말로 시대와 단절된 고아입니다.) 이런 사례들 이외에 저는 숱한 사례들을 계속 늘어놓을 수 있겠죠.

 

제가 <뜨거운 동토>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런저런 소설들을 늘어놓는 이유는 <뜨거운 동토>가 이런 소속감을 따스하게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동토>는 외로운 소설 주인공이 특정 단체로 들어가고 안정을 느끼는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갑니다. 이제까지 제가 늘어놓은 사례들처럼, 소설 주인공은 고아입니다. 비록 어머니가 존재하나, 소설 주인공은 아버지를 모르고, 집을 나왔고, 기댈 곳이 없죠. 게다가 사회 복지가 엉망진창인 20세기 초기 유럽에서 하급 계층의 16세 소녀는 사면초가 같은 상황에 빠집니다. 사방에서 빈곤과 기아와 범죄라는 적들은 소설 주인공을 옥죌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사면초가 위기는 별로 오래 이어지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핀란드 사회 민주주의 정당을 만나고, 산하 집단인 이상 동맹에 들어갑니다. 당연히 이상 동맹 속에서 소설 주인공은 다양한 친구들과 선생님들(어른들)을 만나고, 안정과 행복을 느낍니다. <뜨거운 동토>는 시녀였을 때 얼마나 소설 주인공이 힘들게 살았는지 자세히 강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소설 주인공이 일했던 귀족 가문을 꾸준히 보여줍니다. 그런 묘사 덕분에 소설 주인공이 사회민주당에 속했다는 소속감은 훨씬 커집니다. 그런 소속감은 소설을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뜨거운 동토>에서 소설 주인공이 느끼는 소속감은 소녀들과 소년들의 우정으로서 드러납니다. 이 세상에 소녀들과 소년들의 우정을 다루는 소설들은 많고 많을 겁니다. 가난하고 힘들고 외로운 소녀들이 뭉친다는 소설들 역시 흔할 겁니다. 그런 소설들 역시 어떤 연대감이나 소속감을 강조할 겁니다. <뜨거운 동토>는 그런 소설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런 통상적인 소설들과 달리, <뜨거운 동토>는 따스한 소속감을 핀란드 사회민주당이라는 변혁 집단과 19세기 유럽 자본주의라는 참혹한 현실로 연결합니다. 소설 주인공이 속한 이상 동맹과 그 상위 집단 사회민주당은 그저 힘든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사회민주당은 참혹한 자본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세력이고, 무산자 민중(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소설 주인공은 위안과 안정을 넘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위상으로 자리잡습니다. 사상을 잘 모르고 아직 어리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은 그런 위상을 뚜렷하게 자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무지비한 자본주의와 황제 통치와 계급 구조는 굵직한 사건들을 일으키고, 사회민주당은 그런 사건들에 힘겹게 직면합니다. 이는 주인공이 자리잡은 위상을 천천히 강조하는 역할을 맡아요.

 

따라서 소설 주인공에게는 두 가지 위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또래 소녀들과 어울리는 하급 계층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회민주당 이상 동맹에 속한 미래의 혁명가입니다. 이 두 가지 위상은 별개가 아니라 가난한 소녀가 미래의 혁명가들과 함께 성장한다는 흐름을 연출합니다. <뜨거운 동토>에서 가난은 그저 외로운 주인공을 강조하는 수단이 아니라 혁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단초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이상 동맹 맹원들과 살가운 우정을 나누는 동시에 (저도 모르게) 미래의 혁명가로 자라나는 중이죠. <뜨거운 동토>가 한창 연재 중이기 때문에 저는 소설 주인공이 무슨 행보로 나갈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소설 주인공이 혁명 노선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저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작가가 이미 연재한 내용들을 고려한다면, 이상 동맹원으로서 소설 주인공은 자본주의와 황제 통치와 계급 구조에 대항하는 입장입니다. <뜨거운 동토>에서 소속감은 소설 주인공(과 독자들)에게 안정을 가져다주는 요인이고, 동시에 핀란드 사회 민주주의 정당 내부로 파고드는 안내원이고, 동시에 소설 주인공을 필연적인 혁명가로 만드는 계기입니다.

 

어쩌면 어떤 독자는 약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들이 많고 많다고 지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독자는 <뜨거운 동토>가 그저 그런 이야기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네, 그건 사실입니다. <뜨거운 동토> 이외에 힘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뒤집고 그걸 청소년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소설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이야기들과 달리, <뜨거운 동토>는 자본주의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사회주의 세력을 이야기합니다. 비록 소설 속에서 핀란드는 러시아 차르에게 통치를 받으나, 이미 자본주의 물결은 유럽을 뒤덮었고, 핀란드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러 사회 문제들과 비극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비롯한 결과입니다. 엄청난 양극화, 기계 부품이 되는 사람들, 아동 노동, 성 폭행들, 매연과 산업 폐기물 등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비롯하는 범죄들이죠. 고대부터 억압적인 계급 구조 속에서 이런 비극들은 언제나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서구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가장 지배적인 체계가 되었고, 봉건 시대와 비교하지 못할 비극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비극들은 21세기 초반을 여전히 위협하는 중이죠.

 

<뜨거운 동토>가 돋보이는 이유들 중 하나는 이런 자본주의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움직임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계급 구조는 억압과 빈곤을 낳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그런 억압과 빈곤에게 내쫓깁니다. 그렇게 소설 주인공은 외롭고 쓸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통상적인 소설들은 이런 주인공을 특정한 단체에 집어넣고 우정으로 둘러싸겠죠. 그런 우정은 소설 주인공과 독자들을 따스하게 물들이겠죠. <뜨거운 동토> 역시 그런 측면을 보여주나, 다른 통상적인 소설들과 달리, <뜨거운 동토>는 자본주의와 거기에 맞서는 움직임에 초점을 맞춥니다. 덕분에 소설 주인공(과 독자들)이 느끼는 소속감은 그저 따스한 우애를 넘어 혁명적인 열정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억압적인 계급 구조를 뒤집고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이야기하는 소설들은 많습니다. 그런 소설들은 드물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소설들은 자본주의라는 계급 구조를 직시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현대 문명을 장악하는 가장 지배적인 체계임에도, 자본주의가 경제 공황과 기후 변화 같은 전대미문의 재난을 불러옴에도, 수많은 소설 작가들은 자본주의를 피상적으로 훑어봅니다. 결국 그런 소설 작가들은 혁명을 오직 개인적인 윤리나 도덕으로 연결할 뿐입니다.

 

이는 작가들의 개인적인 잘못이 아닐 겁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옳다고 배웁니다. 각종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은 그런 관념을 강화합니다. 그런 관념은 우리를 둘러쌌고, 우리는 그런 관념을 아무 생각 없이 수용합니다. 설사 그걸 비판한다고 해도, 우리는 사회 구조보다 개인적인 윤리나 도덕을 부르짖습니다. 따라서 어떤 소설이 빈곤과 기아와 환경 오염을 강조하고 좋은 세상을 외친다고 해도, 아무리 소설 주인공이 특정한 집단에 들어가고 세상을 뒤집는다고 해도, 그런 소설은 뻔한 결론에 이릅니다. 작가는 소설 주인공을 둘러싼 상황을 피상적으로 묘사할 테고, 소설 주인공이 느끼는 소속감 역시 피상적인 수준에 그치겠죠. 반면, <뜨거운 동토>는 핀란드 사회민주당과 산하 집단 이상 동맹을 이야기하고, 지배적인 계급 구조에 맞서는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사회민주당 노선이 무조건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설 주인공이 느끼는 소속감을 거대한 혁명으로 연결하고 싶다면, 소설 작가는 가장 지배적인 계급 구조와 거기에 맞서는 운동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사회민주당 노선이 옳든 그르든, 그런 묘사는 현실에 훨씬 밀착할 수 있겠죠.

 

설사 사회주의 노선이 틀리다고 해도, 19세기부터 21세기 초반 현재까지, 분명히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가장 적극적으로 맞붙은 운동입니다. 가난한 여자들이 만세를 불렀던 1870년대 파리 코뮌부터 오늘날의 남아메리카 좌파 블록까지, 지구촌 곳곳에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저항했습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숱한 오류들과 잘못들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류들과 잘못들을 뒤돌아볼 수 없다면, 제대로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오늘날 인도 지역이나 남아메리카 민중들이 투쟁하는 운동들을 고찰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 사회주의를 되짚어야 할지 모릅니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거대한 흐름을 무조건 간과하거나 외면한다면, 어떻게 그런 소설들이 현실에 밀착하거나 혁명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결과적으로 그런 소설들은 현실을 피상적으로 분석하고, 덕분에 상투적인 도덕이나 윤리를 주워섬깁니다. 이는 윤리나 도덕이 무조건 틀리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이 변혁하는 과정에 윤리나 도덕을 들이댄다면, 그건 너무 원론적인 행동일 겁니다. 윤리나 도덕은 불과 몇 십 년 만에 후딱 바뀔지 모릅니다. 불과 몇 십 년 전에 유럽 국가들은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건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죠.

 

그런 측면에서 <뜨거운 동토>는 좀 더 자세히 혁명을 이야기하고, 좀 더 현실에 밀착하는 소설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소설 주인공을 비롯해 이상 동맹원들의 우정이 훨씬 특별한 이유는 그들이 그런 적극적인 운동 속에 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맹원들이 똑같이 혁명 노선에 가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투철한 계급 의식을 강조하고, 누군가는 그저 쉼터를 찾았을 뿐입니다. 누군가는 전투적인 노선을 원하고, 누군가는 비관적인 시선을 유지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혁명이 아니라 우정과 안정을 원했고, 그래서 혁명 노선에서 다소 거리를 둡니다. 그렇다고 해도 억압적인 계급 구조는 소녀들과 소년들을 둘러쌌고,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무산자 민중 계급을 강조하는 소속감은 남다른 감성을 선사합니다. 저는 이런 감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이런 감성에 호응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호응이 적다고 해도, 이런 감성은 <뜨거운 동토>가 드러내는 중요한 특징들 중 하나일 겁니다.

 

이 세상에는 우애와 우정과 연대를 강조하는 소설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설들이 정말 연대나 우애를 바랄까요. 결국 그런 우애와 연대가 피상적인 결말로 흐르지 않을까요. 그런 소설들이 오직 입으로만 우애를 이야기하고, 결국 지배 계급에게 굽실거리는 행태를 보여주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는 그런 소설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상 동맹원들이 보여주는 우정은 좀 더 특별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무산자 민중이 세상을 뒤집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지배 계급을 타파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정과 우애와 연대를 강조하고 싶다면, 풋풋하고 설레는 안정감을 뜨거운 소속감으로 확장하고 싶다면, 소설 작가는 지배 계급과 철저하게 맞서는 세력을 소개해야 할 겁니다. <뜨거운 동토>는 그런 소설이고, 그래서 저는 <뜨거운 동토>가 좀 더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그런 사상적인 노선과 상관없이 소녀들의 아기자기한 일상과 자매감을 이야기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낭만적인 소감 역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저는 단순히 아기자기한 자매감을 넘어서는 우정을 보고 싶어요. 어쩌면 앞으로 <뜨거운 동토>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중에 이 소설이 다른 양상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이제까지 작가가 보여준 내용은 위에서 제가 이야기한 사항들에 부합할 겁니다.

 

자본주의가 엄청난 재앙을 부르는 상황에서 우리가 단순히 우정이나 연대를 말한다면, 그건 너무 가벼운 행위일지 모릅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그런 연대가 비롯하는지 우리는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할 겁니다. <뜨거운 동토>는 그런 창문을 제시하고, 독자들을 핀란드 사회민주당으로 안내합니다. 그런 창문이 없다면, 아무리 소녀들이 알콩달콩 우정을 나눈다고 해도, 그건 그저 낭만적인 환상으로 흐를지 모릅니다. 물론 소설은 소설이고, 소설과 사회학은 다르죠.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들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희로애락이고, <뜨거운 동토>는 그런 부분에 충실합니다. 소설이 표현하는 여러 감성들, 정다운 손길, 낯선 시선, 친숙한 어깨 동무, 화기애애한 대화, 망설이는 발걸음과 떨리는 입술 등은 그런 감성들을 상큼하게 혹은 묵직하게 전달합니다. 아직 소설이 초반부이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심각하거나 묵직한 감성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소설은 소녀들과 소년들이 느끼는 일상 속의 젊은 감성들에 주력합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거나, 잠자리에서 서로 어깨를 맞대거나, 팔짱을 끼는 장면들은 사소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장면들은 일상을 포착하고 발랄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어요. 이런 발랄한 일상 속 장면들은 정말 좋군요. 저는 이런 장면들 덕분에 이 소설이 훨씬 섬세한 감수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소설이 되는 요건들 중 하나는 개성적인 등장인물들일 겁니다. 그리고 그런 등장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설킬 때, 소설은 복잡한 갈등 관계를 연출합니다. 그런 갈등 관계가 풀릴 때, 우리는 어떤 정화를 느낍니다. 이런 과정은 우리가 소설을 읽는 주된 이유들 중 하나일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뜨거운 동토>는 다양한 등장인물들과 그들이 얽힌 관계들을 제시합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심각한 갈등은 등장하지 않은 것 같으나, 급변하는 유럽 정세는 심각한 갈등을 예고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에 상관없이 다양한 소녀들과 소년들이 생기있게 어울리는 장면들은 참 풋풋합니다. 이 소설이 드러내는 감성을 하나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풋풋함이나 발랄함을 고르고 싶습니다. 어쩌면 나중에 유럽 정세가 급변할 때, 이런 풋풋함이나 발랄함은 많이 사라질지 모르죠. 하지만 아직 그런 급변은 닥치지 않았고, 그래서 독자들은 소녀들이 깔깔거리며 웃고 수다를 떨고 심통을 내는 장면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종종 저는 이런 장면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나중에 이런 생기발랄함이 사라진다면, 그건 퍽 아쉬울 것 같아요.

 

저는 이 소설이 어느 시대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습니다. 핀란드 이외에 다른 유럽이나 러시아 상황이 나올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볼셰비키 전위 정당은 살짝 고개를 내미는 것 같으나, 아직 다른 유럽 상황은 자세히 나타나지 않는군요. 사실 20세기 초반 유럽과 러시아는 정말 격동의 시대를 거쳤습니다. 20세기 초반의 가장 큰 비극은 1차 세계 대전일 겁니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에 유럽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공산주의자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같은 사회 민주주의자는 “사회주의 혁명이냐, 야만이냐”를 두고 싸웠죠. 결국 유럽 사민당은 야만(1차 세계 대전)을 선택했고, 로자 룩셈부르크나 장 조레스 같은 혁명적인 좌파들은 죽음을 당합니다. 이런 야만은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까지 공격하고, 전시 공산주의가 군사 독재로 이어지는 발판을 마련했죠. 이런 흐름은 우리가 살아가는 20세기(와 21세기 초반)을 정립했고요. 따라서 <뜨거운 동토>는 가장 중요한 현대사의 순간을 다루는지 모릅니다. 설사 <뜨거운 동토>가 그런 상황을 다루지 않는다고 해도, 핀란드 사회민주당이라는 창문을 통해 우리는 격동의 현대사를 들여다볼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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