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이영도는 오래도록 글을 쓰지 않았다. 이는 작가와 팬 그리고 그와 무관한 제 3자까지 모두를 괴롭히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영도의 글을 보고 싶어하는 팬들 중 몇몇이 이영도가 글을 쓰지 않는 이유로 흔히 지목되고는 하는, 작가의 부모가 소유하고 있다는 감나무 밭을 불태우겠다는 재미없는 농담을 척수반사적으로 백만 번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비겁해 보일 수 있겠으나 분명히 밝히겠는데 그 농담들은 정말, 정말, 저어엉말 재미없었다.
도대체 왜 작가가 글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현실적으로 그렇지도 않을-생계수단에 대한 위협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작가로서는 글을 쓰고 싶으면 쓰고 쓰고 싶지 않으면 쓰지 않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일 것이다. 그리고 독자에게는 작가에 대한 협박을 정당화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진실한 협박이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한 실제로 감나무가 불탄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방화는 농담이 되기에는 필요 이상으로 자극적인 소재다. 그것도 n0년 단위로 되풀이되기에는 특히나.
이 농담이 될 수 없는 농담으로 지친 작가가 새로이 공개한 <오버 더 초이스>는 보안관보 티르 스트라이크가 동네를 찾은 찐따들의 상징적 거세를 도맡아야 했던 <오버 더~>시리즈의 신작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소재는 음악도 마법도 개양이도 아닌 식물이다. 기나긴 SF의 역사에서 식물이 행성을 지배하는 이야기는 무척 많았고 <오버 더 초이스>의 서사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작품만이 갖는 차별점이 있다면 이 작품의 작가가 기나긴 세월 동안 감나무와 화재가 나오는 따분한 농담으로 학대를 당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버 더 초이스>의 식물들이 인류에게 내거는 화평의 조건은 식물을 불에 태우지 말라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요구다.
식물들의 요구에는 대가도 있었다. 그들은 인류가 자신들을 태우지 않는다면 노화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죽음에서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들이 약조한 부활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영혼에 대한 복원이 아닌 필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 반전을 감나무에 대한 농담과 연결하면 이렇게 해석된다. “감나무를 태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글을 다시 쓴다고 해도 그건 그저 자기복제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라고.
밝혀질만한 반전들이 밝혀지고 농담에 대한 대답이 마무리되고서 이야기는 위의 해석으로는 포괄할 수 없을 사건들이 급전개로 제시된 뒤 결말을 맞이한다. 빠른 결말은 이영도의 글에서 항상 나타나는 특징이기는 하다. 일관된 논리에 따라 사건과 인물이 기능적으로 역할을 마치면 망설임 없이 막을 내리는 것은 그의 글이 가진 미덕이었다. 하지만 <오버 더 초이스>의 결말은 그보다는 농담에 약간 날 서게 대꾸를 했다가 갑분싸된 상황을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수습하는 과정에 더 가깝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교하기에 작가가 감나무에 대한 농담에 대꾸를 하기 위해 이 모든 과정을 다 거쳤다고 할 수 없기는 하지만.
나는 SF작가고, 고백하자면 SF작가로 활동하며 이영도와 같은 스타 작가의 신작을 기대하지 않기란 어렵다. 학창시절 <드래곤 라자>를 세 자리 단위로 반복해서 읽었기 때문은 아니다. 유의미할 정도의 낙수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 작가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서점에 한 명이라도 더 발길을 이끈다면 그 자체로도 도움이 되고, 이영도와 <오버 더~>시리즈의 신작은 충분히 그럴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필요가 동료 작가에 대한 위협적인 농담을 할 수 있다는 당위는 되지 못한다.
가장 최근에 봤던 감나무 농담 시리즈 중에는 “왜 이영도가 연재를 하지 않는다고 죄 없는 감나무를 태우느냐? 이영도를 태워라.”라는 것이 있었다. 어쨌든 기존의 농담에 비해 죄 없는 감나무를 태우지 않겠다는 면에서는 도덕적으로 한발짝 더 나아갔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아 숨쉬는 인간을 태우겠다는 면에서는 한참을 물러난 말이었다. 이 농담에 대해, 팬덤의 간절한 열망에 대해 어떤 지탄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영도만큼 많은 일을 한 작가를 부르기 위해서는 좀 더 그럴싸한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는 불평 정도는 해야지 싶다. 여섯 번째 봉화대에 불을 붙이거나 하는 식의 거창한 의식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좀 부르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