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블린의 왕비 공모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왕비와 고블린 (작가: 도래솔래, 작품정보)
리뷰어: 유언, 18년 6월, 조회 135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블린 때문에 산을 넘지 못하고 여관에 머뭅니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데에는 여흥이 필요하고, 그래서 음유시인이 이야기를 시작했죠. 염소도 훔치고 아이도 훔치는 고블린들이 급기야는 전대 왕비를 훔친 이후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이 소설은 인간의 왕비가 고블린의 왕비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고블린, 여관과 음유시인, 그리고 음유시인이 재주 좋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판타지의 분위기를 만듭니다. 소설은 자연스레 이야기하던 도중에 잠깐씩 시선을 돌려 여관으로 돌아오게 되죠. 이때 여관 사람들의 반응은 재밌는 조미료처럼 첨가됩니다. 재밌는 점은, 여관 사람들은 왕비를 해석하고 왕비는 고블린을 해석하는데, 이게 번번이 틀린다는 것입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재밌어지네요.

 

고블린에게 납치된 왕비, 고블린 왕과 한침대를 쓰는 왕비.

늙다리 음유시인의 말처럼 불행한 사연입니다. 여관 사람들은 ‘왕비’가 인간 남자의 옆에서 고블린 남자의 옆으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에만 집중합니다. 그건 왕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고블린 남자와 한침대를 쓰면서 ‘인간으로서의 위엄과 여성으로서의 명예를 박살냈다’는 것만이 다를 뿐인데, 이조차도 의문이 생기죠. 왕비의 ‘여성으로서의 명예’란 언제나 아름답게 빛나는 왕국의 보배, 아름다운 ‘왕비’로서의 명예입니다. 허나 왕비는 그것들은 한 번도 나의 명예라고 생각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으로서의 명예는 자신을 위한 명예가 아니었다는 고백입니다. 결국 ‘왕비’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똑같다, ‘결혼은 어차피 납치와 비슷’하니까 단지 새로운 위치에서 ‘왕비’의 의무를 다하면 된다. 왕비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신은 인간의 ‘왕비’였다가 고블린의 ‘왕비’가 된 것뿐.

정말 그게 전부일까요.

 

늙은 음유시인은 주름진 입을 당겨 히죽 웃었다. “바로 맞히셨소. ‘고블린을 증오하는 젊은 왕보다도, 왕비를 강탈해 가 버린 고블린의 품이 더 좋았던 왕비’, 바로 그런 여자 이야기를 우리는 하고 있는 것이라오. 그에게 걸맞은 변명이 지상에 없을 정도로 불민한 자의 이야기를…”

 

왕비는 고블린의 왕비로서 의무를 다하고, 여관 사람들은 왕비가 인간의 왕의 침대에서 고블린 대장의 침대에 눕게 된 일에 초점을 맞출 때. 늙은 음유시인의 웃음은 여관 사람들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진실이 드러나죠. 왕비는 여전히 ‘왕비’였지만 여기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고블린의 ‘왕비’는 인간의 ‘왕비’와 다르다는 것, 왕비는 ‘왕비’이되 ‘왕비’가 아니라는 것.

고블린들에겐 애초에 ‘왕비’가 없었습니다. ‘왕비’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죠. 우리에게 ‘왕비’란 왕의 아내이자 여성이고, 여기에는 자연스레 따라붙는 수많은 소임과 이미지가 있습니다. 아름다워야 하며 왕의 적자를 낳아야 한다. 왕실의 일원으로서 품위를 지켜야 한다. 무엇보다 ‘왕비’는 ‘여성’이어아먄 하고,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고블린들은 조금 다릅니다. 여성의 소임을 위해 ‘왕비’라는 자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왕비’가 필요하다길래 왕의 아내이자 여성을 뜻한다는 ‘왕비’를 데려온 것뿐이죠. 결정적인 대목에서 왕비는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블린의 ‘왕비’로서도 왕비는 여성의 주요한 기능-이라고 알고 있는-인 ‘생명을 만드는 것’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고블린들이 왕비에게 준 소임은 첫째, 왕과 같은 침대를 쓰는 것, 둘째, 작물을 경작하는 것입니다. 왕비는 어찌되었든 납치되어 이곳으로 왔으며 왕과 같은 침대를 씁니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을 제하면, 왕비에겐 더 이상 여성이기 때문에 따라오는 외적인 장애물이 없습니다. 왕비는 고블린 사회의 여성과 남성을 구분조차 하지 못하죠. 고블린 사회는 그런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두려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여성으로서 왕비는, 남성이 자신을 두려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블린 왕이 자신과의 성교를 두려워했다는 사실이 왕비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 사실이 자신에게도 힘이 있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의 왕비 생활이 이전과는 다를 거라는 것, 여성으로서의 생활이 이전과는 다를 거라는 걸 왕비는 깨닫습니다. 이후 왕비가 선택한 스스로의 소임은, 생명을 훼손하는 데 있죠.

 

왕비가 마지막으로 택한 교배 수법은 심지를 갈라낸 파와 양파를 강제로 접붙이는 것이었다. ‘초대 폐하와 함께 반역을 일으킨 영웅 집안의 부인이던 어머니께선 말씀하곤 하셨어. 여자는 생명을 지키는 성별이다. 그러니 본분을 다하렴.’ 칼을 써서 생명을 훼손하며 왕비는 떠올렸다.

‘이제 그 분의 말씀은 부서졌어.’

아쉽지는 않았다.

 

이제 고블린 승려가 경작을 맡기는 첫 시점에 왕비에게 ‘잡종’을 만들라고 한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왕비는 잡종 교배에 성공하였고, 임신한 아이는 인간과 고블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일지도 모르니까요. 왕비가 다시 세운 스스로의 명예와 존엄은 인간 여성, 인간 왕비로서의 것이 아닙니다. 왕비는 자신의 소임들을 재해석하고, 다시 선택합니다. 더이상 인간의 ‘왕비’이길 원치 않는 왕비의 마지막 결심은 왕비가 고블린의 왕비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 같아요.

이 소설은 인간의 왕비가 고블린의 왕비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성장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왕비’란 자리는 여성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나 다름없지만, 사실 그 자리에서 누렸던 명예들조차 제 것이 아니었음을 고백하는 왕비. 이야기의 끝까지 왕비는 결국 왕비고 사실 아주 통쾌한 결말은 아니지만, 왕비는 이제 막 새출발을 시작한 셈이니까요. 앞으로의 그의 선택들을 마음 깊이 응원합니다.

 

 

+) 마지막 장면 여관으로 돌아와 음유시인이 한 말은, 왕비를 자신들의 환상 속 여자로밖에 읽지 못하는 이들에게 작가가 직접 벌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고블린들은 왕비의 거짓과 진심을 알아보는 것에 반하여, 여관 사람들은 설명을 덧붙인 거짓과 진심조차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죠.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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