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매우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매우매우 스포일러 함유합니다.
매우매우 매우매우 매우합니다(?)
큰 문제가 생겼다. 노트북이 당최 켜지질 않는 것이다! 비싼 돈(?) 내고 안전가옥엘 왔는데 이래서야 소설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노트북이 스스로를 고치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릴 거 같아서, 나는 신원섭 작가의 ‘짐승’을 가져와 읽었다. 출간되었을 때 초판본을 구입하였지만 원래 책이라는 게 구입했다고 다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미 사놓고 덜 읽은 책이 수십권이다. 짐승의 순서는 한참 나중이었다. 그러니 오늘 이 작품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순전히 노트북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1. 군상극의 인물 구성, 안나 카레니나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가장 유명한 소설 첫문장에 순위를 매긴다면 언제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에 반하여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의 독서는 1권의 절반을 넘기지 못했다. 문체도 문제였는데 더 큰 문제는 인물이었다. 나는 그 수많은 인물의 폭풍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인물이 많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인물을 부르는 호칭도 인물마다 제각기 다른 까닭에 도무지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래서야 세계 최고의 문학 작품이라느니 완벽한 예술 작품이라느니 해도 별 감흥이 없다.
군상극은 인물간의 관계가 어느정도 명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가 서사를 파악하기 이전에 인물의 관계를 파악하려다가 기진맥진하여 나가떨어지게 된다. 이 작품 ‘짐승’에서는 인물간의 관계가 어느정도 명료하다. 안나 카레니나가 아니더라도 보통의 군상극을 읽을 때면 나는 A4용지를 준비하고 거기에 인물간의 관계를 적으면서 읽는다. 일종의 관계도를 그려나간다. 하지만 그런 나 조차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관계도가 필요하지 않았다.
인물의 관계가 필요 이상으로 명확하게 제시되는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작품의 향후 행방이 어느정도 유추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인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끊었다. 미싱 링크 하나를 추가하여 인물 사이의 관계를 혼돈에 빠트렸다. 그리하여 독자는 인물과 인물 사이의 관계를 ‘어느정도는’ 파악할 수 있지만 작품이 끝나갈 때까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게 된다.
2. 사건의 시간 구성, 웨스트월드
일반적으로 소설의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소설의 첫페이지를 과거라 한다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는 현재가 된다. 첫페이지가 현재라면 마지막 페이지는 미래다. 그 사이에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는 회상장면을 추가하는 등의 액자식 구조를 차용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은 보통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미국의 HBO에서 방송한 드라마 중에 ‘웨스트월드’라는 작품이 있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은 않겠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시간의 흐름 그 자체가 전개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제시하는 사건의 전개는 뒤죽박죽이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규칙성 없이 넘나들며 온갖 떡밥을 뿌린다.
시간의 순서가 뒤섞이게 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받아들이는 쪽 입장에서 사건을 한 눈에 파악하기가 매우 힘들어진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데 아무리 작품이 시간의 순서를 섞어놨더라도 독자는 순서대로 정리하고자 한다. 사건 A는 사건 B에 선행하고, 사건 C보다는 나중에 일어났으며, 사건 D는 아직 명료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이다.
독자는 이렇게 나름대로 시계열을 정리하면서 읽어내려가는데, 만약 사건에서 시간의 순서를 가늠할 수 있는 어떠한 힌트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독자는 짜증을 내거나 지루함을 느끼거나 심할 경우 독서를 포기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시간의 순서를 뒤섞으려면 순서에 대한 힌트가 있어야 한다. 마치 문제적 남자에 나오는 논리 퍼즐 같은 식으로. 그렇게 하면 독자는 정말 ‘퍼즐을 풀듯’ 흥미를 느끼며 이 사건의 순서를 풀어보고자 덤벼들게 된다.
이 작품 ‘짐승’은 처음부터 시간의 순서를 와장창 뒤흔들어놓았다. 그렇지만 인물의 궤적이 사건의 순서를 재조합하는 좋은 단서가 된다. 덕분에 그리 어렵지 않게 사건의 경과를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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