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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작품: 오버 더 초이스 (작가: 이영도 출판, 작품정보)
리뷰어: 백도씨, 18년 6월, 조회 455

*주의*

<오버 더 초이스>의 스포일러가 잔뜩 있습니다. 저는 마음 놓고 썼으니 꼭 원작을 먼저 읽어 주세요.

 

 

 

1.

두 해 전, 15년간 동고동락했던 개를 떠나보냈습니다.

늘 우리 곁에 있어 더욱 각별했던 개였기에 후유증이 컸죠. 어머니는 길가에 개만 봐도 우셨습니다. 아버지는 인터넷을 배우셨죠. 떠나간 개와 닮은 개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개가 떠난 일이 우리 가족의 탓인 것만 같은 죄책감에 반년을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떠난 개와 똑같이 생긴 개가 분양 중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그 개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개에게서 먼저 떠나간 개의 모습을 열렬히 찾았습니다. 먼저 간 개가 환생해서 돌아온 거라 믿을 만큼 닮았습니다.

참, 그 개의 이름은 별비입니다. 부모님은 이 까만 푸들의 눈이 별이 내리듯 반짝여서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믿으시지만, 실제 유래는 다들 아시죠? 우리만의 비밀입니다.

 

 

2.

10년이나 된 수면기에 지친 좀비들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과수원에 불을 지르겠다는 귀여운 협박이 이어졌습니다. 이에 네크로멘서는 ‘식물에 불을 지르지 말라’는 소설로 화답했습니다. 엥?

오늘, <오버 더 초이스>의 연재가 끝났습니다. 사인회 대신 한정판을 선택했더니 아직 종이책을 구경도 못 했습니다. 둘 다 샀으면 되었을 것을, 이 그릇 작은 덕후는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을 붙들고 울며 웃으며 하다가 이 감상문을 적어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제국의 한 개척지인 소도시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다룬 소설입니다. 이 소도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이 있고, 권력자가 권력의 경중을 알고, 남성이 여성을 넘보거나 여성이 남성을 넘보지 않고, 이종족끼리 배척하지 않으며, 어린이와 늙은이가 모두 자신의 신념을 토대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뜻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천국이 아닐까 싶은 이 소도시는 사실 제국을 전복하거나 세계를 멸망시킬 만한 사건이 세 번이나 일어난 살아있는 지옥입니다. 무서워라!

이번 작품은 작품 외적으로도 팬들을 위한 종합선물세트 같은 성격이 강합니다. <오버 더 호라이즌> 세계관의 인물들이 총출동할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관의 작품에서 누군가가 일생을 걸고 지켜냈거나 그러다 목숨을 잃었던 신념과 사상이 재등장하지요. 그간 작가님의 전작을 읽어왔던 독자 여러분이라면 익숙할 법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볍게 살펴볼까요?

 

 

3.

핸드레이크는 그 유명한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번에 굿즈로도 출시됐죠. 그런데 <드래곤 라자>에서의 인간관은 논리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감정적으로는 거부감이 드는 부분이 적잖았습니다. 예를 들어 후치와 운차이의 대화가 그렇습니다.

 

“당신처럼 생각하면 귀족이나 왕족을 욕하기는 쉽겠죠. 그게 억울하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버려요. 그게 귀찮아서 하지 않겠다면 입 다물고 앉아 있어요.”

 

아니, 돈과 힘이 주어지는데 왕을 마다하겠단 말이야? 귀찮아서? 라는 감정적인 반발심이 들지만, 작품이 진행되면서 펼쳐지는 인간의 역할과 자격에 대한 논리에 의해 수그러듭니다.

드래곤 로드와의 대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변방 마을의 초장이 조차 ‘나를 지키기 위해 타인 대신 희생’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요. 이 세계관은 동시에 핸드레이크의 인간관을 설명하기 좋게 제시하기에 딱 좋았습니다. 현실에는,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으며 그걸 결코 악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은 차치하고요. 후치는 아주 매력적인 꼭두각시였어요. 결국 후치의 여정은 ‘나는 단수가 아니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심지어 그 말을 뱉은 당사자 핸드레이크는 실패했는데도요.

실패할 만도 하죠. 그건 애초에 솔로쳐가 먼저 이해하고 제시했던 답안이잖아요. 그리고 근원적으로 헐스루인 공주의 생각이었고요. 예. <오버 더 호라이즌>에 수록된 <행복의 근원>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헐스루인 공주는 가이너 카쉬냅 뺨치는 철학적 최강자가 아니었을까요. 이 작품에서는 같은 주제의식이 한층 알기 쉽게 제시됩니다.

 

“행복의 근원이 불행이라면, 나의 근원은 너니까요.”

 

철학 전공자라면 한 번쯤 머리를 쥐어뜯었을 이야기입니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나를 읽어내는 너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중점으로 둔 채로는 공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진짜 나를 선택하는 것이 너라는 말은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정신적 유희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서니입니다. 주인공은 티르이지만, 티르 스트라이크 하기 어려워하는 티르는 제쳐두자고요. 결국 부활의 주인공은 ‘나’인 서니입니다. 이 소설은 비극적인 사고로 떠나간 나를 떠올리고, 구출하려다 실패하고, 되살리려 하는 ‘너’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껏 ‘내’가 보는 ‘너’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그렸다면, 이번에는 ‘네’가 보는 ‘나’의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그렸습니다. 그래서인지 더욱 마음에 와닿습니다. 티르의 서니, 테나의 서니가 아닌 서니의 서니는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그 죄책감마저 자기 죽음에 대한 슬픔 때문이 아니라 부모님을 슬프게 한 사실이 미안한 것이지요.

말하자면 동어반복입니다. 여러 작품과 다양한 세계관으로 꾸몄지만, 그 근원적인 주제는 언제나 맥이 같았습니다. 바로 인간의 관계맺음입니다. 그리고 많은 작가들이 그러듯이, 반복적으로 이 주제를 다루며 맥을 확장해왔던 것입니다. 동어반복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일단 근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부활한 지데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지데는 자신이 지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티르 역시 지데를 지데라고 믿고 있지요. 그러나 지데는 지데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녀를 사랑했던 케이토에 의해 드러나고 맙니다.

어떻게 그걸 발견했나요?

 

 

4.

솔직히, 반칙입니다. 원본의 사본이 원본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점은… 케이토는 지데가 늑대로 변신할 수 없는 위어울프라는 점을 알고 그녀가 가짜라고 밝혔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보다 조금 더 놀라길 바랐습니다. 말하자면… 변신을 못 한다는 사실은 언젠가 밝혀질 테니까요. 그런 알기 쉬운 이유보다는, 다른 모두가 몰라도 케이토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를, 그래서 독자로서 제가 놀라게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맞아요! 저는 반전중독이에요!

어쩌면 늑대로 변신할 수 있는 지데가 부활했을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자의 마음속에 남은 서니가 시체의 규칙을 깨고 일찍 영글면서 다양한 서니가 나타난 일을 보세요. 영원의 숲에서 분리된 넥슨처럼 말이죠. 그들 모두 부활한 할슈타일 후작이나 돌아온 아실처럼 굽니다. 그리고 이쪽에 없는 것을 저쪽이, 저쪽에 없는 것을 그쪽이 가지고 있죠. 만일 이 소도시에 나타난 전령 혹은 편지가 변신할 수 있는 위어울프였다면 케이토는 가짜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구차한 반론이나 떠올리다니, 저는 아직 개밥바라기의 실체에 놀랐던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했나봅니다.

네. 케이토는 그럼에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 이유는 케이토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요. (이건 약혼녀를 잃은 마을에 정착한 케이토라는 남자의 사랑을 제가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위처럼 이해하기 좋게 제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건 동 세계관 속의 인물들이 저마다 자신만 할 수 있는 일을 설명하지 못했던 것과 닮았습니다. 단적인 예로, 녹색으로 물든 옷을 두고 그것이 피인 건 확실하지만 왜 피인지 설명하지 못했던 레피란처럼 말이지요. 이렇듯 판타지 속의 인물만이 할 수 있을 일을 인간인 우리 독자에게 설명하는 것은, 판타지를 쓸 때 참으로 넘어서기 힘든 난관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변신할 수 없는 위어울프’인 이유는 아무래도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함인 듯합니다.

더불어 ‘이해를 위한 예시’도 많이 들지요. 이번 작에는 유독 ‘이해를 위한 예시’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까다로운 이야기와 세계관을 만들었을까요?

 

 

5.

장르문학, 특히 판타지가 쓰이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이제는 장르 판타지라는 용어로 구분하는 사람에게 고루한 문학관을 갱신하시길 요구해도 될 만큼 긴 시간입니다.

환상문학은 현실의 전복이라는 정의가 있습니다. 많은 작품에 적용되는 정의입니다. 작가가 주목한 현실의 단면을 거울처럼 비춰, 그것을 뒤집어보는 것입니다.

이 정의를 적용할 소설이 많지만, 무대를 한국 한정으로 좁혀도 그 역사가 깁니다. 특히 우리 선조는 장르적 특성을 토대로 현실을 풍자하는 데 능했지요.

그래서일까요.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작품을 쓰는 경우도 왕왕 있는 것 같습니다. 독자의 태도도 바뀌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독자가 소설 이전에 작가를 읽고, 작품에 대한 적절한 태도를 취합니다. 가장 중요하게 확인할 점은 당신이 내 편이 맞는지 여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듯합니다. 작가가 먼저 그러는지, 독자가 먼저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수백 장의 종이를 소비하는 사람은 뭘까요? 낭비벽이 심한 사람일까요.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에 빠지셨군요. 괜찮습니다. 저도 그래요! 식물왕 즉위 직후 처형당할지 모를 위험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글쓰기가 수백 장의 종이를 소비하고 맙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위해 수백 장의 종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뜬금없지만 잠시 이영도 소설의 구조를 살펴볼까요. 이게 정답은 아니지만.

 

1. 현실에서 있을 법하나 흥미로운 사건으로 시작한다

2. 사건이 진행되면서 익숙한 개념이 논리에 의해 전복된다

3. 전복된 논리가 지배하는 배경에서 사건이 종결된다

 

여기서 2번 단계가 흔히 말하는 ‘관념의 물화’입니다. 대개 이영도 소설이 까다롭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여기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독자는 간과하기 쉬운 착상에 놀라거나, 이게 말이 되냐며 그만두거나, 둘로 나뉩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현실에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들만 펼쳐지니까요. 특히 인물들이 다분히 기능적으로 움직이는 부분입니다. 이 전개가 결말로 이어지면 ‘라이온은?’ ‘죽었어.’가 됩니다. 기능적으로 필요가 없으니까요. (잠깐. 이번 소설 결말에 이파리 보안관이 없어…?)

다시 말해 이렇습니다. 현실을 반영한 판타지에는 재물을 탐하는 드래곤이나 탐관오리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노력을 거치면 실제 현실에 대입할 수 있는 소재를 찾을 수 있지요. 하지만 ‘개체들의 총합 이상인 식물로서의 비누풀과 평범한 사람이 감각을 공유하는 사건’은 어떨까요. ‘목 잘렸다 부활했는데 목 자른 이에게 부활의 중요성을 전도하는 인물’은 무엇에 대입하면 좋을까요.

즉 이영도 소설에서는 판타지가 아니라면 다룰 수 없는 전개를 볼 수 있습니다. 판타지가 아니어도 변환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도무지 판타지가 아니라면 쓸 수 없는 이야기 말이지요. 판타지를 현실의 전복으로 여기는 작품은, 그렇기에 현실로 치환할 수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에둘러 하는 셈이지요. 하지만 이영도 소설이 전복하는 현실은 광의적인 현실, 도대체 그걸 현실이라고 규정지어도 될지 모를 만큼 넓은 범위의 인간입니다.

이런 까닭에 이영도 소설은 대체 불가능한 판타지 소설입니다. 그간 이것저것 많이 읽어 보았는데, 아직껏 대체할 수 있는 소설을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에는 잘 쓰이고 재미있으며 훌륭한 판타지 소설이 많습니다. 하지만 판타지가 아니라면 도저히 그 이야기를 풀어낼 수 없는 소설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지요. 제 좁은 독서 폭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소설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판타지가 현실의 전복을 위한 거울이라면, 다음 문단을 위해 이번 작품을 ‘좀 심하게 큰 거울’이라고 말해보겠습니다.

 

 

6.

좀 심하게 큰 거울은 너무 많은 것을 비춥니다. 이쪽에서 비추면 저게 나오고, 저쪽에서 비추면 그게 나와서, 모두가 다른 것을 볼 것만 같습니다. 사실 그게 예술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이 소도시의 새로운 판타지 소설을 읽고, 거기서 어떤 이야기를 찾을지는 독자의 몫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연재 초기에 도입 리뷰를 가장한 환영사를 쓰면서 2014년 대한민국의 비극이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 같은 사람에게 티르와 서니의 대화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뒤 드는 생각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티르의 서니와 테나의 서니, 서니의 서니가 모두 다르듯이 말이지요. 그리고 끝내 그 논리의 껍데기 끝에,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찾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소설이 어떤 한 가지 주제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면, 다음과 같은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쥐가 뱀을 죽였어요. 제가 빗자루로 쥐를 때려줬는데 늦었어요.”

“…여자 쪽에서 두루뭉술하게 설명했던 건지 남자 쪽 상상력이 과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남자는 자기가 저주에 걸려 나무로 변했던 여자를 구하게 된 거라고 믿게 되었다더군요.”

“…눈에 뻔히 들어오는 것도 머릿속에서 ‘대강 이럴 것이다’라고 상상하는 것에 끼워 맞춰서 보니까 그랬지.”

 

모든 인물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었을 일들은 각각의 신념이 구체화한 결과였습니다. 맞습니다. 강한 신념은 자타를 막론하고 죽여버리곤 합니다. 동시에 그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끝에 남는 것은 나무를 키우는 케이토, 1화의 마지막 문장을 배반한 티르, 끝없는 반전극에 즐거워했던 독자들입니다.

모두, 대체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대체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7.

대호 이름을 딴 쪼그만 개를 키우면서, 참 오랫동안 먼저 떠나간 개의 모습을 찾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비슷해 보이는 행동을 하면 크게 기뻐했죠. 먼저 간 개가 환생해서 돌아온 게 틀림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먼저 간 개와 다른, 별비만의 모습이 보입니다. 닮은 걸 볼 때 기뻤는데, 다른 걸 볼 때 기쁩니다. 그 모습이 못내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여전히 먼저 떠나간 개의 이야기를 하면 코끝이 찡하지만, 이 정도면 잘 떠나보냈다고 말해도 되겠지요.

조금만 이야기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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