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랄 것도 없지만 뒤로가기를 누르셔도 됩니다.
1.
간단히 말하자면 이 소설은
사창가의 남자 안드로이드를 도망치게 도와주는 소녀 이야기입니다.
현대에 이런 소재는 사실 무겁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 업계에 종사하시는 분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성매매는 존엄한 인간을 사고 파는 행위라고 여겨지며, 여성들이 그 피해자였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어떤 여성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제약과 한계 속에서 나름 주체적인 선택을 내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자유로운 선택인지… 는 확신하기 어렵죠.
이렇게 추상적이고 철학적 문제로 말하기에는, 제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 받는 분들도 물론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이런 거추장스러운 문제는 쿨하게 던져버립니다. 여기는 미래이며, 사람이 아니라 안드로이드이고, 여자가 남자를 구원하니까요.
2.
이 소설 주인공 소녀는 남자친구에게 차이고,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보여주지만,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에서 지쳐 방황하며 걷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평범한 사람이죠.
고장나서 돈도 못 버는 안드로이드 친구 플라잉은 이제 소각될 신세입니다. 이 세계에서 안드로이드는 존엄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모양입니다. 언어를 통해 생각을 하고, 죽음을 두려워 할 수 있는데도 말이죠. 인간이었다면 끔찍하게 여겨질 소재가, 안드로이드이기에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인간도 생명체도 아닌 기계니까요.
안드로이드 자신도 소녀도 죽음을 고장난 선풍기 버리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주인공 소녀와 안드로이드의 말투 만큼이나 이야기는 가볍습니다.
이러한 논리를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걸 보고 저는 놀랐습니다. 독자들의 편견을 드러내는 걸지도 모르죠. 제가 여성이나 동물의 권리를 가볍게 생각하던 때가 떠올랐거든요. 진짜 안드로이드가 만들어진다면 저는 그들의 권리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은 물건이 아니기에.
3.
플라잉은 성매매 안드로이드지만 이 소설은 성적 묘사에 탐닉하거나, 철학적이며 염세적인 고민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한국 근대 소설에 나오는 인텔리 남자들처럼 동정이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죠.
소녀는 플라잉의 사연을 듣고 TV에서 굶어죽는 아이들을 본 것 같은 진지함으로 “맙소사! 그럼 인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거네요! 이런 안 되겠어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탈출극이 시작되죠.
두 사람은 귀엽고 우스꽝스럽게 탈출을 계획하고 역시 가볍게? 성공합니다. 그 시대에 안드로이드에게 위치추적 앱 하나 심어놓지 않은 건지!
4.
사실 탐정 소설을 쓰는 촉으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안드로이드 친구가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탈출을 확신해서가 아닌가 하고요.
안드로이드 친구는 이미 그런 앱 정도는 정지시켜놨고 탈출 계획도 다 세워놓았을지 모릅니다. 미리 준비한 것 같은 설명조의 대사도 이렇게 가정하면 납득이 갑니다. 어차피 소각시킬 안드로이드였으니 주인도 찾지 않을 겁니다. 버리려던 고장난 선풍기가 갑자기 사라졌을 뿐인 거죠.
단지 계획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필요한 게 있었습니다. 바로 연극에 동참해 줄 착한 손님이죠. 단순해 보이지만 공범이 없다면 쉬운 계획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탈출하지 못했던 걸 보면 다른 손님들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5.
이 이야기의 배경은 일본입니다만, 저는 일본 만화나 라이트 노벨을 떠올렸어요. 어딘가 본 것 같은 보이 밋 걸 이야기같죠. 여기서는 걸 밋 보이이긴 합니다만.
사실 저는 그런 이야기들도 좋아합니다. 힘겨운 세상에서 두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나쁘지 않으니까요. 물론 이 두 친구는 사랑이라고 해야할지… 작가님의 말씀대로 예상치 못한 방향입니다. 집에 찾아와 달라니. 인간의 윤리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관계죠. 소녀는 안드로이드랑 있었던 시간이 즐거웠던 모양이고, 이름을 알려달라는 걸 보면 안드로이드 소년도 소녀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관계가 좀 특이하긴 해도 윤리적으로 문제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찾아와 달라는 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니까요. 부탁은 상대의 선택을 존중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안드로이드 친구도 “2000엔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을 파는 게 아니라, 대등한 연인이 되고 싶다는 의지가 아닐까… 하면 비약이겠지만요. 불가능한 추론도 아닙니다.
서로 아껴주면서 선택을 존중해주는 사랑이라면 좀 이상하고 상식에 어긋나더라도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이 소설이 마음에 듭니다. 가볍지만 나쁘지 않아요. 불편한 부분이 있지만 유쾌합니다. 두 사람과 안드로이드에게 반짝이는 별빛이 내리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