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룬토는 면회실 유리벽 너머의 다밀렉을 보지도 않고 회중시계만 만지작거렸다.
“호룬토, 면회 시간이 끝나가는데…”
“아저씨, 형량이 이제 얼마나 남았죠?”
“747년하고도…”
“좀 빨리 나가게 해 줄게요. 법률 지식 다 까먹진 않았죠?”
오랜만에 입어 보는 정장이었다. ‘번연’이라는 오크를 마주한 다밀렉은 라사레인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당신이 나를 변호사로 선임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들었습니다. 변호사로서, 나는 당신의 형량을 낮추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려면 날 믿고 진실만을 말해줘야 합니다.”
“말했잖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정령이 내 주먹을 이끄는 바람에 그런 거라고.”
“당신은 정령을 부릴 수 없어요. 호룬토처럼 혼혈도 아니고.당신은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가죽장갑을 착용했고, 그 장갑에 스터드까지 부착했습니다. 대체 왜 그랬습니까?”
“젠장, 내가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나고오! 호룬타스가 오크를 해방시키기 위해 하얀 나무를 공격했지만 고작 그런 거 가지고 제국의 지배자들이 눈 하나 깜빡할 거 같아? 부순다, 이 망할 놈의 제국! 이러려면 뢰비아드롱의 심장이 아니라 제국의 심장,국가의 대가리, 명함도 신분증도 없는 비선실세 유권조를 쳐야 한다고오!”
다밀렉은 돌아서 한숨을 쉬었다.
“왜 나를 선임했습니까.”
“오크변호사가 재판정에 나오는 게 제일 이목을 끌 거 같아서.당신은 국가의 개야. 제국은 당신을 ‘오크도 제국대학 입학하고,변호사도 할 수 있다’는 광고판으로 써먹고 있지. 오크 중에 당신 말고 변호사가 또 있나? 대다수 오크들이 착취당하며 차별대우에 항거할 때 제국은 ‘오크들이 핍박 받는 건 기회를 줬는데도 불평하며 폭력시위나 하기 때문이다! 다밀렉처럼 노오오오력을 하면 다른 종족처럼 출세할 수 있는데!’ 이러려고 당신을 콕 집어서 대학에 입학시킨 거야. 동족상잔을 하라고 해도 순응하는 당신만, 특별히. 입학은 그랬더라도 당신은 졸업하고서 인권 변호사, 아니 옼권 변호사 가 될 수도 있었어!라사레인의 재판이 기회였지. 가힘마드를 죽인 진범을 밝혀낼 수 있었어. 진범은, 가힘마드가 투쟁하다가 공격당하게까지 만든 제국의 공고한 차별이지! 오크에 대한 차별이 없었으면 가힘마드도 평범하고 평화롭게 살았을 테니까. 그런데 당신이 한 게 뭐야. 고작 라사레인만 풀어주고 멈춰 버렸다고.”
“나는 그저 아무도 다치거나 죽지 않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그 ‘아무’가 당신과 친분이 있는 작자들 인거지? 당신은 앙캐아슈로 끌려가는 오크들도 구하지 않았어. 당신과 친분있는 리아나 같은 엘프들이나 가고일 경찰들만 구하려고 했지.호룬타스도 제국의 지배층을 흔들진 못 하고 바닥에서 테러만 일으킨다고 욕 먹고 있지만, 당신이 하는 건 뭐야? 호룬타스가 더 큰 피해를 일으키는 걸 막았다고? 그건 제국의 질서에 순응하는 거야! 시위대에게 총을 쏘는 국가에 대고 대화를 요청하면, 기득권은 듣지 않아. 변호사님의 중립은, 기존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뜻이라고오오! 내가 어디까지 설명해야 되냐, 이 오크변호사야! 악악악악!”
“당신의 말을 듣다보니, 전략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사실,법정에서 당신의 정신이상을 주장할 계획이었습니다. 엘프가 조종해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주먹을 휘둘렀다는 말을 들었을 때까진 그랬습니다. 심신미약자, 미성년자, 이성이 없어서 자기 행위에 책임질 수 없는 자의 행위는 처벌하지 못하니까요.그런데,”
“바로 그거야, 변호사 양반. 그걸 주장하라고. 나는 유권조가 시켜서 그를 가격한 거야. 내 의지는 없었어. 유권조가 이 제국과 법의 설계자이자 수호자고, 모든 인물들을 움직이는 자니까.”
“압도적인 피지컬의 오크가 연약한 인간을 가격하는 것은 살인미수입니다.”
본과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이제는 검사가 된 리아나가 차분하게 번연을 감옥으로 한발짝씩 밀어넣고 있었다.
“보통의 오크와 인간이라면 그렇지만, 유권조는 아닐세.”
“다밀렉 변호사님, 법정에선 경어를 쓰시죠. 저는 더 이상 당신의 사무관이 아닙니다.”
“미안하네, 아니, 죄송합니다.”
유권조는 키가 크고 온몸이 근육질이었다. 환자복이 히어로 코스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에 반해 희고 깨끗한 얼굴은 동안이어서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가해자는 자정에 편집자로 가장하고 출판계약을 하자며 유권조를 찾아가 “유권조오오오!”를 외치며 안면을 강타한 후 격한 기쁨의 딴스를 추었습니다. 범행 동기가 뭡니까?”
“유권조는 모든 것이 인간에 맞춰진 제국에서는 ‘인간과 다름’이 장애라고 했지. 오크의 어금니도, 가고일의 날개도 그런 이유로‘장애’가 되는 거라고. 인간과 닮고 싶은 오크들은 생어금니를 발치하지. 내 어금니!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고! 죽여버린다,유권조오오오! 너도 똑같이 어금니 발치의 고통을!”
다밀렉이 변론하기도 전에 끼어든 번연이 난동을 부리려는 것을, 빨간 머리의 가고일 경관인 리체르카가 채찍으로 제압했다. 리아나가 머리에 파란 장미를 꽂은 인간 판사를 보며 판결을 내리듯 말했다.
“명백한 가해의도를 가진 계획범죄는 가중처벌됩니다.”
“판사님, 저 검사는 제 변호사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다고요오오!저 엘프 검사가 다밀렉 변호사의사무관이던 시절에 온갖 뒤치닥거리를 다 했는데, 변호사 양반이 호룬토라는 엘프 혼혈 오크를 만나더니 ‘리아나랑 호룬토랑 엘프 캐릭터가 겹친다’며 엘프 사무관 대신 호룬토한테 온갖 치다꺼리를 시키기 시작했다고요! 오크 변호사가! 엘프 정령으로 다 해결해 먹으려고오오! 그 과정에서 저 엘프 사무관은 분량도 실종되고 거주지도 잃고오오! 다밀레에에엑!”
재판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판사는 번연을 제지하는 대신 엄숙하게 질문했다.
“사실입니까, 리아나 검사?”
“제가 악감정을 가지고 있진 않고, 오히려 애초 고용계약 외의 각종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하던 변호사에게서 해방된 홀가분함이 훨씬 더 크지만…그 외에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다밀렉 변호사는 당시 미성년자이던 호룬토를 위험지역으로 데리고 다니며 정령을 부리게 하고, 오크인 호룬토가 좀도둑 에이다의 목줄을 끌고 다닐 때도 제지하지 않아 미성년자의 인성교육을 방기하였습니다. 다른 존재들에게는 꼬박꼬박 존대하는 다밀렉 변호사가 유독 저와 호룬토에겐 반말만 했던 것으로 다밀렉 변호사에게 엘프에 대한 종족 차별적 사고가 있었던 건 입증될 수 있습니다.”
다밀렉은 자신을 변호할 필요를 느꼈다.
“제국대학에서는 인권, 옼권, 엘권 같은 건 배우지 못했습니다. 카엘로 교수도 오크 가힘마드가 무죄란 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교실로 끌고 들어와 모욕하며 모의재판을 했습니다. 그래서 호룬토에게는 책 많이 읽고 오크도, 다른 종족도 많이 만나고, 정규교육 과정을 차근차근 밟으라고 했습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밀렉 변호사도 호룬토처럼, 원하고 필요한 교육을 더 받을 의사가 있습니까?”
판사의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다밀렉은 잠시 망설이다 “네”라고 대답했다.
“피의자도, 이제 오해가 풀렸습니까?”
“전 엘프 검사에겐 관심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오직!유권조오오오!”
“대체 유권조는 왜 공격한 겁니까!”
법정이 혼돈의 도가니가 되어갔다. 다밀렉은 정신을 수습했다.
“존경하는 판사님, 심신장애로 인하여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합니다. 피의자는, 유권조가 자신을 조종하여 공격하게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신감정을 신청합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다 유권조다! 유권조가 알려줄 듯 말 듯 안 알려주고 나를 기만했다! 가힘마드를 죽인 진범도, 라사레인의 모친의 사망경위도 궁금해서 미쳐버리게 했다고오오오!유권조는 다 알고 있는데!”
“유권조, 그게 사실입니까?”
방청객들이 술렁였다. 유권조는 부어오른 얼굴을 가리키며 말하지 못하는 척 했다. 방청석에서 좀도둑 에이다가 튀어 나왔다.
“봤어! 내가 다 봤어! 나는 늘 유권조가 제국에 있을 때나 닷슈 섬에 있을 때나 다 따라다녔다고! 유권조는 알아! 다 알아!”
“에이다를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에이다, 유권조를 어디서 목격했습니까?”
“법무장관의 파티에서! 법무장관이 유권조에게 충성맹세를 했어! 유권조가 가힘마드도, 라사레인 모친의 사망도 다 알고 있다고 했어! 그가, 구상하고 실행했으니까! 그가 곧 제국이니까!”
“유권조, 그게 사실입니까?”
“헤헤, 판사님, 절 여기서 나가게 해 주시면 판사님 귓속에 알려드릴 것이에요.”
유권조가 눈웃음을 쳤지만 판사는 넘어가지 않았다. 리아나 검사가 선언했다.
“유권조를, 살인교사 및 방조 혐의로 기소합니다.”
잘 짜여진 각본처럼, 플롯이 탄탄한 소설처럼 재판정이 돌아갔다. 아무래도 독자들은 다 알고 다밀렉만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주문. 피고소인 유권조에게 무기한 노동교화형을 선고한다.”
번연이 격한 기쁨의 딴스를 추었다. 살짝 경박해 보이지만 위엄이 없지는 않은 희한한 춤사위였다.
“유권조오오오!”
다밀렉의 절규가 법원 바깥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늘 솟아있던 유권조의 승모근이 처음으로내려갔다. 리체르카의 채찍이 족쇄에 묶인 발을 끌며 조금이라도 감옥 밖의 공기를 누리려는 그의 뒷모습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가여운 수감자여, 당신을 데리러 왔습니다.”
글감옥의 건물주, 뢰비아드롱이 법원 밖의 밝은 햇살에 찌푸리는 유권조를 감싸며 불을 뿜었다. 몰려있던 군중이 불길을 피해 흩어졌다. 리체르카가 뢰비아드롱의 목과 유권조의 손목을 수갑으로 연결했다. 다밀렉은 군중 속에서 열쇠를 흔드는 좀도둑 에이다를 발견헀다.
“에이다, 유권조를 풀어 주게. 돈은 유권조가 ‘오크 변호사’유료화로 벌어들인 금화로 지불할 거야. 그가 풀려나면, 오크 해방전선에 관해 물어보려 하네.”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이미 ‘평생 돈걱정 안 해 봤고, 돈다발 쯤은 아무렇지 않게 희사하는 재력가’ 이연인이 나한테 자손 대대로 평생 놀고 먹을 수 있는 돈을 주면서 절대 유권조 풀어주지 말라고 부탁했다고. 이연인이란 판사, 돈이 얼마나 많은지 뢰비아드롱의 건물을 감옥으로 사용하려고 시세의 몇 배나 되는 임대료까지 선불로 지불했다니까? 나 이제 이연인 집에 있는 금고 털러 갈 거야. 유권조, 출옥한 다음에 보자고!”
에이다가 손키스를 날리며 사라지고 나서야 유권조는 이 엄청난 음모의 전모를 얼마쯤 파악했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리체르카가 뢰비아드롱의 등에서 내린 유권조를 건물 지하의 글감옥으로 밀어 넣으면서 다시 한 번 채찍을 휘둘렀다.
“작가님! 숨만 쉬고 글을 쓰시라고요! 나머진 다 알아서 해 드릴 테니까. 아니, 숨도 참고 써요!”
은은한 향기, 귓가를 간질이는 음악, 세련되고 모던하면서도 곳곳에 금박과 시뻘건 손자국으로 장식해서 화려한 포인트를 살린 글감옥으로 안내된 유권조는 이런 감옥이라면 평생 나가지 않고 글만 써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만찬’을 보기 전까진.
“저기요…왜…이거밖에 없어요? 헤헷, 이거 말고 고기를 주시면 오크변호사 3부, 4부, 5부도 쓸 수 있지 말이어요.”
허공을 보며 외친 유권조의 말을 들었는지 빨간 바람개비를 든 엘프가 나타났다.
“이연인 님의 지시대로 차린 거랍니다. 열량이 필요하면 초콜릿을 먹고, 목이 마르면 커피와 홍차를 마셔요. 영원히 잠들지 말고 글만 쓰라고요.”
유권조는 핏발 선 눈을 비비며 ‘오크 변호사’ 3부를 쓰기 시작했다. 4부, 5부, 6부…유권조는 바위처럼 무거운눈꺼풀을 들어올려 모래가 들어간 듯 까끌거리는 눈으로 꽃병에 꽂힌 붉은 꽃을 보았다.
‘밖은 봄인가…’
마침표 대신 말줄임표를 찍어나가던 유권조 앞에서 꽃이 아닌 빨간 바람개비가 힘차게 돌아갔다. 유권조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영겁의 시간이 지나야 완결될 ‘오크 변호사’를 이어 쓰기 시작했다.