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다른 생물들과 차별적인 인간의 정의가 무엇인지라는 물음은 유서 깊은 주제이다.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정의는 부족하다. 모든 생물은 생각을 한다. 그것이 인간만큼 커다란 용량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만한 복잡성 역시 가지지도 못할 뿐. 인간의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몇몇 사상가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헤겔은 말한다. 동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현재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오직 죽음으로써만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장애로 인식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새로운 상태로 이행할 수 있다. 지양(止揚, Aufheben)은 자기부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현재적 자신의 죽음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죽음을 의식하고, 그를 극복함으로써 존재한다. 하이데거의 논의는 어떨까?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자신이 ‘죽음을 향해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에 현존재이다(죽음의 인식을 통한 실존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는, 단지 존재할 뿐 실존하지는 못하는 단순한 존재자일 뿐이다). 자신이 언젠가 죽는 존재라는 불안이 자신의 실존에 대한 존재론적인 의문을 던지게 만들며,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만이 현존재이다. 하지만 또한 아직은 죽음에 도달하지 않았기에, 아직 무(無)라는 완결에 도달하지 못한 미완성자이기에 현존재는 스스로를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 가능성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행위, 아직 완결되지 않았기에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행위를 기투(企投, Entwurf)라고 한다.
헤겔의 자기부정과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는 두 개념에는 물론 차이가 있다. 헤겔의 지양은 궁극적으로는 절대정신을 예비한다. 헤겔이 역사의 완성과 같은 궁극적인 진리를 내세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의 운동은 운동하는 척 하지만 결국 다시 절대정신으로 재귀결하는 가짜운동이라는 비난도 듣게 되는 것이다. 반면 하이데거의 기투는 무/죽음 이외의 것을 예비하지 않는다. 한 현존재가 자신의 죽음이라는 완결에 도달하기 전까지 행하는 모든 행위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함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 현존재가 본래적인 자신을 찾기 위한 행위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다. 두 사상가 공히 죽음은 스스로를 미완성의 존재,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문제적 요소이자 그래서 그로 하여금 뭔가를 하도록 유도하는 시발점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인간은 스스로 죽음을 안고 사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들과는 다른 방향을 가진 사상도 있는 법. 모든 행위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한 결과일 뿐이며, 죽음은 단순히 존재자가 외부로부터 우연히 재수 없게 마주치는 불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스피노자가 그렇다.
「에티카」의 4부 정리 64에서 그는 ‘악의 인식은 부적실한inadequate 인식’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에 있어 악, 즉 나쁜 것은 우리의 신체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 다시 말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부적실한 인식은 우리 자신의 능력을 통해 얻은 인식이 아닌 수동적인 원인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 인식을 뜻한다. 결국 ‘우리의 신체의 실존을 배제시키는 관념은 우리의 정신에 존재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관념은 우리의 정신과 반대된다’(「에티카」 3부 정리 10)는 근거에 따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본성적 능력으로는 스스로를 무능력한 존재 혹은 미완성/불완전의 존재로 인식할 수 없다. 그런 인식은 외부적인 원인에 의해 우연히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일 뿐이다(「에티카」 3부 정리 15. 어떤 것이든 간에, 우연에 의해, 기쁨이나 슬픔 혹은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슬픔이 인간에게 본성적일 뿐만 아니라 슬픔으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를 추동한다고 말하는 헤겔과 하이데거의 방식 자체를 부정한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는 것, 자신의 존재를 즐기는 것이야말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진정 자연적인(natural) 존재방식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과 다른 생물 사이에는 본성(nature) 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은 후천적으로 본성에서 벗어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습관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지만, ‘습관을 들이는 습관l’habitude de prendre des habitudes’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그러나 습관 자체를 자신의 본성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예속을 내속화하고, 그럼으로써 존재자들 중 가장 본성에서 먼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과 달리 동물들은 스스로 죽음을 품지 않으며, 그래서 긍정과 기쁨으로 삶을 찬양하는 존재자이다. 그렇다면 식물은 어떠한가? 우리는 식물이 동물보다도 더 죽음을 품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자임을 알 수 있다. 식물만큼이나 생명력의 정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식물은 가지를 잘라내도 가지를 다시 만들어내고, 가지를 잘라낸 부위에 다른 가지를 접붙여도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나무의 밑기둥만 남겨두어도 그 그루터기에서 새로 싹을 내기도 하고, 반대로 뿌리를 잘라내도 뿌리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난 묘목을 포함한 다른 생물의 죽음에는 (심지어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의 죽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지만, 자신의 생명력을 뻗어내는 데엔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는 식물은 모든 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긍정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생물일 것이다. 이러한 식물의 존재방식에 대한 몰이해가 덴워드 이카드나 테나 포인도트의 식물왕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식물왕이 삶과 죽음을 수단화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행위에 이유나 목적을 붙이는데 익숙한 사람의 방식일 뿐이다. 식물에게 있어 삶은 목적이자 동시에 수단이다. 그들은 목적 없이 단지 자신의 능력껏 살아간다.
하지만 식물조차도 어느 정도까지는 죽음을 느끼고 있다. 어느 생물이나 죽음을 피하려 하며, 그것은 식물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열매의 죽음을 이용해 씨앗을 퍼뜨리는 것에서 볼 수 있듯 놀랍도록 죽음에 초연한 식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조차 기본적인 자기방어를 갖추는 경우가 있으며, 그것은 식물이 죽음을 피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왜 독초가 독을 품으며, 고추는 매운 맛을 내는가? 그것은 죽음을 피하기 위한 식물의 방어기제이다. 야채 뱀파이어가 어떻게 식물을 조종할 수 있는가? 뱀파이어가 죽음을 통해 사람을 매혹하듯, 야채 뱀파이어가 식물을 매혹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이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의식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죽음을 느끼는가? ‘나’가 느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식물의 존재방식이 인간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식물의 자기정체성 역시 인간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식물에 있어 ‘나’의 외연은 인간의 그것보다 더 넓은 것처럼 보인다. 독초가 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독초의 죽음을 피하게 해주진 않는다. 개별적인 독초는 언제든 먹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먹힘으로써 그 외의 다른 독초들은 먹히지 않을 수 있다. 개별적인 독초의 죽음은 종으로서의 독초의 생존을 도모할 수 있게 한다. 마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요한 복음」 12장 24절.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재인용).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이보다 더 잘 적용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을까? 어쨌든 식물은 같은 종의 다른 식물들을 자신으로 여길 수 있다. 더욱이, 「오버 더 초이스」에서는 그 이상의 외연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실포 언덕의 식물들은 종을 뛰어넘어 다른 식물이 되기도 하며, 비누풀이나 마가목은 티르를 통해 계를 뛰어넘어 다른 동물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왜 비누풀 등이 스스로를 종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며 또한 그 이상이기도 하다고 말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식물의 자의식의 개념은 너무나도 넓고 고정되어있지도 않다. 식물의 존재방식이 역동적인 생명력 자체이기 때문이다.
「오버 더 초이스」의 읽다보면, 스토리 전개가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소설이 하나 떠오른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우스운 자의 꿈」이 그것이다. 허무주의자인 주인공은 어느 날 자살을 결심하는데, 바로 그 날 거리에서 불쌍한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된다. 그날 밤 자살 직전 그 소녀의 기억이 주인공을 괴롭히고, 자살을 미룬 뒤 깜빡 잠에 든 그는 꿈을 꾸게 된다. 꿈에서 그는 유토피아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행성에 떨어진다. 그리고 그 유토피아는 그 이방인의 존재 때문에 점점 거짓과 증오, 이기심을 배우며 타락하게 된다. 「우스운 자의 꿈」은 (물론 사회주의적 이상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타락하는지를 다루는 계보학적인 주제의 환상소설이며, 이런 측면에서 이 두 작품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오버 더 초이스」에서 이러한 타락은 두 갈래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전대미문의 화산폭발 위기 앞에서 식물은 마치 인간과 비슷하게 죽음을 느끼게 된다. 그 위기의 결과가 개별 식물의 죽음이 아닌 전 생물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 손톱의 배제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듯 식물에게 있어 동물이나 한 종의 식물의 죽음은 식물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 생물의 죽음은 식물 자신의 죽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228그루짜리 손톱을 떼어내는 방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방식을 통한 판단은 앞서 말한 식물의 자연적인 방식이 아니며, 따라서 사람의 사고방식을 배울 필요성이 제기된다. 식물의 이 배움이 식물의 타락을 낳게 된다. 식물은 사람들의 죽음(서니/지데/션 등)을 간접 경험함으로써 고정적인 자아(몇몇 종의 식물들로 대표되는)를 형성하며, 이에 이기심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식물의 타락은 어떤 삶도 긍정하던 자신의 존재방식에서 벗어남이다.
또한 식물에 의한 부활은 목가적인 개척마을의 타락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부활은 죽음의 이용을 가능케 하며, 이는 삶의 독특성을 잃는 결과를 낳는다. 부활의 입증을 위한 미레일 살해 도모, 실포 언덕의 재앙적 변화를 무마하기 위한 제물 봉헌으로서의 테나 포인도트 린치,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서의 휴스트라넬과 페르다이할 소환 등은 삶에 무게를 재기 시작함에 따라 유발된 결과들이다. 사람의 타락은 삶의 가치상실이다.
소설은 의외의 방식으로 싱거운 결말을 맞이한다. 그러나 마지막 서니(혹은 비누풀)와 티르의 대화는 흥미로운 편이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타락한 식물과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각각 다르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식물의 경우는 매우 단순하다. “살아 있어야 잊지.” 호부왕을 선출했으니 죽음에 대해 잊으면 된다는 것이다. 휴스트라넬과 페르다이할이 돌아간 이후 실포 언덕은 원래대로 돌아갔고, 티르는 더 이상 비누풀과 대화할 수 없으며, 부활한(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은 식물로 돌아갔다. 식물은 필요한 만큼 지각한 후 나머지는 잊는 방식으로 그들의 긍정적인 삶을 되찾는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가?
사람은 식물과 같은 방식을 취할 수 없다. “너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될 수 없어.” 이 대사는 필자의 생각에 이 작품 내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사람은 개별적으로 자아를 가지며, 또 기억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베르그송의 말처럼 습관을 만들며 살아간다. 사람은 식물처럼(혹은 「퓨처 워커」의 바람처럼?) 휴지(休止) 없이 변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은 습관에 머물고 그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습관을 만들며 변화해야 한다. 사람이 예속되지 않으면서도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과거를 긍정하는 것이다. “나 생각보다 자주 서니 이야기할 거 같다.” 이 긍정은 헤겔과 하이데거의 방식이 전혀 아니다. 이 긍정은 서니의 죽음을 슬픔, 극복해야할 사건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물레를 돌리는데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손가락을 자르고, 그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 조르바의 태도이다. 더 나아가 이 긍정은 궁극적으로 영원회귀를 맞이하는 니체의 긍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최고의 긍정의 형식”(김재인, 「들뢰즈 커넥션」, 서문)이라고 니체가 말할 때의 바로 그 긍정이다. 죽음을 마주해서도 그것을 기쁨으로 긍정하는 초인의 태도가 작품이 제시하는 죽음을 극복하는 사람의 방식이다.
이제까지 「오버 더 초이스」를 간략히 분석해보았다. 작품을 한 번 밖에 읽지 못했기 때문에 더 자세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아직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더 많은 이야기가 다른 독자들에 의해 나타날 것이라 기대한다. 마지막 부분은 작품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인 아쉬움과 약간의 잡담을 늘어놓고자 한다.
긍정과 기쁨으로 가득한 삶, 즉 식물이 죽음을 지각할 때 그것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에 타자는 흥미 있는 답변을 제시한다. 즉 죽음을 지각하고 있는 다른 존재자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가장 순수한 생명력만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즉 아기는 (자의든 타의든 간에) 결국 어른을 모방하여 자아를 형성하는 걸 볼 때 답변은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형성된 자아가 단순히 잊음으로써 소멸하는 것은 상술했듯이 너무 단순한 것으로 보인다. 나에겐 계몽이 신화가 되고, 그것은 오직 또 다른 계몽을 통해서만 빠져나올 수 있다는(「계몽의 변증법」, ‘계몽의 개념’)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의 방식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식물이 식물계(혹은 생물) 전체의 죽음을 어떻게 예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아쉽다. 물론 필자는 죽음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개념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비누풀이 서니를 통해, 마가목이 지데를 통해 등등 개별 종들이 어떻게 죽음을 지각하는지는 다뤄지는 데에 비해 식물계 전체의 죽음을 식물이 어떻게 지각하는지는 그려지지 않는다. 죽음이 외부에서 우연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점은 단지 필자가 눈치 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필자의 오해일지는 모르나, 타자는 자아가 죽음을 통해 형성되는 개념이라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생각이 설득력이 있는지 필자는 잘 모르겠다. 혹시 한 자아에게 죽음이 최초로는 어떻게 지각되는지, 아니면 죽음을 지각하기 때문에 자아가 형성되는지에 대한 작품을 언젠가 타자가 집필할지도?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마지막으로, 아니제이인 니바이 알루스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작품의 말미에는 식물왕으로 선정된 228그루의 이름 모를 식물이 니바이를 통해 종을 보존할 것이라는 강력한 암시가 나타난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션 그웬이 이에 대해 독자에게 살짝 귀띔하기도 한다. “주어진 시간이 대충 20년에서 2,000년인데, 만약 재난의 도래가 뒤쪽에 가깝다면 그 식물은 멸종하기 전에 번식 능력이 더 괜찮아진 돌연변이 후손을 남길 시간을 벌 수 있을 지도 모르죠.” 그런데 어떤 식물은 자웅동주(雌雄同株)이다. 니바이는 도대체 왜 하필이면 여장한 티르에게 강력한 성욕을 느끼는 걸까? 혹시 니바이는 단순한 암컷이 아닌 자웅동체에게 특별히 매력을 느끼는 아니제이가 아닐까? 그렇다면 니바이가 그 식물에게 성욕을 느끼고 변신하게 될 이유는 식물과 인간 사이의 엄청난 격차를 뛰어넘을 만한 그의 그리스적 성적 취향일 것인가? (어쨌든 우리는 아니제이를 통해서라도 생존할 방법을 찾는 식물의 놀라운 생명력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니바이에게 바치는 곡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Genesis의 Fountain of Salmacis. (~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